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94화
스포츠에 보이는 관심의 10분의 1만 일에 쏟았더라면 이동수 부사장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했을 것이다.
“곧 한마음체육대회 돌아오는데, 임원 축구대회를 여는 건 어떨까요?”
“임원 축구대회?”
“예. 지금까지 매년 임원분들은 심심하게 앉아만 계셨잖습니까? 체면 생각하셔서.”
이동수 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재미없었어, 우리들은.”
“그러니 직원들한테 파이팅도 보여주실 겸, 솜씨도 뽐내실 겸 임원 축구대회를 열어서 직원들 사기도 올리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동수 부사장은 슬며시 웃었다.
“그거 좋은데? 소싯적에 안정환 뺨쳤단 말이야, 내가. 얼굴도 실력도 뒤지지 않았는데, 하루는…….”
그 뒤로 이어지는 가치 없는 말을 대찬은 가볍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렇게 임원 축구대회가 결정되었다.
주말의 모임은 늦게까지 지속되지 않았다.
대찬이 일으킨 한바탕 소란 때문에 임원들은 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일단 자리를 파해 남자끼리 으슥한 즐거움을 찾으러 간다는 말도 어렴풋이 들렸다.
그들이 떠나고, 서원웅도 개인 일정으로 자리를 떴다.
이제 대찬과 옥문영 상무만 남았다.
대찬은 옥문영 상무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상무님, 오늘 이래저래 마음 많이 쓰셨습니다. 들어가 편히 쉬십시오.”
“…그래. 조 차장도 오늘 수고했어.”
옥문영 상무에게서 처음 들은 인사치레였다.
대찬은 씩 웃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렇게 등지고 몇 발짝 걸어가는데, 옥문영 상무의 걸걸한 목소리가 대찬을 붙들었다.
“조 차장.”
“네, 상무님.”
옥문영 상무는 잠깐 머뭇거리다 말했다.
“많이 안 피곤하면 술이나 한잔할까?”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대찬이 웃으며 대답하자 옥문영 상무도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둘은 60년 됐다는 허름한 가게에서 술을 마셨다.
안주는 점점 불어가는 잔치국수와 돼지기름에 튀기듯이 구운 지짐이, 그리고 깍두기가 고작이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는 불편했다.
옥문영 상무가 대찬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대찬은 말없이 술을 받고 다시 말없이 술을 건넸다.
옥문영 상무는 말없이 잔을 내밀었고, 대찬은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소주의 화학적인 단맛이 입안에 잠깐 머물다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옥문영 상무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마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대찬을 흘끗 보고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먼저 제안하기는 했지만 이 자리가 어쩐지 쑥스러웠다.
대찬은 쑥스러워하는 옥문영 상무 때문에 불편했다.
‘아, 왜 또 의외로 수줍은 건데. 평소 성격대로 화통하게 하지.’
소개팅 자리에서 내성적인 여인과 마주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나만 물어볼까?”
“여러 개 물어보셔도 됩니다, 상무님.”
옥문영 상무는 피식 웃었다.
“그래. 첫 번째 질문.”
“네.”
“내가 안 밉나?”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거짓 없이 대꾸했다.
“미웠죠.”
“솔직해서 좋군. 그럴 만해. 조 차장 못살게 군 건 내 잘못이니까.”
“네. 궁금했습니다. 대체 저한테 왜 그러셨습니까?”
옥문영 상무는 소주잔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나는 항상 자격지심이 있었어. 조 차장도 봐서 알 거야. 출신이 이렇다보니.”
“상무님께서 자격지심을 가질 이유가 하등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마음을 지니신 걸 이해는 합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부임하는 곳에서 이렇게 심술을 부렸어. 만만하게 굴려먹기 좋은 상사보다는 차라리 엄하고 무서운 상사가 나으니까.”
“당하는 쪽에서는 유쾌하진 않지만, 나름의 자구책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안 하셔도 상무님을 만만하게 보는 부하직원은 없을 텐데요.”
옥문영 상무는 소주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내가 들은 말이 있거든.”
“무슨……?”
