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91화
김태준 사장이 물러나고 이동수 부사장이 대표로 취임하고 나서도 대찬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 필래제과에서 새로 론칭하는 과자 2종, 빙과 3종 우리 마트에서 프로모션하기로 한 건 미팅 잡아야 하는데, 그쪽에서 여기로 오라고 할까요?”
오다혜가 그렇게 말하자 대찬이 먼저 나섰다.
“어, 내가 갈게요.”
“네? 조 차장님, 아니… 대찬 님이 갈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에요. 이미 마케팅 쪽하고 대충 얘기는 다 된 건이라.”
“금방 끝나겠네요. 그냥 가서 얼굴만 비치고 바로 오겠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대찬은 회의 참석을 빌미로 필래제과 본사를 찾았다.
필래제과는 필래그룹의 모태였다.
서청수 회장의 선친인 창업주의 유언에 따라, 필래제과는 공장이 맨 처음 세워졌던 부지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송파에 있는 필래그룹의 본사 사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대찬은 그곳으로 가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를 하면서 제법 눈치가 좋아 보이는 직원 하나를 눈여겨보았다.
회의가 끝나고 그에게 말을 걸어 옥문영 상무에 대해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자마자 도리어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조 차장님, 혹시 식사하셨어요?”
“아직 식전입니다.”
“먼 길 오셨는데 제가 한 끼 대접해도 괜찮겠습니까.”
바라던 바였다.
“감사합니다. 염치 불고하고 잘 얻어먹겠습니다.”
“가시죠.”
필래제과 직원이 선뜻 호의를 베푼 건 그에게도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3품냉채로 시작하는 가장 저렴한 중식코스 요리로 대찬을 대접했다.
아마 원하는 정보가 그렇게 중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랬다면 5품냉채로 시작했을 테니까.
대찬에게도 5품냉채보다는 3품냉채가 부담이 적어 좋았다.
3품냉채가 지나고 매생이수프를 지나 유산슬쯤 되었을 때, 이런저런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던 필래제과 직원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 차장님.”
“네.”
“서원웅 전무님이 승산이 있을까요?”
대찬은 살짝 웃었다.
속뜻을 알면서도 되물었다.
“승산이라뇨?”
“그, 후계구도에서 말이에요.”
“아.”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해줄 말이 많지 않았다.
후계구도는 전적으로 서청수 회장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걸 어렴풋이 추측할 수는 있을지언정 대찬이 함부로 재단할 일은 아니었다.
대찬이 용케 서청수 회장의 마음을 꿰뚫어봤다 하더라도, 고작 3품냉채에 총수의 내밀한 심리를 흘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밥 얻어먹고 입 싹 닦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저도 내부자는 아니기 때문에 잘은 모릅니다만.”
“에이, 조 차장님 정도면 내부자죠. 서원웅 전무님 최측근 아닙니까?”
“결정은 서 전무님이 아니라 회장님이 하시는걸요. 그래도 최근의 동향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요?”
“사원으로 시작해서 전무까지 쾌속승진한 데다, 이번에 저희 마트 대표를 부사장 직급으로 낮춘 것도 회장님이 다 노리는 포석이 있는 탓 아니겠어요?”
원론적인 얘기에 필래제과 직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밥값은 이 정도면 되었다.
대찬은 이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했다.
“저도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옥문영 상무님, 잘 아시죠?”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자마자 직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과 직원치고 옥 상무 모르는 사람은 없죠.”
“어떤 분이세요?”
대찬 역시 며칠간의 경험으로 옥문영 상무를 대강 파악하고 있었지만, 더 자세히 알기를 원했다.
“그분 별명으로 모든 설명은 끝나죠.”
“별명이 뭡니까?”
“조폭마누라요.”
“아.”
명쾌하다.
지금까지 겪어온 옥문영 상무의 모습 그대로다.
대찬에게 유별나게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필래제과 직원은 말을 이었다.
말이 빨라지는 걸 보니 그도 당한 게 많은 듯했다.
“성별만 여자지, 완전 수사자예요, 수사자. 터프하고, 성질 불같고.”
여기까지는 대찬도 알고 있던 바였다.
직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야쿠자 보스 같은 면모가 있죠. 의리 중요시하고, 은혜를 입으면 확실히 갚고, 원한은 더 확실히 갚고.”
“무서운 분이시군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무슨……?”
