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88화
“여기 봐, 여기! 휴게시간이라잖아!”
“…네, 휴게시간.”
“참 나, 고졸 무시하더니 얘도 머리가 텅텅 비었었네. 뭐가 틀린지 몰라?”
“고졸 무시한 적 없고요. 뭐가 틀린지는 모르겠네요.”
“휴게시간, 휴게가 아니고 휴계잖아, 휴계!”
대찬은 눈을 깜빡거리며 옥문영 상무를 올려다봤다.
“상무님, 죄송한데 휴게가 맞습니다.”
“…뭐, 뭐?”
대찬은 손가락으로 사무실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큼지막한 고딕체로, 휴게실.
“…….”
옥문영 상무는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었다.
대찬은 그녀에게 필요 이상의 민망함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혹시 다른 오탈자가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니라면 이쯤 하시죠.”
“너, 너, 지금 웃었냐?”
“평상시에 항상 이 얼굴입니다. 지금 이 표정이 웃는 걸로 보이시면 저는 조증 환자입니다.”
“우, 웃었잖아! 너 지금 내가 고졸이라 이런 것도 제대로 모른다고 웃었잖아!”
“안 웃었고요. 고졸이라 그런 게 아니고 상무님이 그냥 모르시는 겁니다. 자꾸 고졸, 고졸 들먹여서 민망한데요, 애초에 고졸인 홍 주임은 맞게 썼습니다.”
“…….”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오겠습니다.”
피차 더 얼굴 맞대고 있어 봤자 불쾌하기만 했다.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송희근 과장, 허운, 김산호, 유채경, 오다혜가 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덜컥, 문 여는 소리가 들리니 그들은 동시에 어깨를 움츠리며 놀랐다.
대찬은 실소를 머금었다.
“미어캣 가족이에요? 뭘 그렇게 염탐해요. 상황종료니까 그만 들어가서 일들 보세요.”
아무렇지 않은 체했지만, 대찬은 옥문영 상무와의 대립에 감정소모가 심했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 받을 일이 지천에 널렸다.
부서장인 옥문영 상무까지 대찬의 목을 조르니 곱절로 피로했다.
이른바 ‘휴게사건’ 이후로 전략기획실의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서원웅이 실장으로 있을 적, 하하호호 화기애애하던 호시절은 끝났다.
대찬 역시 이런 분위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옥문영 상무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붙이기도 했다.
“상무님, 저희랑 점심 같이 드시겠습니까?”
“싫어요. 알아서 먹어요.”
“알겠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대개의 사람이 그렇듯 아량이 넓지 않았다.
대찬도 별 기대를 걸지 않았기에 거절당하자마자 물러났다.
대찬은 옥문영 상무를 제외한 전략기획실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했다.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앞으로 고달프겠어.”
“옥 상무 때문에요?”
허운이 묻자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독불장군이잖아. 우리가 고분고분 숙이고 들어가면 조금 편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어렵게 된 거 같은데?”
송희근 과장은 그렇게 말하며 대찬을 곁눈질했다.
대찬은 민망한 듯 웃었다.
“죄송해요, 과장님.”
“아, 아니, 우리 조 차장님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
허운이 송희근 과장의 역성을 들었다.
“과장님 말씀이 맞죠, 뭘. 그놈의 성질!”
“송 과장님한텐 죄송해도 형한테는 안 죄송해. 도대체 누구 편이야?”
대찬이 쏘아붙이자 허운도 지지 않았다.
“누구 편, 누구 편이 어디 있어? 다 같은 필래 직원끼리. 이젠 파벌싸움까지 하시려고요, 조대찬 차장님?”
“꿀밤 한 대 시원하게 먹이면 소원이 없겠다.”
“야! 나도 이제 과장이야! 대접 좀 해달라고.”
대찬은 허운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도 이제 차장이거든요? 대접 좀 해주시죠, 허운 과장님?”
“…뭐 이미 하고 있는데요.”
한태윤 과장은 둘의 옥신각신 승강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나머지 인력충원은 언제 되는지 소식 없습니까?”
“인사팀에 물어봤는데 조만간이라고만 말하고 더 안 알려주던데.”
송희근 과장의 말에 김산호가 반응했다.
“빨리 좀 왔으면 좋겠네요. 지금 사무실 인력구조는 너무 기형적이에요.”
