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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97화 (196/556)

난 할 수 있어 197화

김산하는 의아한 빛을 띠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아쿠는 김산하의 옆 책상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는 진지하게 오랫동안 얘기했다.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듯, 아쿠는 살짝 흥분한 상태로 빠르게 얘기했다.

하지만 그걸 듣는 김산하의 표정은 어쩐지 자꾸 어두워지기만 했다.

“고민을 좀 해보겠습니다.”

“산하, 이건 말도 안 되는 기회예요. 고민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내가 이 시간까지 기다린 것도 다른 직원들이 질투할까봐 그런 거예요.”

“네, 좋은 기회인 거 아는데…….”

“결정하면 바로 얘기해줘요. 머뭇거리면 누가 낚아챌 거야.”

아쿠는 눈을 찡긋하고 먼저 회사를 떠났다.

김산하는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허운의 결혼식 날.

대찬은 약속대로 결혼식의 사회를 봐줬다.

대본대로 식을 쭉 진행하던 대찬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신랑이 신랑 노릇 잘하려면 체력이 필수입니다.”

갑자기 대본에 없는 말을 하니 허운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서 건강한 신체를 확실히 뽐내야 장인, 장모님도 안심하고 신부를 보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야……! 뭐 하는 거야, 지금!”

허운이 대경실색해서 둘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대찬에게 항의했다.

신부 유채경이 얄미운 웃음을 지었다.

대찬은 허운의 항의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폭주했다.

“자, 신랑은 신부를 안아주시고요. 하나 하면 채경아, 하면서 내려가고, 둘에 잘 살자, 하면서 올라가는 겁니다.”

“야, 나 안 할래.”

대찬은 계속 허운의 말을 무시했다.

그가 박수를 유도하자 이런 이벤트를 꺼리지 않는 어른들이 웃으면서 기꺼이 박수를 쳤다.

유채경도 은근히 바라는 바가 있는지 허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체력테스트 좀 해보자.”

결국 허운은 버티지 못하고 유채경을 안았다.

보기보다 부실한 허운은 이를 악물고 대찬의 구령에 따라 앉았다 일어나며 ‘채경아, 잘 살자!’를 외쳤다.

양가 부모님을 비롯한 하객들은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대찬은 턱시도를 입은 허운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유채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결혼식이 끝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결혼식 사회도 큰일은 큰일이라고 긴장이 풀리니 잠깐 미뤄두었던 졸음이 이자까지 쳐서 몰려왔다.

대찬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피로연장에서 간단한 한 접시로 허기를 채웠다.

대찬이 먹을 것을 깨작이며 한 접시를 먹을 동안, 하객으로 참석해서 대찬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옥문영 상무는 벌써 다섯 접시째를 해치웠다.

옥문영 상무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거 한창 먹을 때에 양이 그게 뭐야? 좀스럽게.”

“제가 원래 한 식욕 합니다만, 오늘은 잘 안 먹히네요.”

“결혼한 허운이가 부러워서 그러지.”

대찬은 씩 웃었다.

“그런가 봐요.”

그때 허운과 유채경이 피로연장을 돌면서 하객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전했다.

대찬과 옥문영 상무, 그리고 전략기획실 직원들이 앉은 자리에도 들렀다.

대찬은 허운을 보고 톡 쐈다.

“아주 싱글벙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네. 부러워, 우리 허 과장님.”

“부럽지? 부러워 죽겠지? 조 차장님도 빨리 결혼하세요.”

대찬은 피식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허운의 손을 잡았다.

“잘 살아.”

그리고 유채경과도 악수를 했다.

“허운이 남편 노릇 잘 못하면 나한테 귀띔해줘. 직장생활 고달프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럴게요.”

유채경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허운이 툴툴거렸다.

“그럼 나도 조 차장님한테 이르면 채경이 좀 괴롭혀주려나?”

“으이그, 속이 저렇게 좁아요.”

대찬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문영 상무가 대찬에게 물었다.

“벌써 가게?”

“네. 요즘 좀 피곤해서요. 늘어지게 자려고요. 먼저 들어가도 괜찮죠?”

