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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98화 (197/556)

난 할 수 있어 198화

대찬은 평소와 똑같이 업무를 처리했다.

전략기획실은 각 부서에서 올라온 사업보고서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경영진이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조언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마케팅팀에서 올라온 보고서가 있었다.

“이번에 TV CF 찍네요?”

대찬의 말에 송희근 과장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로 스르륵 옆에 다가왔다.

그는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대찬에게 물었다.

“모델로 누구 섭외됐어요?”

“남자, 여자 1명씩인데 남자는 원두표구요.”

“원두표? 야, 섭외 잘했네. 섭외비로 예산깨나 깨졌겠는데?”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여자는 윤이영.”

“윤이영? 처음 들어보는데.”

그러자 연예인 생일까지 줄줄 꿰고 있는 오다혜가 끼어들었다.

“윤이영, 그 있잖아요. 영화 ‘칼 든 여자’ 조연으로 나왔는데. 거기서 존재감 엄청났다고 소문이 자자했어요.”

“칼 든 여자는 뭐야?”

“과장님, 너무 회사 일만 열심히 하지 마시고 문화활동도 좀 하세요.”

오다혜의 말에 송희근 과장은 찌릿 눈빛을 쐈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 든 여자 작품성도 좋고 흥행도 나름 나쁘지 않았어요. 윤이영이면 될성부른 떡잎이에요.”

대찬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첫 번째 삶의 기억 덕택이었다.

윤이영은 2013년, 이 당시에는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대찬이 살았던 2019년에는 미모와 연기력을 모두 갖춘 배우로 명성이 자자했다.

윤이영의 이름을 처음 들은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원두표에 비하면 급은 좀 많이 떨어지겠는데.”

이 말에는 오다혜도 동의했다.

“아무래도 그렇죠. 원두표급 배우는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까요.”

“꼭 원두표를 써야 했나…….”

대찬은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원두표의 팬이기도 한 오다혜가 참견했다.

“왜요? 원두표면 최고죠. 조 차장님 원두표 안티세요?”

“안티? 안티는 아닌데…….”

대찬의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원두표는 이즈음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배우였다.

그런데 머지않아 당대의 톱스타에서 파렴치한으로 전락하고 만다.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악행들이 일거에 까발려지면서부터였다.

마약을 복용하고, 상습적으로 불법도박을 벌이고, 애인을 폭행하고, 다수의 여인들에게 성폭력을 저지르고,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회계장부를 조작하고, 거기에 탈세까지.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혐의들에 원두표의 이름은 한 달 내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하고, 그는 끝내 감옥에 갇힌다.

대찬이 첫 번째 삶을 마감했던 2019년까지도 그는 복역 중이었다.

‘사건 터진 게 이맘때였던 거 같은데.’

대찬은 불안감을 씻으려야 씻을 수가 없었다.

물론 첫 번째 삶의 기억이 두 번째 삶에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성질머리가 어디로 가겠는가.

높은 확률로 원두표의 추문이 발생할 것이다.

게다가 원두표가 공짜로 광고를 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필래마트는 엄청난 광고료를 그에게 약속했다.

필래마트는 출범 이후 고속성장을 했지만, 아직 위마트와 업하우스에는 근소한 차이로 뒤진 업계 3위였다.

이번 TV 광고는 원두표의 압도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내세워 필래마트가 더 이상 뒤처진 3등이 아니라는 걸 천명하려는 의도가 짙었다.

그 때문에 필래마트는 적정한 값보다 더 웃돈을 얹어 원두표를 섭외했다.

그러니 대찬이 보기에는 헛돈도 이런 헛돈이 없었다.

대찬은 옥문영 상무에게 다가갔다.

“상무님.”

“어, 조 차장.”

“마케팅팀에서 올린 TV CF 건 있잖습니까.”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원두표를 메인모델로 쓰고, 우리도 많이 크긴 컸다. 그치?”

“네. 그렇긴 한데 원두표는 캔슬하는 게 어떨까요?”

그 말에 옥문영 상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 왜? 너무 값을 비싸게 불러서? 그래도 원두표면 그만한 값은 할 거 같은데.”

“그런 것도 있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원두표의 평판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요.”

“뭐? 평판? 원두표 이미지는 깨끗한 편 아닌가? 도대체 조 차장 주변에는 누가 있는 거야?”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근거가 고작 주변의 평판이야?”