“평소에 아주 죽고 못 살던 부하직원이 있었어요. 옥 상무가 참 예뻐했죠.”
“네.”
“근데 언제 한번 옥 상무 뒷담화를 했다나 봐요.”
“아이고, 큰일 났겠네.”
“네, 못 견디고 이직했을 정도니까. 근데 또 아주 원수 같은 상사가 있었는데, 옥 상무 부친상 때 장례식장에서 물심양면 도와준 일이 있었어요.”
“그분하고는 관계가 좋아졌고?”
“지금은 옥 상무 남편분이, 그분하고 바람피우는 거 아닌지 의심할 정도라더군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사람이군요.”
“그렇죠. 상대방 하기 나름이에요.”
성격에 대한 판단은 끝났다.
대찬은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업무능력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그 시절에 고졸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공장 생산직으로 들어가서 상무까지 올라간 사람이에요.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정말 악착같은 분이에요. 일을 그렇게 무식하게 많이 하는 사람이 없고요, 부족한 어학능력 채운다고 부장 달고도 영어학원 새벽반, 주말에는 인터넷강의로 일본어 공부하시는 분이니.”
“대단하긴 하군요.”
“괴팍한 성격만 빼면 뭐 커리어우먼으로서는 충분히 존중할 만한 사람이죠. 그 사람 밑에 들어가는 건 사양이지만요.”
대찬은 후식으로 나온 옥수수빠스로 식사를 마무리하고 직원과 헤어졌다.
그가 말한 두 부류의 직원은 지금의 사무실에도 대입이 가능했다.
옥상무가 예뻐하던 직원은 박홍석 대리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옥상무의 원수 같은 상사는 대찬에 대응되었다.
비록 대찬이 그의 상사는 아니었지만.
‘옥 상무한테 마음을 보여줄 기회가 필요해.’
대찬이 이렇게 마음을 쓰는 건 단순히 사무실의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옥문영 상무에게 관심이 있었다.
이성으로서의 관심은 아니었다.
옥문영 상무가 아무리 밉다지만, 그녀가 입지전적인 영역을 개척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며칠간 지켜보면서 느낀 건, 성질은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지만 능력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건 가방끈 좀 길다고 유세 떠는 먹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만몽한테 전수받은 눈이니 확실하다고.’
옥문영 상무는 악착같고 집요하고 꼼꼼했다.
사장에게 올릴 보고서의 오타검수를 대찬에게 맡긴 것도 순도 백 프로의 심술만은 아니었다.
물론 휴게실을 휴계실로 착각한 건 명백한 그녀의 잘못이지만.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그런 독특하고 희귀한 기질이 ‘팀 서원웅’에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구태여 옥문영 상무와의 관계의 물꼬를 틀 계기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 계기는 생각보다 빨리 주어졌다.
격주로 있는 임원회의가 돌아왔다.
옥문영 상무는 언제나 그랬듯 대찬에게 진행을 맡겼다.
이동수 부사장이 대표가 되고 처음으로 하는 회의였다.
그는 업무보다는 우선 자기 좋은 일부터 했다.
“자, 내가 새 대표가 됐으니 우리 임원끼리 단합 한번 해야지.”
그의 말에 술 좋아하는 이사가 입맛을 다셨다.
“어디 가까운 데 임원 워크숍이라도 갈까요? 오랜만에 뽈도 좀 차고.”
“그러게요. 김태준 사장님 계실 때는 꿈도 못 꿨는데, 풍류를 아시는 우리 이동수 대표님이 취임하셨으니 긴장 좀 풀어도 되겠죠.”
이게 도대체 계모임인지 임원회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저런 양반들 연봉이 다 1억은 기본으로 넘는다니.’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와중에 북부영업본부장 서원웅 전무가 말했다.
“한창 경쟁업체와 줄다리기가 심한 만큼 워크숍은 지양하시죠. 회식이나 한번 하시는 걸로.”
서원웅의 목소리는 연약했지만 말에는 힘이 실렸다.
출신성분이 달랐다.
그러자 풍류 어쩌고 하던 상무는 멋쩍게 웃었다.
“그, 그럴까요, 그럼?”
대찬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서원웅이 대견해 빙긋 웃었다.
그러나 이동수 부사장은 이 논의를 한 번의 회식으로 종결할 의사가 없었다.
