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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96화 (195/556)

난 할 수 있어 196화

서원웅은 오랜 시간 끝에 결론을 내렸다.

“동료 임원에 대한 멸시와 조롱은 사내 분위기를 크게 훼손하고, 동료 임원의 근로의욕과 애사심을 크게 저하시키며, 임원은 회사에 대한 영향력이 큰 만큼 피해를 끼치는 정도도 막심합니다.”

“…….”

“이에 전무 박수완 이하 회부된 모든 대상자들에게 감봉 2개월의 처분을 내립니다.”

서원웅이 그렇게 결론 내리자 최진갑 상무가 항의했다.

“서 전무님!”

“지금 이 자리에는 징계위원장 자격으로 있습니다.”

“…징계위원장님, 조대찬 차장은 엄중경고 처분으로 끝난 걸로 압니다만.”

“예, 그렇게 처분했습니다.”

최진갑 상무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항의조로 따졌다.

“너무 차별하시는 거 아닙니까? 조 차장은 엄중경고고, 저희는 감봉 2개월이라고요?”

“당연히 다릅니다. 차장보다 임원들의 영향력이 훨씬 크기 때문에 그 정도가 더 심하죠.”

“조 차장은 하극상을 했다고요!”

“하극상이든 상극하든 폭언은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게다가 최 상무님을 포함한 여러분은 여럿이 한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었으니 정도가 더 심하겠죠?”

“아, 진짜!”

최 상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서원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상 방종하면 추가 징계를 검토하겠습니다.”

“진짜 이럴 겁니까!”

“최진갑 상무에 대해서는 추가징계를 논의하기 위해 2차 징계위원회를 열겠습니다. 이것으로 징계위원회를 마칩니다.”

서원웅은 벌떡 일어나 물러났다.

그리고 2차 징계위원회에서 최진갑 상무는 뉘우치는 기미가 전혀 없고, 징계처분을 착실히 따르려 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1개월의 추가 감봉 처분이 내려졌다.

감봉처분은 향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 회사에서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음을 자각한 임원 중 두 사람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는 그 즉시 수리되었다.

서원웅이 사장이 되면 이 감봉처분을 명분으로 업무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임원에 대한 재계약이 불발될 터였다.

그렇게 대찬이 ‘엄중경고’로 인한 자숙과 성찰의 마음이 슬슬 사그라질 즈음, 한마음체육대회가 열렸다.

이동수 부사장이 대표로 부임하고 한마음체육대회의 중요성이 한층 부각된 터.

대찬이 제안했던 임원 축구대회도 체육대회 종목에 추가되었다.

옥문영 상무가 기다려왔던 순서였다.

그녀는 녹색 유니폼을 입었다.

대회 운영을 담당한 경영지원부의 직원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옥 상무님, 어쩌죠? 남자 임원분들만 참가하시는 줄 알고 남자 사이즈밖에 없는데…….”

“내가 여자 옷이 들어가게 생겼어요? 105로 줘요. 아니, 110.”

“아, 네…….”

대찬은 차갑게 얼린 생수 뚜껑을 따서 옥문영 상무에게 건넸다.

“상무님, 아주 짓밟아버리십시오.”

“조 차장이 말 안 해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아주 죽여버릴 거야.”

옥문영 상무는 전의를 불태우고 생수를 꿀꺽꿀꺽 마셨다.

물을 마실 때마다 목젖이 꿈틀거렸다.

목을 타고 흐르는 물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녀의 탄탄한 허벅지는 그야말로 가린샤의 재림.

‘와, 멋있다…….’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야수성에 감동했다.

사람들은 가곡리 가린샤의 폭주하는 체력과 미칠 듯한 개인기에 환호했다.

옥문영 상무는 우악스러운 덩치로 비실거리는 남자 임원들을 튕겨내며 압도적인 기량을 뽐냈다.

옥문영 상무는 혼자 3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그날의 완벽한 MVP가 되었다.

옥문영 상무가 소속된 팀을 응원하는 직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가곡리 가린샤, 줄여서 가가.

직원들은 조폭마누라 대신 레이디 가가라는 애칭으로 옥문영 상무를 연호했다.

“레이디 가가! 레이디 가가!”

그 와중에 골프장에서 자신의 학력을 들먹였던 최진갑 상무가 달려들자 그를 확 밀쳤다.

코끼리가 가볍게 코를 휘둘러도 사람이 맞으면 척추가 부러지는 법이다.

최진갑 상무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바닥에 뒹굴 굴렀다.

“으아악!”