“차장 하나에 과장 셋 모시기 싫다고 시위하는 거야?”
송희근 과장에게 허가 찔린 김산호는 손사래 쳤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하하…….”
“우리도 얼른 누가 들어왔으면 좋겠네. 일손이 모자라, 일손이. 허 과장이 데이터 서치하고 앉아있으니 이거야, 원.”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운도 못마땅한 듯 툴툴거렸다.
“차라리 옥 상무가 오지 말고 밑에 대리나 하나 오지.”
“내 말이. 벌써부터 서 전무 보고 싶네.”
“그러게요.”
그들은 한마음으로 서원웅의 복귀를 간절히 바랐다.
그게 안 된다면 옥문영 상무의 폭거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도록 유능한 대리가 부임하기를 바랐다.
그들의 바람은 머지않아 이뤄졌다.
이뤄지긴 이뤄졌는데 반만 이뤄졌다.
그들은 유능한 대리를 원했는데, 일단 대리가 부임하기는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전략기획실에 발령받은 박홍석 대리입니다.”
박홍석 대리는 외모가 멀끔했다.
적당히 마른 몸매에 깔끔하게 앞머리를 올렸다.
‘관상은 좋은데.’
대찬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건 가짜 관상이라고 하던 만몽의 말을 떠올렸다.
말과 행동을 봐야 그 사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송희근 과장은 그저 인력충원이 됐다는 사실만으로 희희낙락이었다.
“그래, 박 대리는 어느 부서에 있었어?”
“상품기획부에 있었습니다.”
“그래? 도진석 상무님 계실 때 우리 부서랑 아웅다웅 심했던 것도 알겠네.”
박홍석 대리는 머쓱하게 웃었다.
“예, 잘 알죠. 주임 때였는데, 분위기 한번 살벌했죠.”
“대리 몇 년 차야?”
“올해 3년 찹니다.”
“연차가 꽤 되네. 그럼 우리 공채 아니겠네? 월드몰 인수하기 전이니까.”
박홍석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보 왔습니다.”
“그래? 어디서?”
송희근 과장이 묻고 박홍석 대리가 대답하려는 찰나, 옥문영 상무가 방에서 나왔다.
“박홍석이, 왔어?”
“아, 상무님!”
박홍석 대리는 옥문영 상무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아무리 상무가 불렀기로서니 과장이 질문을 했는데 그를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박홍석 대리는 옥문영 상무와 구면인 듯했다.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옥문영 상무는 스스럼없이 박홍석 대리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평소 직원들을 냉대하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옥문영 상무는 어깨에 손을 걸친 채로 말했다.
“박홍석이는 내가 필래제과 전략실에 있을 때 신입으로 들어왔던 놈이야.”
“…아.”
그 말에 직원들은 김이 팍 새버렸다.
인력충원이 돼서 짐을 좀 덜겠다 싶던 참이다.
그런데 어쩐지 불길하다.
필래제과 출신의 박홍석 대리가 지금 부임한 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옥문영 상무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전략기획실 직원들의 뇌리에 스치는 생각은 똑같았다.
‘옥 상무 라인이군.’
이런 상황에 대리 된 지 3년이고, 입사한 지는 7년 되었다.
연차로만 치면 같은 대리인 김산호, 오다혜는 물론이고 대찬보다도 오래됐다.
아무래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여러모로 친분이 있는 상품기획부의 장 대리를 불러 커피를 마셨다.
“조 차장님, 늦게나마 차장 진급 축하드립니다. 속도가 KTX 쌈 싸드시네요.”
“친구 따라 강남 간 거라 떳떳하지 않아요. 민망합니다.”
대찬에게 인간적인 호감이 있는 장 대리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조 차장님 히스토리를 다 아는데 쓸데없는 겸손을 부리시네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참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그냥 즐기시면 돼요, 칭찬을.”
둘은 마주보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장 대리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말했다.
“무용담은 잘 들었어요.”
“무용담이라뇨?”
“옥 상무랑 붙었다면서요. 어떻게 들이박을 생각을 했어요? 어우, 외모는 장난 아니시던데.”
“말도 마요. 성격도 장난 아니시거든요.”
