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89화
송희근 과장이 삐딱한 시선으로 대찬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어지간히도 각별한 모양이지? 저 안에서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티타임치고는 너무 기네요. 일손 모자라서 박 대리님한테 빨리 설명해드려야 하는데.”
김산호는 두툼한 자료를 탁탁 소리 나게 정리하며 말을 보탰다.
이런 일에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을 두지 않는 한태윤 과장도 지금의 상황이 영 못마땅한 듯했다.
장장 2시간 10분에 걸친 면담이었다.
마라톤 신기록 보유자인 케냐의 엘리우드 킵초게가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해서 땀을 닦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비적비적 걸어 나오는 박홍석 대리를 보고 송희근 과장이 톡 쏘아붙였다.
“박 대리, 은근히 수다맨 스타일인가봐?”
“예? 제가요? 아뇨. 어디 가면 과묵하단 소리 듣는데요.”
“아, 그럼 옥 상무님이 수다우먼 스타일인가? 어떻게 2시간씩이나 콕 박혀 있었나 몰라.”
송희근 과장이 옥문영 상무를 걸고넘어지자 일순 박홍석 대리의 표정이 싹 굳었다.
“과장님, 그게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뭐, 뭐야? 내가 뭐?”
“지금 옥 상무님을 욕보이시는 겁니까?”
박홍석 대리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마치 광신도를 보는 듯했다.
신성모독이다!
자신의 신을 모욕하는 이교도를 향한 광신도의 목소리였다.
“내, 내가 언제 또 욕보였다 그래? 허, 참!”
“임원한테 수다우먼 스타일이라고 하는 게 욕보이는 게 아닙니까?”
그 기백에 송희근 과장이 주춤했다.
지켜보던 대찬은 속으로 탄식했다.
‘허, 장 대리 말이 진짜인가보네.’
아부에 능한 사람은 여우같이 처세하고 능구렁이같이 말한다.
그런데 박홍석 대리는 옥문영 상무만을 바라봤다.
다른 직원들한테는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신박한걸. 무식한 아첨꾼이라니.’
저런 성격이기 때문에 옥문영 상무가 더 아끼는 모양이었다.
박 대리는 송희근 과장에게 눈총을 쏜 뒤, 자리에 앉아서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두드렸다.
송희근 과장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상황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한태윤 과장이 나섰다.
“박홍석 대리님.”
“네?”
“잠깐 저랑 얘기 좀 할까요?”
박홍석 대리는 한태윤 과장에게도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그냥 여기서 얘기하시죠.”
“그럼 그러죠. 행동거지 똑바로 하세요. 분란 일으키지 말고.”
“…뭐라고요?”
“잘못 들으신 거 아니니까 되묻지 마세요. 지금 박 대리 하나 때문에 분위기가 이게 뭡니까?”
박홍석 대리는 픽 웃었다.
“이게 지금 저 때문입니까? 송 과장님이 먼저 옥 상무님 험담하셨잖아요.”
“가벼운 농담일 뿐입니다.”
“아, 그래요? 나도 그냥 농담했어요. 됐습니까?”
“박 대리!”
박홍석 대리는 작정한 듯 날선 말을 쏟아냈다.
“농담한 김에 조금만 더 하죠. 저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다고요? 원래 분위기 개판 아니었어요?”
“말 좀 가려서 하시죠.”
“아, 농담이라니까요. 근데 봐봐요. 여기가 대학 동아리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낄낄대고 깔깔대고, 겨우 입사 6년 차가 차장이랍시고 상무님 깔아뭉개면서 왕 노릇 하고. 이게 뭡니까?”
대찬은 가소롭다는 듯 웃기만 할 뿐 대응하지 않았다.
한태윤 과장의 눈에서 분노가 끓었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나도 더 이상 가만 안 있습니다.”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건데?”
그건 박홍석 대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옥문영 상무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한태윤 과장도 넘치려는 분노를 일단 억눌렀다.
“상무님.”
“듣자듣자하니까 당신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옥문영 상무는 한태윤 과장 정도는 한 손에 바스러뜨릴 듯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녀의 걸걸한 목소리가 직원들을 짓눌렀다.
“나를 우습게 알아도 유분수지, 박 대리가 나 위해서 몇 마디 좀 했다고 언성을 높여?”
