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86화
“아니, 그건 아니고요…….”
“뭐,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직원들이 알아서 판단하겠죠.”
“그래서 누굴 추천하셨습니까?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
“그럼요. 부점장도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표성재 부점장의 눈이 커졌다.
“예? 누굽니까?”
“표성재라고 하는 사람인데.”
“에, 에에? 저요?”
“뭘 그렇게 놀라요? 원래 부점장 자리에 있는 사람이 후임 점장으로 가장 유력하지 않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만…….”
표성재 부점장은 자신이 대찬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찬이 후임 점장 운운할 때도 자신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제가 처음 수유점 왔을 때의 부점장이라면 결사반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의 부점장이라면, 괜찮잖아요. 훌륭한데요.”
“점장님…….”
“그렇게 감동받은 표정 지을 거 없어요. 당연한 수순이니까.”
“감사합니다, 점장님. 점장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 명성이랄 게 뭐 있다고요. 누가 될 것도 없습니다. 부점장 명성에나 누가 안 되도록 열심히 하세요. 잘하실 거예요, 지금의 부점장이라면.”
“감사합니다, 점장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하다고 해주니까 제가 더 감사하네요.”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대찬은 수유점을 떠났다.
허운과 김산호도 대찬을 따라 본사로 발령을 받았다.
대찬은 송별회라든지, 이임식이라든지 하는 거창한 의식을 원하지 않았다.
자발적인 행사라면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럴 여지는 적었다.
점장인 대찬을 제외하고 수유점에서 가장 높은 표성재 부점장은 대찬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러니 떠나는 대찬을 위해 직원들에게 무리한 노력을 요구할 소지가 컸다.
특히 눈치가 둔한 편인 표성재 부점장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대찬은 불편한 잔칫상을 받느니, 편하게 빈속으로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떠나는 날까지 함구하고 있었다.
“부점장, 내일부터 부점장이 수유점 점장입니다. 내일 공고 나올 거예요.”
“예에? 미리 알려주셨어야죠. 어떻게 예의도 안 차리고 그냥 보내드립니까.”
“제가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수유점 한번 들를 테니 술이나 한잔 사주세요.”
“그래도…….”
“잘해주세요. 본사에 가서도 수유점 예의 주시할 겁니다.”
표성재 부점장은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점장, 아니 차장님…….”
대찬은 각 파트를 돌며 직원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는 것으로 수유점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했다.
입점엄체 직원들에게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특히 맹윤주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또 뵐게요. 혹시 새 점장이 못살게 굴면 나한테 이르세요.”
“네. 저희 할아버지가 또 말썽 피워도 차장님께 이를게요.”
“…그건 손녀가 알아서 하시고요.”
대찬은 관리자 직원들이 굳이 매장 입구까지 바래다준다는 걸 극구 만류하고 허운, 김산호만 거느린 채 본사로 향했다.
김산호는 두 팔을 쫙 뻗으며 웃었다.
“이야! 드디어 지점 생활 청산이구나.”
“뭘 그렇게 좋아해? 업무에 치일 일만 남았는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요.”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졸지에 수유점 직원들을 저승으로 보내버리네.”
“지점 일은 아무래도 체질에 안 맞았다고요. 그리고 본사에 다혜 있잖아요.”
김산호의 말에 허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유채경 못 봐서 두드러기 났다니까.”
“참 나, 둘 다 본사 가서 연애질할 생각부터 하고 있네. 서원웅 실장님한테 일러바칠 거야.”
허운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르든지 말든지. 실장님보다 차장님이 백배 무섭걸랑요?”
“그게 지금 무서워하는 말투야?”
“좋은 날 제발 꼬치꼬치 따지지 좀 맙시다. 조 차장님, 그거 병이에요, 병.”
“이 회사는 어떻게 된 게 기강이 무너져 있어, 기강이.”
“필래그룹 군기 빡센 걸로 유명한데 그게 무슨 말씀이래요? 잘 생각해보세요. 조 차장님 부하들만 기강이 무너져 있으니 책임은 차장님한테 있는 거죠.”
