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190화 (189/556)

난 할 수 있어 190화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옥 상무답지 않은 제안인데. 실험을 한다면 어떻게?”

“저희 부서에서 한번 시도해보죠.”

“전략기획실에서?”

“네.”

옥문영 상무는 대답하면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이 그녀의 얼굴에서 비릿한 미소를 감지한 건 착각이 아니었다.

대찬은 불안해졌다.

옥문영 상무는 김태준 사장에게 말했다.

“조대찬 차장, 그런 분위기에서 업무가 잘될 거라고 했지?”

“네.”

대찬은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옥문영 상무는 다시 김태준 사장을 바라봤다.

“사장님께서 각별하게 생각하시는 조 차장도 좋다고 하니, 한번 실험적으로 적용해보시죠.”

“아니, 내 의견은 안 물어봐?”

“싫으십니까?”

김태준 사장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권위주의 타파, 좋지. 그래도 회사에 최소한의 질서는 잡혀 있어야지. 임원한테도 님님거리는 거, 안 좋아. 초딩도 아니고.”

“어차피 저희 부서에만 적용하면 저만 임원이지 않습니까. 임원한테 님님거리는 건 좀 그렇죠.”

“내 말이.”

‘높으신 분들끼리 잘 통하시네요.’

대찬은 꽁한 얼굴로 먼 산만 바라봤다.

“말 그대로 실험입니다. 시범도 아니고요. 괜찮지 않나요? 돈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입을 다물고 있던 이동수 부사장이 말했다.

“다른 부서는 모르겠지만 전략기획실에는 어울리는 제도겠네요.”

“부사장, 왜요?”

“거 족보가 좀 꼬이지 않았습니까. 조 차장이 입사 6년 차에 차장이고, 허운 과장도 조 차장이랑 동기인데 벌써 과장이고.”

김태준 사장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송희근 과장은 한참인데 아직 차장도 못 달았으니. 차라리 계급장 떼고 님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네.”

옥문영 상무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렇다니까요. 사장님, 한번 해보시죠. 나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오케이 하면 이 시각부로 저 양반은 조대찬 님이 되는 건가?”

“그러겠죠.”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보고 싱글벙글 웃었다.

‘아, 하지 맙시다, 사장님.’

대찬은 속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초능력이 없는 김태준 사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텔레파시를 들었어도 받아들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김태준 사장도 듣는 귀가 있어서 옥문영 상무와 대찬의 갈등을 알고 있을 것이다.

김태준 사장은 옥문영 상무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대찬을 더 어려운 곳으로 몰았다.

김태준 사장이 대찬에게 굳이 자비심을 발휘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이는 서원웅이었다.

대찬은 들판에 내놓아 강하게 키우기를 원했다.

김태준 사장은 차라리 옥문영 상무의 손을 들어줘서 대찬을 단련시켰다.

“옥 상무도 말했듯이 이건 실험이니까, 직급체계는 그대로 두고 호칭만 그렇게 바꿔봅시다.”

“네, 그렇게 하시죠.”

“좋아. 여기 사장 노릇도 다 끝나가는 마당에 작은 경영혁신이라도 해보지.”

김태준 사장은 즉시 옥문영 상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옥문영 상무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머지않아 밝혀졌다.

“저… 산호 님… 이거 확인 좀 해줘요…….”

유채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김산호에게 말했다.

김산호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채경 님…….”

대찬 역시 적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허운 님, 매입부에 전화해서 이번 분기 KPI(주요성과지표) 체크 좀 해주세요.”

“네, 대찬 님. 근데 성 안 붙이고 하기로 했는데 왜 운 님이라고 안 불러주세요?”

“…로맨스 남주 이름 같아서 왠지 그렇게 부르긴 싫거든요.”

이런 와중에 2명의 직원은 옥문영 상무가 제안한 방침을 문제없이 소화해냈다.

하나는 홍은주 주임이었다.

그녀는 일말의 어색함도 느끼지 않고 딱딱한 표정으로 편하게 불렀다.

이런 사소한 제도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강인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박홍석 대리였다.

그는 오히려 이 제도를 즐겼다.

악랄하게.

“희근 님, 이거 했어요?”

“…했어요.”

“태윤 님, 이거 빨리 빨리 좀 갖다줘요. 아, 진짜.”

“…….”

“허운 님! 이게 뭐예요. 제가 말씀드린 거 이거 아닌데.”

“아니, 아닌 게 아니고…….”