“상무님,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 그렇지 않아? 조대찬 밑에서 다들 기름장어처럼 뺀질거리는 거나 배워서는!”
“…….”
“상사에 대한 예의, 존중이 없어!”
옥문영 상무는 사자후를 발했다.
좁지 않은 사무실이 약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쩌렁쩌렁 울렸다.
옥문영 상무는 상무라는 직함을 떼도 위압감이 엄청났다.
결국 빌미를 제공했던 송희근 과장이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상무님, 죄송합니다. 다 제 탓입니다. 앞으로는 단어선택에 유의하겠습니다.”
“송희근 과장.”
“네, 네엡, 상무님.”
“당신 말이야, 나이, 연차로 치면 여기 최선임 아니야?”
“…….”
“나서서 분위기 단속해도 모자랄 판에, 조대찬 등에 업고 깐족거리기나 하는 게 당신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이야?”
“죄, 죄송합니다…….”
대찬은 자기 이름이 계속 들먹여지는 와중에도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옥문영 상무는 끝끝내 대찬을 링 위로 올렸다.
지금이 대찬을 물 먹일 건수라고 생각했다.
“조 차장.”
“네, 상무님.”
“지금 이 난장판은 다 조 차장 때문이야. 일말의 책임도 못 느끼나?”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대꾸했다.
“왜 저 때문이에요? 박홍석 대리가 상무님 등에 업고 꼬장 피운 건데요.”
“조 차장! 진짜 사생결단 내고 싶어?”
“아뇨.”
“애초에 조 차장이 사무실 분위기를 무질서하게 어질러놓으니까 이 사달이 나지 않았냐고.”
“무질서한 게 아니라 불필요한 권위가 없는 것뿐이었습니다.”
“뭐야?”
“저희, 상무님 오시기 전에 이 분위기로 저희 할 몫 다 해냈습니다.”
“그래서, 잘못이 전혀 없다?”
대찬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혀 없습니다.”
“…좋아. 그렇게 동아리 같은 분위기가 좋다면 그렇게 만들어주지.”
옥문영 상무는 이를 악물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옥문영 상무가 돌아간 후에도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송희근 과장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며 푹 한숨을 쉬었다.
답답했는지 담배도 안 피우는 양반이 사무실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대찬은 그게 마음이 쓰여 그의 꽁무니를 쫓았다.
송희근 과장은 옥상 난간을 양손으로 턱 짚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허공에 거푸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얇아져가는 그의 모발이 바람에 나풀나풀 날렸다.
대찬이 그에게 다가갔다.
“과장님.”
“아, 조 차장님.”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와 나란히 섰다.
“괜히 저 때문에 욕보셨습니다.”
“아니… 그게 왜 조 차장님 탓이야. 박홍석 그 또라이랑 옥 상무 작품이지.”
“제가 옥 상무 들이받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요.”
송희근 과장은 몸을 돌려 난간에 기댔다.
그는 웃으며 대찬의 가슴을 주먹으로 살짝 건드렸다.
“이제 와서 착한 척하지 마시죠, 차장님. 이래놓고 수틀리면 또 그럴 거잖아.”
“아니라곤 못하겠네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송희근 과장이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말이야, 아까 옥 상무가 한 말.”
“동아리 같은 분위기가 좋으면 그렇게 만들어주겠다는 거요?”
“응. 그거 그냥 하는 소리겠지?”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모를까, 옥 상무님이라 좀 불안한데요.”
“그치, 나도 그래. 아무리 옥 상무라지만 동아리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겁니까?”
“단합과 화합을 위해 대학생들처럼 MT라도 가자는 소리 아닐까요?”
“하이고, 차라리 한태윤이 사실은 마누라한테 애기처럼 앵앵댄다는 가설이 더 그럴듯하네.”
‘아, 그건 가설이 아닌데요.’
대찬은 비밀누설의 욕구를 억누르며 말했다.
“옥 상무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걱정은 마세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요?”
“아뇨. 지레 걱정해봤자 답 안 나오잖아요. 일단 무슨 일이든 터지고 나서 생각해요, 우리.”
대찬의 말에 송희근 과장은 실소를 머금었다.
“인생 참 쉽게 사셔, 암튼.”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일갈이 그저 화풀이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어긋났다.
옥문영 상무는 대찬을 불렀다.