“아, 기강 한번 제대로 잡아볼까?”
허운은 아양을 떨며 대찬의 팔을 붙들었다.
“아잉, 왜 또 이러실까.”
“꺼져! 징그러워.”
필래마트 본사는 본래의 일산점에서 송파의 필래그룹 사옥으로 이전했다.
이는 서청수 회장이 필래마트를 자신의 아픈 손가락으로 삼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대찬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수유점에 근무하게 되면서 일산의 자취방은 정리한 지 오래였다.
다시 집을 구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대찬은 오랜만에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필래그룹 사옥으로 향했다.
사옥 앞에서 그가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허운, 김산호와 마주쳤다.
대찬과 허운, 김산호는 오랜만에 전략기획실 안으로 들어왔다.
김산호는 들어오자마자 팔을 좍 벌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음, 역시 이 냄새야. 디퓨저에서 나는 우디 플로럴 머스크 향. 이제야 전략기획실 돌아온 게 실감나네.”
“우리 김 대리 돌아올 줄 알고 디퓨저 안 바꾸고 있었지.”
서원웅이 웃으면서 말하자 김산호가 그에게 안겼다.
“역시 우리 실장님은 스윗하시다니까. 독사 같은 조대찬 차장님 아래에서 너무 힘들었어요.”
“어이구, 그래…….”
서원웅은 피식 웃으면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김산호를 째려보면서 툴툴거렸다.
“저거 오자마자 여우짓 하는 것 봐라.”
“조 차장, 잘 왔어.”
서원웅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자 대찬도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실장님.”
“처음 온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앉아. 커피나 한잔하면서 숨이나 돌려.”
서원웅은 대찬, 허운, 김산호와 마주앉았다.
그사이에 잠깐 자리를 비웠던 전략기획실 직원들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한태윤 과장, 송희근 과장, 그리고 대리가 된 유채경과 홍은주 주임이었다.
모두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송희근 과장은 대찬을 보자마자 짝, 손뼉을 쳤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모두들 잘 지내셨어요?”
“그럼, 그럼, 잘 지냈지! 조대찬이도 잘 지냈어?”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한태윤 과장은 대찬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보이곤 송희근 과장에게 퉁을 놨다.
“과장님, 지금은 조대찬 차장님입니다. 말씀 높이셔야죠.”
“아, 그, 그렇지, 참? 아이구, 직급은 차장인데 워낙 우리 조 차장님이 애기 피부여서 깜빡하고 있었네. 생긴 걸로는 신입사원이니까.”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오래 한솥밥 먹은 식구끼리 직급이 뭐가 중요해요. 송 과장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대찬의 호의를 한태윤 과장이 싹둑 잘라버렸다.
“안 됩니다. 연공서열보다 직급이 우선입니다. 차장님도 실장님과 동기신데 꼬박꼬박 말 높이시잖습니까.”
“아, 그건 그런데 영 불편해서요.”
“그 불편함을 감수하시는 것도 차장님의 소임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한 과장님 원칙론은 여전하시네요.”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다른 건 다 변해도 한태윤 과장의 저런 꼬장꼬장한 성품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찬은 주위를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김영우 차장님하고 황경원 대리님은 안 보이십니다?”
“아, 김 차장님은 상품기획부, 황 대리님은 남부영업본부로 발령받았어.”
대찬은 그렇게 된 이유를 짐작했다.
다른 이들은 그대로 남고 김영우 차장과 황경원 대리만 콕 집어 다른 곳으로 발령받은 건, 서원웅을 위한 김태준 사장의 배려일 것이다.
게다가 보낸 곳이 하필 계속 갈등을 빚던 상품기획부, 지방근무가 불가피한 남부영업본부라니.
김태준 사장의 제법 고약한 심보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럼 두 분 빼고는 이대로 가는 건가요?”
“사실 이번에 전략기획실에서 빠지는 사람이 1명 더 있어.”
“누군데요?”
대찬은 내심 한태윤 과장만 아니기를 바랐다.
그는 혼자서 두세 사람의 몫은 충분히 해내니까.
그런데 서원웅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나.”
“…네?”
