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87화
옥문영 상무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서원웅에게 말했다.
“서 전무님, 그만 북부영업본부로 가보시죠. 무운을 빕니다.”
“아, 예……. 옥 상무님도요.”
북부영업본부가 같은 사옥을 쓰기 때문에 유난 떨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서원웅은 환담이라도 나누면서 여유 있게 자리를 옮기려던 차였다.
그런데 옥문영 상무는 그를 급히 내쫓았다.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
서원웅은 직원들의 어색한 환송인사를 받으며 어색하게 떠났다.
‘참 나, 역시 서원웅만 한 실장이 없구만.’
대찬에게 옥문영 상무의 첫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상사이니 어쩌겠는가.
받들어 모시는 수밖에.
대찬은 제대로 자리 청소도 못하고 옥문영 상무의 지시를 따랐다.
브리핑을 받는 옥문영 상무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최근 2년간 업무자료에 데이터는 많은데, 조 차장 인사이트는 별로 안 들어있네?”
“네. 최대한 일목요연하게 알려드리려고 제 개인적인 판단은 제외했습니다.”
“나랑 일하는 첫날부터 요령 피우는 거예요?”
“예?”
대찬은 황당했다.
옥문영 상무는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지금 공장 출신이라고 얕잡아보는 거 같은데.”
“아뇨, 상무님. 그럴 리가요.”
“그럼 뭐야, 이 무성의는?”
은근슬쩍 놓는 반말이 대찬은 거슬렸다.
아무리 상사라 해도 초면에는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
하지만 대찬은 내색하진 않았다.
“말씀드렸듯이 최대한 간략하게 보고드리려고 제 주관은 배제했고요.”
“그래도 인사이트가 들어야지, 인사이트가.”
‘저놈의 인사이트는 어디서 배워와서는.’
대찬은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저 역시 전략기획실에 오늘 복귀했습니다. 세부적인 업무에 대한 주관을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한테 설명하겠다고 한 거예요, 지금?”
“저한테 지시하신 건 상무님입니다.”
정당한 설명은 옥문영 상무의 귀에 마이동풍으로 흘러나갔다.
“아, 됐어. 저기 한태윤 과장 있죠. 한 과장한테 다시 준비하라고 하세요.”
“저, 한태윤 과장은 오늘 외근…….”
옥문영 상무는 대찬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지 않았다.
“오후 5시까지 완성하세요.”
“한태윤 과장은 외근입니다, 상무님.”
“그냥 좀 알았다고 하지.”
“안 되는 걸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그렇게 꽉 막혀서 어떻게 회사생활 하려고 그래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상무님.”
“한 과장을 불러들이든지, 어떻게 하든지 해야지. 그럼 실장이 혼자 알아서 업무 파악할까요?”
독불장군이었다.
이쯤 되니 대찬도 고분고분한 태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서원웅 전무님이 직접 인수인계해 주신다는 거 상무님이 거절했고요. 제가 충분히 자료를 드리고 성심성의껏 브리핑해 드렸는데, 제 견해가 들어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야, 조 차장.”
“아마 제 견해가 들어있었으면 브리핑에 왜 쓸데없는 본인 의견 넣었냐고 하셨겠죠.”
“너, 지금……!”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말을 싹둑 잘랐다.
“그런데 거기에 회사일로 밖에 나가있는 한태윤 과장을 불러다가 다시 브리핑하라니, 이게 지금 맞는 지시라고 생각하십니까?”
“맞고 안 맞고는 내가 판단해!”
“상식선에서는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고 또 그러셔야 하지만, 이건 상식의 경계를 벗어난 지시입니다.”
“야! 명령불복종으로 징계위원회 회부되고 싶어!”
대찬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온다면 대찬도 칼을 빼드는 수밖에 없었다.
“사규에는 명령불복종에 대한 징계가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상무님이야말로 부당업무지시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싶으십니까?”
“뭐……? 부당업무지시……?”
“지위 또는 권한을 남용하여 지시하는 경우, 현저히 불합리한 사유로 업무를 지시하는 경우 모두 사규에서 정한 부당업무지시에 해당합니다.”
옥문영 상무의 눈이 뒤집혔다.
그녀가 거구를 일으켜 세웠다.
대찬 역시 결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옥문영 상무는 여자임에도 대찬과 비등했다.
“너 진짜 신세 망치고 싶어서 이러냐?”
“아뇨. 그러고 싶진 않은데요.”
“어린 나이에 차장 달아서 눈에 뵈는 게 없지? 네까짓 게 산전수전 다 겪은 나랑 게임이 될 거 같아?”