최진갑 상무는 꼬리뼈를 붙들며 좌로 우로 굴렀다.

그가 옥문영 상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축구 이따위로 할래!”

“지가 달려들었으면서 뭐라는 거야?”

“야! 옥문영!”

“왜! 최진갑!”

옥문영의 사자후에 최진갑의 위세가 죽었다.

옥문영 상무는 쯧, 혀를 차고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면서 말했다.

“축구도 통밥이 굴러가야 하는 거야.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들면 그렇게 다치지. 산재처리될 거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

옥문영 상무가 개심하면서 전략기획실의 단합이 이뤄졌다.

옥문영 상무와 서원웅은 스타일이 달랐다.

어떤 면에서는 옥문영 상무의 쪽이 전략기획실 업무에 더 어울렸다.

끊임없이 현장과 교류하면서 목표치를 예상하고, 또 적당한 목표를 설정해야만 하는 게 전략기획실 업무였다.

게다가 때로는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맵게 채찍을 갈기며 업무의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옥문영 상무는 달래야 할 땐 잘 달래고, 매질해야 할 때는 혹독하게 했다.

그럴 땐 조폭마누라의 악명이 톡톡히 먹혀 들어갔다.

“구 과장님, 아니 제 말을 잘못 받아들이신 거 같은데요.”

대찬이 현장 담당자와 입씨름을 하고 있으면 옥문영 상무가 후다닥 뛰어와서 전화기를 낚아챘다.

“여보세요. 나 옥문영 상문데요, 아, 가공식품팀이에요? 가공식품팀 구일훈 과장? 하하, 잘 지내죠. 무슨 일인데 왜 이렇게 결론이 안 나?”

“…….”

대찬은 멍한 표정으로 옥문영 상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애초에 우리가 준 KPI가 너무 빡세? 에이, 뭐가 빡세. 거기 형편 많이 좋아졌잖아, 우리 조대찬 차장이 협력업체 무더기로 물어다줘서. 뭐? 그래도 빡세다고?”

옥문영 상무는 잠깐 숨을 고르고 눈을 부릅떴다.

“내가 뻔히 숫자를 아는데 빡세다고 지금 겐세이를 놔? 그쪽이 무능한 건지, 우리가 빡센 건지 한번 잘 생각해봐요. 아니다, 우리 지금 잠깐 볼까? 내가 커피 살게.”

“…….”

“아, 그치. 할 수 있죠? 그래요. 잘 맞춰봅시다. 못하면 나랑 커피 한잔하는 겁니다. 그래요. 그리고 앞으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 차장한테는 툴툴대지 마요. 조 차장 없었으면 그쪽 사람들 여럿 날아갔어. 알아?”

옥문영 상무는 대찬이 20분 동안이나 입씨름한 걸 단 20초 만에 끝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옥 상무님 덕분에 쉽게 해결됐습니다.”

“조 차장은 이러쿵저러쿵 넋두리를 뭘 계속 들어주고 있어. 단호할 땐 확 단호해야지.”

“네, 그러겠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씩 웃어 보이고 이번에는 쩔쩔매는 김산호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서원웅이 전략기획실장으로 있을 때는 수평적이고 권위적이지 않은 분위기에서 업무를 해왔다면, 옥문영 상무는 씩씩한 기백과 현장을 향한 적극적인 압박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남들은 고압적으로 나오는 옥문영 상무를 보고 개새끼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 개새끼는 좋은 개새끼다.

대찬은 옥문영 상무 밑에서 한결 수월하게 업무에 임했다.

그렇게 바쁜 생활이 이어지는 사이에도 각자의 인생에서 챙겨야 할 일은 챙겨야 했다.

허운과 유채경이 결혼했다.

허운의 나이가 어느덧 서른넷이었다.

결혼연령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라지만, 서른넷은 슬슬 결혼을 챙겨야 하는 나이였다.

유채경도 서른을 넘겼으니 결혼하기에 꼭 알맞았다.

허운은 대찬에게 다가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 차장님.”

“왜요, 허 과장님.”

“잠깐 나와봐요.”

허운은 대찬을 사옥 1층의 커피숍으로 데려갔다.

대찬이 커피를 주문하려는데 이미 허운이 자기 돈으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지?”

“뭐야? 맨날 내가 월급 더 많으니까 나보고 사라고 해놓고선.”

“에이, 가끔씩은 내가 사야지.”

대찬은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뭐 부탁할 거 있구나.”

“아이, 뭐 별건 아니고.”

“머뭇거리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 할 일 엄청 많거든요.”