“필래마트 전략기획실에 조대찬이라는 녀석이 하나 있다. 고놈 보통내기가 아니다. 상사 잡아먹는 녀석이다. 그놈을 제대로 휘어잡지 않으면 된통 당하고 말 것이다. 벌써 몇이나 당했다.”
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누가 그런 낭설을 퍼뜨린 겁니까?”
“뭐, 낭설은 아니잖나? 조 차장하고 씨름해서 몇몇 나가떨어지긴 했잖아.”
“그건 제가 잡아먹은 게 아닙니다. 저를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제 꾀에 제가 당한 케이스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알아, 이제는 알지. 하지만 그때는 몰랐어.”
대찬은 속에서 부아가 올라 소주를 휙 넘겼다.
그러고는 옥문영 상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굽니까?”
“음?”
“누가 그런 헛소문을 귀띔해준 겁니까?”
“말해도 되나? 취재원을 보호해야 하는데.”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계산하시는 걸 보니 제 상급자인 모양이군요.”
“무당이네.”
대찬은 피식 웃었다.
“내친김에 점괘 하나 더 뽑아볼까요? 장백주 실장이죠, 그 사람.”
“…이번에는 진짜 놀랐는데.”
“하하…….”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망할 놈의 인간 같으니.
아직까지 마수를 뻗치는구나.
대찬은 한숨을 훅 뿜으며 말했다.
“뭐, 됐습니다.”
“장백주 실장하고 무슨 악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어. 그래도 장 실장만 나무랄 건 아니지. 결국 그 사람 말을 믿고 조 차장을 괴롭힌 건 나니까.”
“동기는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내 욕 많이 했지?”
“‘많이’로 퉁칠 정도가 아니죠. 살벌하게 했죠. 상무님도 뒤에서 제 욕 많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옥문영 상무는 흐흐 웃었다.
“나? 나는 안 했는데?”
“아, 앞에서 실컷 하셔서 뒤에서는 안 하셔도 되셨나 봅니다.”
“맞먹기는!”
옥문영 상무는 농담조로 질책하면서 대찬의 빈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대찬은 공손히 받았다.
옥문영 상무는 이제 대찬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 이번에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볼까?”
“네.”
“오늘 왜 그랬지?”
“어떻게든 악감정의 고리를 끊고 싶었습니다.”
“꼭 오늘 같은 방법이 아니어도 괜찮았잖나. 나랑 악감정 끊으려고 몇 명하고의 악감정을 새로 만든 거야?”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정도 진정성은 보여야 상무님께서 마음을 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지만 수지가 안 맞잖나.”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분들은 회사에 큰 가치가 없는 분들입니다.”
일개 차장이 던지기에는 건방진 소리였다.
대찬은 그 건방진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 읊고 있었다.
누가 보면 그가 사장이었다.
옥문영 상무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가치가 없다니?”
“지금 계신 임원분들, 김태준 사장님이 계셨을 땐 적어도 자리에 걸맞은 업무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이동수 부사장님이 대표가 되신 이후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더군요.”
옥문영 상무는 코웃음을 쳤다.
“자네가 그걸 알 만큼 대단한 통찰력을 지녔나?”
“보는 눈 있고 듣는 귀 있습니다. 상무님도 아시겠지만 전략기획실은 모든 부서의 업무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일일이 파악한 결과, 김태준 사장님 시절보다 나아진 부서는 서원웅 전무가 부임한 북부영업본부 딱 한 군데뿐이었습니다.”
“음.”
“그리고 임원에 대한 평가는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아랫사람들이 더 정확히 내립니다.”
옥문영 상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분들을 모시는 대부분의 직원들은 인간성은 물론이고 업무능력도 형편없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
“월드몰을 인수하고 새로운 계열사로 만들 때부터 계셨던 분들이니 다른 계열사에서 어영부영 쫓겨 오신 분들이 대다수고, 기존 월드몰 출신들은 이미 회사를 한 번 말아먹은 장본인들이니 유능한 게 도리어 이상하죠.”
옥문영 상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찬이 말한 다른 계열사에서 어영부영 쫓겨 오신 분들에 옥문영 상무 본인도 포함되었다.
“평가가 혹독하군.”