“이번에 전무로 승진했거든. 보직도 북부영업본부장으로 바뀌었어.”
대찬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서원웅이 전략기획실에서 이탈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장님 뜻이야. 전략기획실은 현장과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결국 현장에 있는 건 아니라고. 북부영업본부를 총괄하면서 현장에서 굴러보라 하시더라고.”
이해 못할 조치는 아니었다.
김태준 사장은 곧 필래마트를 떠나고 이동수 부사장이 뒤를 잇는다.
그다음은 서원웅의 차례.
그의 차례가 오기 전에 다양한 경험을 시켜야겠다고 김태준 사장은 생각했을 것이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실장님까지 결원이 셋인데 인력이 충원돼야 하지 않나요?”
“응. 이번에 신임 전략기획실장님을 비롯해서 인원이 더 들어올 거야.”
“누가 와도 실장님보다는 안 좋겠네요.”
“에이, 가는 마당에 공치사는.”
“맘대로 농땡이도 못 칠 거 아닙니까?”
서원웅은 장난스럽게 대찬의 팔을 한 대 쳤다.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신임 전략기획실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을 비롯한 일동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를 본 모두는 같은 생각이었다.
‘와, 장군님이다.’
거구의 여인이었다.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책상에 둘러앉은 직원들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를 보고 서원웅이 일어나 맞이했다.
서원웅이 그와 나란히 섰는데, 덩치가 절반에 겨우 미쳤다.
“어서 오세요, 실장님.”
“반가워요.”
서원웅은 그를 직원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옥문영 상무님이십니다. 필래제과에 고졸 생산직으로 입사하셔서 27년간 근속하시고, 임원까지 승진하신 입지전적인 분입니다.”
‘대단한 양반이네.’
옥문영 상무의 소개를 듣고 대찬은 감탄했다.
같은 임원이지만 서원웅하고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회장의 아들, 명문대 출신, 핵심부서에서의 경력.
서원웅은 지름길만 걸어 단기간에 임원이 되었다.
옥문영 상무는 그 반대.
가시밭길만 걸었을 것이다.
그녀는 학력도 낮고, 배경도 없었다.
그렇다면 오로지 개인의 능력으로만 여기까지 돌파해왔을 터.
더군다나 여자의 몸으로 거친 현장에서 발군으로 꼽혔다.
들인 공과 노력이야 오죽할까.
물론 저 무인의 골격을 봤을 때, 타고난 신체적 재능의 기여도 무시 못할 정도일 테지만.
대찬은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건 비단 대찬만의 감상이 아니라 직원들 모두의 감상이었다.
서원웅이 웃으면서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여러모로 저보다 훨씬 나은 분이니까 믿고 잘 따라주세요.”
“네, 실장님.”
옥문영 상무는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여태 필래제과에서 근무했지만, 마지막 3년은 전략기획 담당했습니다. 무식한 고졸 공장 출신이라고 설렁설렁 일할 생각이면 진즉 관두는 게 좋을 겁니다.”
“…네.”
목소리는 동굴에서 말하는 것처럼 낮게 쫙 깔렸다.
직원들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궁싯거렸다.
‘초면부터 훈계야.’
서원웅은 옥문영 상무에게 친절히 인수인계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예?”
“북부영업본부 일이 그렇게 헐렁하진 않을 텐데요? 서 전무님도 가서 인수인계 받으셔야죠.”
“아, 예, 그렇긴 합니다만…….”
옥문영 상무는 딱딱한 눈빛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조대찬 차장.”
“예, 상무님.”
“그쪽이 사무실에서 제일 높죠?”
“연차는 낮지만 직급으로는 예, 그렇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오후까지 업무 서머리 해서 나한테 브리핑하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대찬 대신 한태윤 과장이 나섰다.
“상무님, 조 차장님도 오늘 본사에 복귀했는데 서머리를…….”
그러자 대찬이 한태윤 과장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아, 오후까지요. 알겠습니다.”
한태윤 과장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하지만 대찬은 한태윤 과장의 손을 잠깐 잡았다 놨다.
마음은 아니까 그만하면 됐다는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