“그 평판이란 게 정황이 제법 구체적이어서요. 신뢰할 만합니다.”

옥문영 상무는 팔짱을 낀 채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도 어떻게 낚은 대언데.”

“윤이영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인모델로 장기계약을 제안해보는 게 어떨까요?”

“뭐? 갑자기 윤이영은 또 왜? 뭐 돈 먹은 거 있어?”

“아뇨. 그럴 리가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옥문영 상무는 수긍하지 못했다.

근거가 빈약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찬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없는 근거를 그럴듯하게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 난처한 상황.

대찬의 말을 곰곰이 듣던 옥문영 상무는 가볍게 탁자를 쳤다.

“내가 조 차장 좋아하는 거 알지?”

“예전보단 확실히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옥문영 상무는 살짝 웃었다.

“하지만 조 차장이 아무리 좋아도 말 한 마디만 듣고 이미 마케팅팀에서 심사숙고해서 결론 낸 걸 물릴 수는 없어. 마케팅팀에서 항의할 게 분명해.”

“그 말씀도 이해는 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정 미심쩍으면 조 차장이 회의에 가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네? 뭘 말입니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잖아. 조 차장이 결사반대할 정도의 쌍놈이라면 척 보면 견적 나오지 않겠어?”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은 맞으니까요.”

“그래. 주변의 평판만 덜컥 믿지 말고, 조 차장이 직접 가서 원두표를 보고 판단해.”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만약 제가 그러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옥문영 상무는 픽 웃었다.

“뭘 어떡해. 조 차장 감각을 믿고 마케팅팀의 결정을 반려할 거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일이 쩨쩨하게 계산기 두드리고 머리만 굴려서 되는 게 아니거든. 감각, 육감 같은 것도 무시하지 못해.”

“그렇죠.”

“나도 느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고려하지 않는 건 아니야. 특히 조 차장처럼 박수무당처럼 생긴 사람들은 웬만하면 그 느낌이 맞아 들어간단 말이야.”

“아이고, 잘 나가시다가 박수무당은…….”

“잘생겼단 뜻이야.”

옥문영 상무는 마케팅팀과 광고대행사의 관계자들, 모델인 원두표와 윤이영이 참여하는 미팅에 대찬도 배석시켰다.

대찬은 이미 미팅에 참석하기 전부터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대찬은 회의 장소에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마케팅팀의 직원들이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대찬보다 연차가 오래된 직원들도 많았지만 모두 직급은 과장, 대리급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조 차장님.”

“안녕하세요. 다들 일찍들 나오셨네요.”

“…네.”

마케팅팀의 직원들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대찬은 그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들에게 대찬은 불청객이었다.

원두표를 섭외하기 위해 상당한 노동력을 투입했고, 끝내 성공했다.

근데 윗선에서 갑자기 전략기획실 직원을 현장으로 투입했다.

보고서에 순순히 오케이 사인을 내려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마케팅팀 직원들의 대찬을 바라보는 눈빛이 고울 리가 없었다.

대찬도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웃으면서 말했다.

“윤이영 씨를 섭외한 건 정말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회사가 단기간에 고성장을 이뤄낸 건 다 마케팅팀의 감각 덕분입니다.”

“하하, 별말씀을…….”

대찬의 공치사에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 말이 눈치 빠른 사람에게는 또 불안하게 들렸다.

‘윤이영만 칭찬하는 걸 보니 원두표 캐스팅에 불만이 있는 거네.’

회의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대행사 측 직원들이 도착했다.

윤이영도 그들과 같이 왔다.

‘윤이영이다.’

대찬은 윤이영에게 가는 시선을 제어하지 못했다.

미래의 톱스타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인상이 수수하면서도 이목구비가 자리를 잘 잡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외모를 매스컴은 부담 없는 화려함이라고 추켜세우며 칭송할 것이다.

그런 평가를 듣기에는 아직은 소위 말하는 ‘급’이 떨어지는 상태였지만.

윤이영이 대행사 측 사람들과 정시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것도 급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원두표가 정시보다 40분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는 것도, 아마 급의 문제일 터.

원두표를 위해 10명도 넘는 사람들이 지루한 시간을 견뎠다.