“차기 대표로 이미 낙점이 된 서원웅 전무는 저보다 더 임원분들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서 전무는 이미 속으로 평가를 끝내놨습니다.”
“…평가를 끝내놓다니?”
대찬은 무거운 말을 가볍게 했다.
“서원웅 전무가 대표가 되면 현직 임원 중 3분의 2는 모두 물갈이될 겁니다. 서 전무의 판단이기도 하고, 그룹 차원의 판단이기도 합니다.”
“…….”
옥문영 상무는 혹시 자신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체면에 묻지 못하니 불감청고소원이었다.
대찬이 그녀의 궁금증을 선제적으로 해결해주었다.
“상무님은 당연히 그 대열에 없습니다.”
“아.”
옥문영 상무는 다행스럽다고 여기는 동시에, 자기의 운명을 저 새파란 차장에게 확인받았다는 것에서 묘한 열패감을 느꼈다.
“아무튼 그 자리에 다른 임원분이 열 사람, 백 사람 있다 하더라도 저는 마찬가지의 행동을 했을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저랑 이렇게 대작도 해주시겠죠.”
“너도 참 괴짜다. 고작 나 하나 어떻게 해보겠다고. 그렇게까지 해서 내 마음을 돌리면 너한테 뭐가 좋은데?”
옥문영 상무가 조 차장 대신 너라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악의 대신 호의가 담겨 있었다.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잔에 술을 따랐다.
“상무님께서 서원웅 전무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실 거란 확신이 있으니까요.”
“단지 그 이유로? 친구를 위해서 그런 트러블과 고생을 감내했다는 건가?”
“들인 공에 비하면 너무 사소한 이유인가요?”
“만약 그것뿐이라면 조 차장은 서 전무의 그저 충실한 번견일 뿐이니까.”
대찬은 씩 웃었다.
“저도 서 전무의 부스러기만 얻어먹을 요량은 아닙니다.”
“그럼?”
“저도 성장할 겁니다. 성장해서.”
“해서?”
“썩은 과일들을 다시 나무에 매달아놓을 겁니다.”
“…썩은 과일을, 뭐?”
대찬은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아닙니다. 그냥 서원웅의 똥개구나, 생각해주십시오.”
옥문영 상무는 대찬을 빤히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 대찬이 따라준 소주를 죽 들이켰다.
옥문영 상무는 더 걸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조 차장이 무슨 생각이든 내가 무슨 상관이겠어.”
그는 물끄러미 대찬을 바라보다가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고는 최종적으로 말했다.
“나야 가방끈이 짧아서 천장까지 못 닿는 신세야. 조 차장이 그렇게 제의해주면 받아들일 수밖에.”
옥문영 상무는 ‘팀 서원웅’의 일원이 되었다.
대찬은 그에게 요구했다.
“상무님, 지금 무너진 전략기획실의 분위기는 오로지 상무님만이 살릴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제 책임도 적지 않으니 저 또한 고민하겠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직원들이 월요병에 신음하는 이른 아침.
옥문영 상무도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
그녀의 등장에 직원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업무에 집중하는 체했다.
옥문영 상무는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러다 자신의 집무실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우뚝 멈췄다.
직원들은 더 긴장했다.
옥문영 상무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걸걸한 목소리가 바닥에 좍 깔렸다.
“다들 잠깐 주목하세요.”
그 목소리에 긴장하지 않는 건 대찬이 유일했다.
일동의 시선이 옥문영 상무의 거구로 향했다.
그러나 옥문영 상무은 평소처럼 노기 띤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걸걸한 와중에도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내가 전략기획실에 부임한 이후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한순간에 붕괴해버렸습니다.”
옥문영 상무가 그렇게 운을 떼자 직원들은 의아했다.
저 양반이 무슨 약을 잘못 먹었나.
옥문영 상무는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녀가 직원들을 향해 푹 고개를 숙였다.
그의 행동에 대찬 역시 놀랐다.
대찬은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그 호의의 대가는 오로지 대찬을 향한 옥문영 상무의 신임이었다.
그런데 옥문영 상무는 한 걸음 더 나가 그 들불 같은 성질을 억누르고 정중히 직원들에게 사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