“어린 나이에 차장 달아서 더 무거운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얼굴 붉힐 각오하고 간언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상무님하고 게임할 생각 없고요.”
옥문영 상무는 희번득 뚠 눈으로 대찬을 노려봤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의 눈을 고리눈이라고 곧잘 표현한다.
저 옥문영 상무의 눈 역시 고리눈이라는 표현을 들을 만했다.
‘어이구, 오줌 지리겠네.’
대찬은 기세에 살짝 눌렸다.
하지만 지금 찌그러지면 영원히 찌그러지는 수밖에 없다.
대찬이 일부러라도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주임이나 사원쯤이었다면 적당히 숙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대찬은 전략기획실에서 옥문영 상무를 제하고는 제일 직급이 높았다.
여기서 숙이면 그 밑의 직원들 역시 줄줄이 고달파질 것이다.
“하실 말씀 더 없으시면 나가보겠습니다.”
“오늘은 처음이라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부터 또 그딴 식으로 고개 쳐들면 재미없을 줄 알아요, 조대찬 차장.”
“이미 충분히 재미없었습니다. 저도 처음 상무님 모시는 자리니 더 말씀 얹지 않겠습니다.”
“진짜 끝까지……!”
“나가보겠습니다.”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옥문영 상무의 앞을 떠났다.
옥문영 상무는 씩씩거리며 대찬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집무실에서 나와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집무실의 유리창은 얇았다.
옥문영 상무와 대찬 사이에 오간 고성을 완전히 막아줄 정도로 방음이 잘되지 않았다.
직원들은 그걸 듣고도 애써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대찬은 목이 칼칼해져 휴게실에서 냉수를 꺼내 마셨다.
그때 허운이 잽싸게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쩌자고 그렇게 뻗댔어!”
“뻗대기는. 내가 뭘 어쨌다고?”
“저 덩치 보고도 빽빽 소리 한번 잘 지르더라.”
“응. 위로는 빽빽 소리 지르고, 아래로는 질질 지리고.”
“농담할 때가 아니야. 딱 봐도 엄청 세게 생겼는데.”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청 세더라.”
“그러니까 왜 그랬어!”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하는데 그럼 어떡해.”
“대충 뭉개고 넘어가지.”
“그럼 다음에 또 그래. 틀린 건 틀리다고 해줘야지.”
허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참 너다.”
그때 홍은주 주임이 휴게실로 들어오더니 대찬의 앞에 음료수 한 캔을 놓았다.
“이게 웬 거예요?”
“잘하셨어요, 차장님.”
“허 과장은 나보고 왜 그랬냐고 하던데요.”
“저희는 불만이 있어도 상무님한테 못 들이박잖아요. 차장님이 대신 그래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감사하긴요. 잘 마실게요, 은주 씨.”
그걸 보고 허운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홍은주 씨, 나는 없어요?”
“직접 뽑아 드세요. 아님 상무님 한번 들이박고 오시든지요.”
홍은주 주임은 허운에게는 찬바람이 쌩 불었다.
허운이 툴툴거렸다.
“조 차장도 참 조 차장이고, 홍 주임도 참 홍 주임이다.”
회사생활이 전처럼 쉽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전략기획실장이 서원웅에서 옥문영 상무로 바뀐 것, 딱 하나 때문이었다.
옥문영 상무의 지시에 대찬이 대놓고 어깃장을 놓은 이후 전략기획실의 팀워크는 삐거덕거렸다.
옥문영 상무는 집무실로 들어가다가 대찬에게 서류 뭉치를 툭 던졌다.
자리에 앉아있던 대찬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게 다 뭡니까?”
“사장님께 올릴 이번 분기 보고서야.”
“네.”
“사장님이 직접 보시는 거니까 오탈자 없나 꼼꼼히 다시 따져봐.”
“상무님, 제가 오탈자 점검 마쳤습니다.”
홍은주 주임이 빠끔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옥문영 상무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중요한 거니까 조 차장이 다시 검토해.”
“상무님, 우리 부서가 업무 융통성이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업무의 경계가 존재합니다.”
대찬이 입을 떼자마자 옥문영 상무는 벌써 질리는 얼굴을 했다.
“조 차장은 ‘네.’라는 한국말 몰라? 그냥 ‘네.’라고 해, 네! 네! 네! 이러쿵저러쿵 각주 달지 말고!”
“이 업무는 제가 담당할 업무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잘나고 귀하신 차장님은 못 배워먹은 고졸 주임이나 할 잡일은 못한다는 뜻인가, 지금?”