먼저 실무자들끼리 처리할 문제부터 논의하자는 마케팅팀의 제안에, 광고대행사 측 사람들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안 될 말씀이에요.”

“네? 왜 안 됩니까? 촬영에 소요되는 예산문제까지 원두표 씨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데…….”

그러자 원두표에 앞서 도착해 있던 그의 소속사 직원이 말했다.

“원두표 씨는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거든요. 당사자 없이 회의를 시작하는 건 명백한 결례죠.”

“예의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40분째 지각 중이시군요.”

대찬이 사납게 쏘자 소속사 직원이 눈총을 쐈다.

“스케줄을 마치고 부랴부랴 오는 중이십니다. 길이 막히는 걸 어떡합니까? 결례를 저지르는 건 원두표 씨가 아니라 서울의 트래픽 젬이에요.”

츄래퓍 졔엠, 쓸데없이 굴리는 발음이 듣기 싫었다.

대찬은 그를 더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는 마케팅팀 직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그사이에 원두표 씨 도착하면 바로 연락주세요.”

“알겠습니다, 차장님.”

대찬은 소속사 직원을 보며 기어코 한마디 쏘았다.

“이건 제가 아니고 체내의 니코틴이 저지르는 결롑니다?”

“참 나.”

대찬은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때웠다.

원두표의 얼굴을 보지도 않았는데 그의 판단은 더욱 굳어져갔다.

대찬이 자리를 뜬 사이, 자리에 앉은 윤이영이 슬며시 웃었다.

그걸 보고 대행사 측 직원이 물었다.

“윤이영 씨, 갑자기 왜 그렇게 웃어요?”

“아, 네? 아뇨, 그냥…….”

윤이영 측 소속사 직원은 그녀의 등을 살짝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원두표 측 소속사 직원이 그쪽으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원두표의 소속사는 체급이 공룡이었고, 윤이영은 연기파 조연급 배우 위주의 중소형 소속사였다.

업계 큰형님에게 괜히 미운털 박히지 않으려는 게 직원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윤이영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묻어 나왔다.

지금껏 사람들은 원두표를 떠받들기만 했지, 저렇게 기를 쓰고 한마디 쏴대는 사람이 없는 탓이었다.

대찬은 서울 시내를 내다보며 옥상에서 담배를 피웠다.

고요한 가운데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직장생활에서 몇 안 되는 망중한의 기회였다.

그런데 그 고요한 시간마저도 대찬은 충분히 허락받지 못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오른쪽에서부터 가까워졌다.

‘그만 피우라는 뜻이네.’

대찬은 아직 조금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회의장소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찬을 스쳐 지나갔다.

대찬은 개중 한 명을 분명하게 알아봤다.

‘뭐야, 원두표잖아.’

말끔하게 정장을 입은 원두표는 같은 남자인 대찬이 봐도 탄성을 지르게 할 정도로 멋졌다.

하지만 마음 좋게 감탄만 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았다.

원두표는 낯선 사람인 대찬의 시선을 의식하며 슥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대찬이 담배를 피웠던 그곳으로 가서 마찬가지로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팅, 지포라이터를 열어 공손히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원두표는 항상 있는 일인 듯 자연스레 불 시중을 받았다.

삐딱하게 서서는 참 느리게도 담배를 음미했다.

대찬은 아래로 내려가면서도 원두표에게 눈을 흘겼다.

‘늦은 주제에 저렇게 여유를 처부리시겠다.’

대찬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층계를 내려갔다.

원두표가 회의실에 도착한 건 예정보다 57분 늦은 때였다.

저 멀리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게 유리문으로 보였다.

그러다 다 와서야 헐레벌떡 뛰어오는 척을 했다.

대찬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영동대교 진짜 장난 아니네요!”

원두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싹싹하게 말했다.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다른 이들도 그것보다 더 큰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다들 일어서서 그를 맞이했는데, 대찬은 일어서지 않았다.

삐딱하게 그를 향해 쏘았다.

“원두표 씨, 담배 피울 여유는 있으셨나보죠?”

그 말에 마케팅팀 직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저 새끼가 지금 고춧가루 뿌리러 왔나!’

원두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하, 다, 담배라뇨?”

“옥상에서 다 봤어요. 담배만 안 피우셨어도 10분 정도는 세이브 하셨을 텐데.”

원두표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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