허운은 헤헤 웃으며 대찬을 자리에 앉히고는 말했다.

“나 결혼하잖아.”

“응.”

“네가 사회 좀 봐줘라.”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사회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대본대로만 읽으면 돼. 해줄 거지?”

어차피 허운의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앵무새 노릇 정도야 무리 없이 해줄 수 있다.

게다가 허운과 유채경 모두 대찬의 동기였으니 기꺼이 기쁘게 해줘야 옳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허운이 커피를 사길래 난 또 빚보증 서달라는 줄 알았지?”

“야, 알았어. 앞으로는 넙죽넙죽 커피 사다 바칠게.”

“그래도 예행연습은 한 번 해봐야겠지?”

“응. 조금만 빨리 와주면 돼.”

대찬은 커피를 빨대로 죽 빨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이야, 허운이 결혼이라니, 세월 빠르다.”

허운은 웃으면서 말했다.

“빠르지. 벌써 우리 알고 지낸 지 6년째니까. 이참에 우리가 양복 하나 쌔끈한 놈으로 뽑아줄게.”

“아이고, 뭔 돈이 있다고.”

“야,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 직장인 부부다?”

대찬은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허운도 그를 따랐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호칭은 야, 형에서 조 차장님과 허 과장으로 돌아왔다.

대찬은 퇴근 후 김산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위에서 하도 결혼, 결혼 하니 대찬도 자신의 옆구리를 채워주는 사람이 자꾸 생각났다.

“누나, 요즘 많이 바쁘지?”

“눈코 뜰 새가 없다. 너도 고생 많다, 야.”

둘은 근 한 달간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도 다람쥐 낮잠 자듯 잠깐 만나서 간단히 식사하고 짧은 티타임을 가지는 게 고작이었다.

둘의 업무가 너무 고달픈 까닭이었다.

김산하는 지금껏 외국계 기업의 장점이라며 걸핏하면 대찬을 만나기 위해 휴가를 냈다.

업무가 바쁘지 않을 땐 회사에서 선선히 그러라 했다.

하지만 업무가 몰아칠 땐 가혹했다.

김산하 역시 업무가 한창 바쁜 와중에 휴가를 낼 생각은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만 노동을 제공하는 계약관계였지만, 한국지사가 처음 세워진 후 김산하는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그리고 회사는 김산하의 공을 인정하고 한창 띄워주던 참이었다.

애사심을 발휘할 충분한 여건이 되었다.

대찬도 그걸 알았다.

그렇기에 입술을 한 번 붙였다 떼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누나, 허 과장 알지? 이번에 허 과장 결혼한다고 해서.”

“아, 그래? 그 둘은 무사히 결혼까지 골인했네.”

“응. 이번에 같이 갈까 했는데 시간 내기 좀 어렵겠지?”

김산하는 난처한 듯 말했다.

“어려울 거 같아.”

대찬이 김산하의 상황을 잘 알았기에 김산하도 구차하게 긴 설명을 곁들이지 않았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쉬어줘.”

“응. 너도 이래저래 바쁠 텐데 휴식 꼭 취해. 우리 나이 골병든다.”

“알았어.”

김산하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 달 넘게 하루 4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피로가 쌓이고 쌓였다.

더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피로도 피로지만, 대찬에게 미안한 마음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

대찬 역시 바쁘긴 했지만, 주말에는 김산하를 위해 시간을 비워놓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김산하는 주말에는 생존을 위해 밀린 잠을 보충해야만 했다.

그도 아니면 집에서 잔업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차라리 이직을 해버릴까.’

지금까지 회사에서 쌓은 평판과 커리어를 잃어버릴 걸 감수하더라도 차라리 그러고 싶은 지경이었다.

김산하는 휴대폰 잠금화면의 대찬을 보며 힘겨운 웃음을 지었다.

잠금화면이 오래 지나지 않아 꺼지려고 하자 김산하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 계속 바라봤다.

밤 10시 40분.

그러다 퇴근하기 위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그때 김산하의 핀란드인 보스가 다가왔다.

“산하.”

“아, 아쿠,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산하 퇴근할 때까지 휴게실에서 눈 좀 붙이고 있었어요.”

“예? 댁에 가서 주무시지, 왜 저 때문에…….”

“피곤한 거 아는데, 나랑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김산하는 의문이 들었다.

할 얘기가 있으면 업무시간에 하면 된다.

이렇게 늦은 밤까지 자신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처자식도 있는 양반이 나한테 치근덕대려는 건 아닐 거고.

아쿠는 그런 성품의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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