“그럼. 들어가 봐. 나는 축의금 뽕 뽑으려면 더 먹어야 돼.”

“이미 본전은 차고 넘치게 뽑으신 거 같은데.”

대찬은 웃으며 옥문영 상무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먼저 예식장을 떠났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 덕분에 졸음이 곱절로 몰려왔다.

그때 대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김산하였다.

“어, 누나.”

“어… 사회는 잘 봤어?”

“그럼, 잘했지.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울어?”

“아니. 목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혹시 잠깐 시간 돼?”

“나 보려고? 잠 보충하기도 빠듯한데 괜찮겠어?”

“…응. 나 예식장 근처 카페야. 여기로 올래?”

“벌써 온 거야? 피곤할 텐데. 식장도 들르지 그랬어?”

“이제 막 도착해서 그럴 여유는 없었어.”

“조금만 기다려. 곧 갈게.”

“응.”

대찬은 전화를 끊고 곧장 김산하가 있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김산하가 웃으며 인사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음에 가까웠다.

대찬은 낌새가 심상치 않아 김산하에게 물었다.

“괜찮아? 무슨 일 있어?”

“…….”

대찬의 질문에 김산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술을 악물고 눈물을 참아봤지만 참아지지 않았다.

대찬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누나, 대체 무슨 일인데? 응? 나한테 천천히 말해봐.”

“미안… 미안해……. 나 울 자격도 없는 년인데, 울면 안 되는데…….”

대찬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김산하를 안았다.

김산하는 대찬의 품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다시금 눈물을 참았다.

대찬은 김산하의 머리를 쓰다듬고 맞은편에 착석했다.

김산하가 대찬이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말했다.

전날 밤 있었던, 그녀의 핀란드인 상사인 아쿠와의 일이었다.

아쿠는 김산하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의 기준에서는 기쁜 소식이었다.

“본사에서 이번에 발표한 Y리더 프로그램 들어서 알지?”

“네, 알고 있어요. 될성부른 젊은 직원들을 선정해서 임원승진을 보장하고, 집중적으로 교육해서 인재로 키워내는 걸로요.”

“맞아. 내가 왜 이 시간까지 기다려서 산하한테 이 말을 할까?”

“설마 제가 대상자로 선정됐어요?”

“Correct.”

김산하의 얼굴에 전율이 흘렀다.

“정말요? 와! 전 직원 중에서 극소수만 대상자로 선정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아쿠는 웃으면서 배경을 설명했다.

“산하의 업무능력은 동년배 직원 누구에게 비겨도 손색이 없으니까. 게다가 특히 한국인들, 업무중독이야. 일벌레라고. 그런 점 때문에 경영진에게 애사심 넘치는 직원으로 보였겠지.”

“하하…….”

“게다가 산하는 우리 회사에서 몇 없는 동양인 여성 직원이야. 회사가 다양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도 분명히 플러스 요인이 됐을 거야.”

“그렇군요.”

“아무튼 축하해.”

아쿠는 김산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산하는 웃으면서 그 손을 맞잡았다.

“열매가 달콤한 만큼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거야.”

“그렇겠죠? 교육도 많이 받아야 하고…….”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된 직원은 의무적으로 3년간 지사 생활을 하고, 이후 바로 본사 핵심부서에 배치될 거야.”

김산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3년은 여기 한국지사에 머물겠군요.”

“안타깝지만 그랬다면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고 얘기하지 않았겠지.”

김산하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네? 그럼……?”

“타성에 젖으면 안 되고 항상 새롭고 낯선 것에 도전해야지. 산하가 프로그램에 따르겠다고 하면, 곧장 요르단 지사로 파견될 거야.”

김산하의 눈이 흔들렸다.

“요르단이요……?”

“응. 재작년에 신설됐잖아. 맨몸으로 부딪치면서 실무경험을 확실하게 쌓을 수 있다는 게 경영진의 판단이야.”

그 말을 들은 김산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요르단에서 3년, 그 이후로는 미국 본사에서 계속 회사생활을 해야 한다.