“아, 뭐, 워크숍도 좋고 회식도 좋지만, 우리 골프라도 한번 칠까?”
“골프 좋죠.”
누가 스포츠광 아니랄까봐.
이동수 부사장은 술보다는 운동을 선호했다.
서원웅은 신임 대표이사가 희희낙락하며 걸어오는 제안에 딴죽을 걸 정도로 야멸치지는 못했다.
이동수 부사장이 시시덕거리며 옥문영 상무에게 말을 걸었다.
“옥 상무는 골프 좀 치나?”
“…아뇨, 잘…….”
옥문영 상무는 수치스러운 질문을 들은 듯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부정했다.
맞은편에 앉은 최 상무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 대표님! 옥 상무가 골프 배울 시간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공장에서 과자 만드느라 바빴을 텐데.”
“아, 그런가? 이거 내가 생산직의 비애를 간과하고 있었구먼!”
이동수 부사장이 익살스럽게 말하자 임원들이 와르르 웃었다.
옥문영 상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동수 부사장이 주재한 첫 임원회의의 결론은 한없이 가벼웠다.
다다음주 주말 용인의 한 컨트리클럽에서 만나자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런 데 쓸데없는 요령만 특출한 이동수 부사장은 전략기획실에 적당히 회의록의 공란을 채워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가 잘 쓰는 말을 빌리자면 ‘가라로’.
그렇게 회사에는 조금의 보탬도 되지 않은 회의를 해놓은 주제에, 임원들이 둘러앉았던 긴 탁자는 널브러진 서류와 간식 부스러기들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대찬은 전략기획실 직원들과 그것을 치우며 속으로 궁싯거렸다.
‘다음부터는 물 한 병씩만 올려놔야겠어. 간식이 아깝다.’
그러던 어느 날, 업무적으로 만날 일이 없었던 서원웅이 대찬을 옥상으로 불렀다.
“전무님, 부르셨어요?”
“둘만 있는데 그냥 말 편하게 하시죠, 조 차장님.”
대찬은 옥상 난간에 기대며 웃었다.
“왜 불렀어?”
“부탁 좀 하려고.”
“이제 당신 내 직속상사 아니니까 업무적인 건 아닐 테고.”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돼?”
“되지. 왜?”
“나 골프연습 좀 하려고 하는데…….”
하기야 서원웅에게는 골프가 한없이 낯설 것이다.
골프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비즈니스를 가능케 한다.
그렇기에 남을 유들유들하게 구워삶아야 하는 직무의 직원들은 골프는 교양처럼 습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원웅은 골프를 익히기에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지나치게 빨리 승진했다.
껍데기는 급히 자랐지만 내실을 채울 시간이 부족했다.
“골프연습 같이 좀 해달라고?”
“응.”
“에헤이, 맨입으로?”
대찬이 의기양양하게 협상을 시작했지만 서원웅은 도리어 의뭉하게 웃었다.
“네가 그럴 입장이 아닐 텐데?”
“뭐?”
“너도 골프장 같이 가야 돼.”
“죄송하지만 저는 임원이 아닌데요, 전무님.”
서원웅은 웃는 입가를 더 벌렸다.
“이번에 조 차장도 가게 됐는데요.”
“엥, 내가 왜!”
“부사장님이 너도 같이 가는 거래. 아마 곧 연락 갈 거야.”
“그러니까 내가 임원도 아닌데 거기 왜 끼냐고요.”
서원웅은 험험, 헛기침을 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이동수 부사장의 흉내를 냈다.
“거 조대찬이도 말만 차장이지, 거의 임원급 대우해줘야지 않아? 우리 회사 슈퍼스타 아니야, 슈퍼스타. 요번에 골프도 같이 치자고. 옛날에 체육대회에서 야구공 던지는 거 보니 힘은 좋겠더만.”
“임원급 대우를 해줄 거면 돈으로 해달라고요.”
“그래도 임원분들하고 친분 쌓아두면 좋잖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나도 별수 없이 주말에 같이 연습해야겠네.”
“그래. 연습장 레슨비용은 내가 내줄게.”
“레슨까지 받을 거 뭐 있어. 그걸로 소고기나 사먹자.”
대찬의 말에 서원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래도 레슨은 받아야지. 우리 둘 다 초보자들인데.”
“내가 조금 알아.”
“네가……? 어떻게?”
“그냥 알아.”
서원웅은 대찬의 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의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