장 대리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조 차장님이 더 대단해 보인다고요. 요즘 가끔 전략실 가보면 분위기가 말이 아니던데요? 서원웅 전무님 계실 땐 어린이집처럼 화기애애했는데.”
“어린이집 같다는 건 칭찬이죠?”
장 대리는 쾌활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이번에 박홍석 대리도 그쪽으로 갔잖아요. 볼만하겠다, 진짜.”
“볼만하겠다고요? 사실은 장 대리님 뵙자고 한 게 그거 때문이었거든요.”
“아, 박 대리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시려고요?”
대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옥 상무님이랑 면식이 있는 거 같던데.”
“면식 정도가 아니죠. 필래제과에서는 박 대리 별명이 양아들이었대요.”
“옥 상무의?”
“네. 저야 뭐 옥 상무님은 잘 모르지만, 같이 일해서 박홍석이는 잘 알죠. 박 대리 보면 양아들 소리 나온 게 괜히 나온 건 아니겠다 싶어요.”
대찬은 장 대리 쪽으로 상반신을 살짝 기울였다.
“왜요? 박 대리가 어떻길래요?”
“조심하세요. 신념 없이 상사 꽁무니에만 붙는 인간이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저한테도 서 전무 후광이 있으니 아주 막나가진 못할 텐데요.”
장 대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뭐가 복잡해요?”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지만 장 대리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사람한텐 복잡해요. 직관적인 사람이라고요. 상무가 차장보다 높으니까 상무한테 붙어야지. 그걸로 생각 끝이에요.”
“세상 편하게 사는 양반이시네.”
“어떻게 보면 조 차장님의 극단에 있는 스타일이겠죠. 박 대리 계산은 벌써 끝났어요. 조 차장님이 계속 옥 상무 들이받으면 박 대리도 조 차장님 들이받을걸요.”
“상품기획부에서도 그랬어요?”
장 대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품기획부 있을 땐 우리 부장님 충신이었어요.”
“네.”
“조 차장님도 전략실 계실 때 도진석 상무랑 드잡이하는 걸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렇게 합리적인 분은 아니에요.”
대찬은 부정하지 못했다.
“도 상무도 오버하는 면이 있긴 했지만, 상품기획부장님도 문제가 없었다고 보긴 힘들죠.”
“네, 도 상무한테도 그러는 분이 우리한텐 어땠겠어요.”
“충분히 짐작됩니다.”
“그래서 저도 참다 못해 항명도 하고, 화해하자고 만든 술자리에서 얼굴도 붉히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절 보는 부장님 시선이 곱지 않았어요.”
대찬은 그 뒤의 내용은 유추해냈다.
“박 대리가 부장님 대신해서 장 대리님을 물어뜯었군요.”
“장난 아니에요. 내가 1년 선배인데도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더만요. 그러면서 부장한테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진짜 사람이 그러면 안 되거든.”
“이런.”
“부장님이 실실 웃으면서, 너도 아랫놈한테 당해보니까 기분이 어떠냐는데 진짜 꼭지가 돌아서.”
장 대리는 그때 생각에 가벼운 진저리를 쳤다.
대찬은 쯧, 혀를 찼다.
“경영진에서는 상품기획부장님 임원으로 승진시킬 생각이 없는 것 같던데. 해바라기 노릇을 하려면 해 뜨는 곳을 봐야지, 지는 해에다 대고 손바닥을 비비나.”
“말씀드렸잖아요. 완전 1차원이라니까.”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위로했다.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조 차장님이 마음고생하게 된 걸요, 뭐.”
“어쩌겠습니까. 감내해야지.”
대찬은 장 대리와 헤어지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위로는 옥문영 상무, 아래로는 박홍석 대리.
골치 아프게 되었다.
장 대리가 말한 박홍석 대리의 이야기를 퍼트릴 생각은 없었다.
옥문영 상무를 제외한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오롯이 대찬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몇 마디 입만 뻥긋하면 박홍석 대리를 왕따로 전락시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
주변인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덜컥 저질러버리는 것도 문제거니와, 그게 사실이라 해도 박홍석 대리를 무참히 짓밟아봤자 대찬이 얻을 건 없었다.
스스로 격을 낮추는 멍청한 짓이다.
박홍석 대리는 옥문영 상무의 방에 들어가서 2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대찬은 그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제 나오려나.’
그건 대찬만의 생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