김산하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둘이다.

슬슬 결혼을 염두에 둬야 하는 나이였고, 당연히 그 상대는 대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Y리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대찬과의 관계는 청산해야만 한다.

대찬과의 인연의 끈을 붙들겠다고 결정하면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를 놓치고 만다.

김산하는 그 말을 대찬에게 전하고 눈물을 꾹 참았다.

대찬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동공이 흔들리는 것까지 제어하지는 못했다.

“널 두고 이걸 고민하는 것부터가 예의 없는 일인 거 잘 알아.”

“아니야. 파격적인 제안이잖아. 임원 자리를 보장해준다는 건 거절하기 힘든 조건이야.”

김산하는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흔들리고 있어.”

“이해해.”

“…네가 가지 말라면 안 갈 거야.”

“가지 마.”

대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김산하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역시 김산하. 표정은 진짜 못 숨긴다니까.”

“대찬아…….”

“가지 말라고 하고 싶어.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 근데 그럴 수가 없어.”

“…….”

“내가 누나 입장이었어도 흔들릴 거거든, 분명히.”

“…….”

“누나 안 지도 참 오래됐어. 누나가 얼마나 일에 욕심이 있는지도 알고, 그만큼 열심히 해왔다는 것도 알아.”

김산하는 옷자락을 꼭 쥐었다.

대찬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내가 누나를 붙잡으려면 미국으로 회사를 옮길 각오 정돈 있어야 하거든. 근데 나도 그렇게는 못해. 필래에서의 커리어가 중요하니까.”

“응.”

“불쌍한 말로 누나 판단력을 흐리게 할 생각은 없어. 선택은 누나 몫이야. 누나 인생에 더 좋은 선택을 해.”

“…….”

“무슨 선택을 하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으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김산하를 홀로 두고 카페를 떠났다.

뒤돌아서는 동시에 대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가슴이 칼로 저미는 듯했다.

가슴을 칼로 저민다니.

누가 처음 쓴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당해보니 말 한번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대찬은 김산하가 그랬듯 눈물을 꾹 참았다.

첫 번째 삶에서는 불쌍하기만 했던 연애.

두 번째 삶을 살면서는 누구나 나를 질투하게 연애하자.

‘그렇게 각오했는데…….’

대찬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결국 난 할 수 없었네.’

다음 여자를 떠올리기에는 당장의 쓸쓸함이 컸다.

김산하는 2주일 후, 요르단으로 떠났다.

그녀는 떠나기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을 대찬과 함께 보냈다.

둘은 실컷 울었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눈물로 끝났다.

에로스는 필멸이고, 우정은 불멸이다.

대찬은 김산하와의 우정만큼은 불멸하길 바랐다.

전략기획실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허운은 신혼 티를 팍팍 내면서 조 차장도 빨리 날 잡으라고 눈치 없는 소리를 쏟아내려던 참이었다.

김산하의 동생인 김산호가 기겁해서 허운을 따로 불러 귀띔해주었다.

그러면서 소식이 퍼졌다.

그렇게 허운을 잠재운 김산호가 대찬에게 따로 말했다.

“차장님, 그래도 저는 사석에서 계속 형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김산하하고의 인연, 김산호하고의 인연. 둘은 별개야. 달라지는 건 없어.”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김산호에게는 그 웃음이 더 가슴 아팠다.

대찬의 내상은 깊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침울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사적인 감정은 사적인 공간에서만 분출했다.

전략기획실 직원들도 눈치 없는 위로가 도리어 독이 된다는 걸 알았기에, 그저 안쓰러워할 뿐이었다.

옥문영 상무만 대찬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 차장.”

“아, 네, 상무님.”

“사흘 휴가 줄게. 다녀와.”

“배려해주셔서 감사한데, 괜찮아요.”

옥문영 상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잠깐 바람 좀 쐬고 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찬은 사흘간 제주도의 김녕해변이 보이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낮에는 바다를 바라보며 독서하고, 밤에는 낯선 사람들과 잡담을 떨었다.

그렇게 마음의 짐을 덜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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