박홍석 대리는 물 만난 고기처럼 사무실을 헤집고 다녔다.

그는 제도의 뒤에 숨어 직원들에게 함부로 말을 던졌다.

은근히 말을 놓기도 하고, 말투에 언짢은 감정을 잔뜩 실었다.

대찬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도리어 정도가 더 심했다.

“대찬 님! 메일 보내드렸는데, 왜 여태 안 읽어보셨어요. ASAP로 처리해야 되는데!”

“나 외근 나가있었는데요? 급한 거면 전화를 하셨어야죠.”

“아, 제가 대찬 님이 외근 나가있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대찬 님이.”

시비 거는 듯한 말투에 대찬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봤자 저 인간과 동격이 될 뿐이니까.

“메신저에 부재중 떠있었잖아요. 메신저 확인도 안 합니까? 그렇게 허술하게 일하실 겁니까?”

“아니, 지금 저한테 훈계하시는 거예요?”

박홍석 대리의 언성이 높아졌다.

대찬이 고분고분 꼬리를 내려줄 리 만무했다.

“훈계요? 그냥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요.”

“아니, 말만 들어보면 지금 훈계하신 거잖아요? 아직도 대찬 님이 제 상사인 줄 아세요? 직급은 그냥 월급 더 받는 사람인 거고, 연차도 제가 그쪽보다 더 높고.”

“…그쪽?”

대찬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왜요, 쌍욕이라도 들은 표정이시네요. 뭐, 욕은 아니잖아요?”

“아, 직장 동료를 그쪽이라고 불러도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끼시는군요. 욕은 아니니까 나도 그쪽을 그쪽이라고 부르죠.”

“뭐, 그러시든지요.”

이런 판국이니 자유롭고 비권위적인 분위기에서 업무효율을 높이기는커녕 감정만 악화되는 판국이었다.

참다 못한 송희근 과장이 옥문영 상무를 찾아갔다.

“상무님,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뭐가 아니에요?”

“박홍석 대리는 지금…….”

“박홍석 대리라뇨? 박홍석 님이라고 해야지.”

“하, 예. 박홍석 님이 지금 하는 건 전횡입니다.”

“전횡이요? 뭐가 전횡인데요?”

송희근 과장은 스트레스 때문에 더 얇아진 머리카락을 쓸며 말했다.

“저도 권위적인 사무실 싫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도 뒤에 숨어서 비열하게 남을 조롱하는 건 오히려 퇴행입니다.”

“어떻게 조롱당하셨는데요?”

“이거 했어요, 저거 했어요, 시비조로 물어오고, 은근히 반말을 하고 가끔 언성까지 높인다니까요.”

그걸 들은 옥문영 상무가 비웃었다.

“들어보니까 뭐가 문제인가 싶네요.”

“이게 어떻게 문제가 아닙니까.”

“이거 했어요, 물어보는 게 뭐가 시비조예요? 그건 아랫사람이 송 과장한테 격의 없이 물어보니까 괜히 속이 뒤틀려서 그런 거 아니에요?”

“상무님! 저 그렇게 좀스럽지 않습니다.”

송희근 과장은 울듯 한 얼굴로 항변했다.

옥문영 상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은근히 반말을 했다고요? 앞에 ‘은근히’가 붙는 걸 보니 아예 말을 놓은 것 같지는 않으니 됐고, 언성 높인 건 뭐가 문젭니까? 송 과장은 지금까지 부하직원한테 언성 한번 안 높여봤어요?”

“제가 박홍석 대리, 아니… 박홍석 님 부하직원은 아니잖습니까?”

“부하직원한테는 언성 높여도 돼요? 지금까지 송 과장은 너무 권위적으로 회사생활 해오신 거 같네요. 그럼 좀 당해보고 반성하는 게 정상 아닌가?”

“사, 상무님…….”

“지금까지 송 과장 말을 들어보니 내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뭡니까?”

“그냥 송 과장이 꼰대라는 거.”

송희근 과장은 거의 거품을 물 지경이 되어 옥문영 상무의 방에서 나왔다.

그는 뻐근한 뒷목을 매만지며 넋 나간 얼굴을 했다.

송희근 과장은 대찬과 단둘이 휴게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대찬 님.”

“아, 과장님! 사무실 밖에서는 그렇게 안 불러주시면 안 돼요? 노이로제 걸릴 거 같아요.”

대찬은 박홍석 대리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체했지만 그도 혈압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

송희근 과장은 피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요, 조 차장님.”