“조 차장.”
“네, 상무님.”
“임원회의 조 차장이 맡아서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전략기획실은 사업을 거시적으로 다루기도 했지만, 이런 정기회의들을 챙기는 세심한 업무도 주어졌다.
보통 이런 회의 준비는 대리급에서 맡았지만, 이 정도야 기꺼이 해줄 수 있었다.
눈치가 좋은 오다혜가 자진해서 나섰다.
“다과랑 자리 정리는 제가 할게요.”
“저도 오 대리님이랑 같이 하겠습니다.”
홍은주 주임도 오다혜와 같이 일어났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오 대리, 홍 주임.”
대찬이 회의진행을 맡기로 했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임원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임기 막바지에 이른 김태준 사장이 웃으면서 들어왔다.
이래저래 요즘 회사생활이 즐겁지 않은 대찬은 살짝 굳은 얼굴로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어, 좋은 아침. 조 차장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얼굴이 썩었어?”
“아, 아닙니다. 하하.”
“거 애인이랑 너무 재미 좋은 거 아니야? 만몽거사가 그러는데 자네 물고추라며? 마티즈로 200 밟으면 차가 퍼져요.”
그 말에 대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사장님! 그런 낭설을 믿으시면 어떡합니까? 성희롱이세요.”
“이젠 말년 사장이라고 성희롱까지 운운해?”
“그, 그게 아니라…….”
“활력 좀 찾자고.”
“아무튼 아닙니다. 요새 바빠서 잘 만나지도 못해요. 오히려 조금 소원해졌는데요.”
“연애사업이 시들기도 하는 것이지, 어떻게 창창하기만 하겠나.”
김태준 사장은 웃으면서 대찬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상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김태준 사장의 뒤로 이동수 부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차례차례 착석했다.
옥문영 상무도 비실거리는 남자들 사이에 그 육중한 덩치를 끼워 넣었다.
북부영업본부장으로 발령을 받은 서원웅도 대찬에게 알은체를 했다.
“아이고, 우리 조 차장님.”
“전무님.”
서원웅은 옥문영 상무를 흘끗 보고 속닥거렸다.
“너 또 한판했다며?”
“여러 판 했어요. 저라고 뭐 좋아서 했겠어요.”
“가만 보면 은근 즐기는 거 같아, 하극상.”
“그 하극상, 전무님한테 보여드릴까요?”
“여태 많이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서원웅은 웃으면서 자리를 찾아갔다.
‘쟤가 점점 더…….’
대찬은 얼떨떨한 웃음을 지었다.
서원웅 전무를 마지막으로 임원들이 모두 착석했다.
“임원 여러분께서 모두 참석하셨으니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대찬은 능숙하게 회의를 진행했다.
익숙한 사업보고가 이어지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순서였다.
말년병장이나 다름없는 김태준 사장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하실 말씀 있으신 분 계십니까?”
그 말에 응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년이 가까운 임원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지 한참이었다.
사우나에서 뜨끈하게 허리를 지질 궁리를 하는 양아치들도 얼른 이 자리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김태준 사장이 그녀를 보고 고갯짓을 했다.
“어, 옥 상무.”
대찬의 시선도 자연히 옥문영 상무에게 쏠렸다.
옥문영 상무는 대찬을 흘끔 보더니 다시 시선을 김태준 사장에게 고정했다.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게 요즘 트렌드 아닙니까?”
“음? 근데?”
“듣자하니 어느 기업에서 권위주의 타파를 위해 직급을 없애고 호칭을 모두 ‘님’으로 통일했다더군요.”
“님?”
“네. 이를 테면 제가 사장님께 사장님이 아니라 김태준 님 혹은 태준 님이라고 하는 거죠.”
그 말에 임원들은 풋, 코웃음을 쳤다.
김태준 사장도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해괴한 제도를 도입하자고 하는 건가?”
“저도 그다지 급진적인 사람은 아니라 그렇게까지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이동수 부사장이 팔짱을 끼고 낄낄거렸다.
“하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장 군기반장이던 옥 상무가 그런 제도를 도입하자고 할 리가 없지.”
“하지만 실험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옥문영 상무는 자길 보고 낄낄 웃는 이동수 부사장을 째려봤다.
그러자 헤벌쭉하던 입술이 합 다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