다시 분위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런 기류를 읽는 데는 누구보다 뛰어난 송희근 과장은 험험, 헛기침을 하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허운도 슬그머니 담배를 피운다는 명분으로 자리를 떴다.
부창부수, 유채경도 나갔다.
대찬의 얼굴에도 미소가 싹 가셨다.
“곡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뭘 곡해했지?”
“오탈자 점검, 중요하죠. 잡일 아닙니다. 실무입니다. 실무는 실무자가 해야죠. 저는 중간관리자입니다. 중간관리자한테는 중간관리자에게 할당된 업무가 따로 있습니다.”
“중간관리자면 실무자가 처리한 업무를 점검해야 하는 거 아닌가? 홍 주임이 오탈자 점검한 걸 또 점검해야지.”
“회사에서는 임원과 중간관리자를 묶어서 관리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럼 상무님은 관리자시니까 중간관리자가 하는 일을 점검하셔야겠군요. 그럼 홍 주임이 오탈자 점검한 걸 또 제가 점검한 걸 또 점검하셔야겠네요?”
“말장난하지 마!”
“말장난은 누가 시작했습니까!”
옥문영 상무가 데시벨을 높이자 대찬의 목소리도 따라갔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가까스로 견디고 있던 김산호, 오다혜도 살금살금 사무실을 나갔다.
“야! 조대찬!”
“호칭은 제대로 하시죠, 상무님. 함부로 이름 부르지 마십시오. 저보다 직급이 높으실 뿐이지, 신분이 높으신 게 아닙니다.”
“너 진짜……!”
“드릴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더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십시오.”
옥문영 상무는 당장이라도 따귀를 때릴 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엉? 누가 맨날 오탈자 점검하래? 사장님한테 올릴 거니까 한번 보라는 거잖아! 그렇게도 고졸 주임이 하는 일을 하기가 싫냐?”
옥문영 상무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홍은주 주임에게 불똥을 튀겼다.
“야, 홍 주임, 너는 조대찬이 이렇게 학력 차별하는데 화도 안 나냐?”
“…….”
냉철한 홍은주 주임은 이 판에 끼어들지 않는 게 최선임을 알고 침묵했다.
대찬이 맞받아쳤다.
“자꾸 고졸, 고졸 하시는데 부하직원 학력이 어떻건 저는 상관 안 합니다. 홍은주 주임은 제 몫 잘 해내는 직원입니다.”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시겠다?”
“어련히 잘했을 걸로 믿습니다. 홍 주임을 못 믿어서 저한테 다시 점검하라고 하시는 상무님이 오히려 학력 차별하시는 거 아닙니까?”
“너 지금 나 고졸인 거 비꼬는 거냐?”
“아뇨, 전혀요. 상무님 학력에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씩씩거렸다.
할 말이 궁했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이대로 찌그러져버리면 영영 이 버릇없는 젊은 차장한테 두고두고 당해버린다.
“너, 홍 주임이 어련히 잘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지?”
“호언장담 안 했습니다. 믿는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오탈자 있으면 어떡할래? 책임질 수 있어?”
“네, 책임지죠.”
“좋아.”
오탈자를 검수하지 못한 책임을 지면 뭘 어떻게 지겠는가.
고작 그걸로 감봉을 하겠나, 정직을 시키겠나.
해봐야 옥문영 상무의 위세만 좀 살고 말 것이다.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겁박에 동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홍은주 주임은 이런 일에 있어 무서울 정도로 꼼꼼하다.
대찬은 흘끗 홍은주 주임 쪽을 바라봤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태평한 저 얼음공주 얼굴을 봐. 오탈자가 있을 리가 없지.’
대찬은 애초에 홍은주 주임의 실수를 상정하지 않았다.
옥문영 상무는 거침없이 보고서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걸 보고 대찬은 살짝 불안해졌다.
‘뭐야, 미리 오타 찾아놓고 나한테 꼬장 부린 건가?’
옥문영 상무는 보고서의 중간쯤을 펼쳐 대찬에게 보였다.
“자! 이것 봐! 휴게시간의 증가로 인해 전반적으로 능률이 상승… 이 부분 보라고.”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네, 봤는데요.”
“이제는 얼굴에 철판 깔기로 작정한 거냐?”
대찬은 도리어 당황했다.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 띄어쓰기가 잘못됐나? 증가로, 전반적으로, 로가 반복돼서? 맞춤법에 어긋난 건 아닌데. 잘못된 게 없는데.’
옥문영 상무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문장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