“예, 과장님.”

“내가 꼰대인 거예요?”

‘뭐, 그런 속성이 아주 없진 않지만…….’

대찬은 쓸데없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대답했다.

“송 과장님이 그럴 평가를 들을 만한 분은 아니죠.”

“그치? 맞죠?”

“그럼요. 왜, 누가 과장님 보고 꼰대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옥 상무가 그럽디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옥 상무님이 저한테 억하심정 있으신 건 잘 알겠는데, 이건 진짜 아니죠.”

“참 나. 이래놓고 뭐라고 말 나오면 조 차장이 하란 대로 했는데 왜 자기한테 추궁하냐고 그럴 거 아닙니까?”

“기 싸움이야 할 수 있지만, 이건 오히려 회사를 좀먹는 일이에요.”

“뭐 뾰족한 방법 없겠어요?”

대찬은 심호흡하며 대답했다.

“결국 옥 상무님이 마음을 돌려야 해결돼요. 그게 아니라면 당장 이 님님 타령이 멎어도 팀워크가 계속 삐거덕거릴 테니까요.”

“그게 어디 쉽습니까. 차장님하고 옥 상무 관계는 이미 요단강 건넌 거 아니에요?”

송희근 과장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대찬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제가 저지른 일이니 결자해지하겠습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대찬이 옥문영 상무 앞에서 바짝 엎드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미봉책에 불과했다.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옥문영이라는 사람을 조금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김태준 사장이 퇴임했다.

그는 서청수 회장의 부름을 받아 필래그룹의 지주회사인 필래지주의 경영개선실장 자리에 앉았다.

직급은 여전히 사장이었다.

그즈음 김태준 사장과 함께 왕윤수 필래제과 고문 역시 필래지주로 돌아왔다.

김태준 사장이 떠나면서 이동수 부사장이 필래마트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동수 부사장은 김태준 사장처럼 사장으로 진급하지는 못했다.

이동수가 부사장까지 올라간 것도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

순전히 대찬이 입안하고, 김태준 사장이 허락한 작전의 덕분이었다.

이동수 부사장도 본인의 한계를 잘 알았기에, 필래마트의 대표이사 자리에 만족했다.

또한 이건 서원웅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이동수 부사장은 서원웅이 필래마트의 대표이사가 될 때까지 잠시 자리를 덥혀놓는 역할에 불과했다.

서원웅의 직급은 현재 전무.

사장이 되려면 부사장을 거쳐야 했다.

오너의 자식임을 감안해도 미칠 듯한 승진속도를 보여왔다.

그런데 또다시 짧은 시간 내에 부사장을 거쳐 사장까지 올라가는 건, 아무리 서청수 회장이라고 해도 부담이 따랐다.

그렇기에 대표가 된 이동수 부사장을 계속 부사장으로 두어 서원웅이 쉽게 올라설 수 있도록 배려했다.

“가는 마당에 말 길게 할 거 뭐 있어요. 열심히들 하십시오. 내 밑에서 수고들 많았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간단한 이임사를 남기고 물러났다.

그다음으로 연단에 올라온 이동수 부사장은 취임사랍시고 신이 나서 한참을 떠들었다.

‘오랜만의 스포트라이트에 들뜨신 건 이해하겠지만.’

김태준과 이동수의 그릇 차이가 보인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김태준 사장은 물러나면서 자신과 친분이 있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엔 대찬도 포함되었다.

“내 밑에서 구르느라 고생 많았어.”

“별말씀을요. 영광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영혼을 좀 담아서 해봐. 이걸로 우리 인연 끝 아니야. 두고 두고 내 얼굴 볼 거라고.”

“당연하죠. 오늘을 마지막으로 사장님을 못 뵙게 된다면 제 출세는 딱 여기까지인 건데요. 어떻게든 사장님 다시 모실 기회만 엿보겠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원웅 잘 코치해. 어엿한 재목으로 크면 자네 볼에다 뽀뽀까지 해줄 수 있어.”

“입술은 안 됩니까?”

“미친놈.”

선을 넘는 농담까지 스스럼없이 건넬 정도로 둘의 사이는 인간적으로도 가까워져 있었다.

‘두고 두고 내 얼굴 볼 거라고.’

대찬 역시 김태준 사장의 말에 동의했다.

서원웅이 적장자인 서승학과 맞서려면 김태준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김태준도 이미 서원웅에게 배팅했으니 대찬과의 인연은 길게 이어질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