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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85화 (184/556)

난 할 수 있어 185화

지금만큼은 점장과 부하직원의 관계가 아니라 예비매형과 예비처남의 관계였다.

대찬은 황급히 무마했다.

“바, 바람은 무슨…….”

“그럼 뭔데요?”

“그런 사정이 있어. 비밀이야.”

“뭐야, 바람이네!”

“아니래도!”

대찬의 극구 부인해도 김산호는 툴툴거렸다.

그도 대찬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모처럼 다가온 건수를 그냥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암튼 순진한 척은 혼자 다 하시면서 여기저기 페로몬 뿌리고 다닌다니까.”

“야!”

김산호는 킥킥 웃으며 대찬을 스쳐지나갔다.

대찬은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맹윤주에게 급히 해명했다.

“저 친구 말 신경 쓰지 마세요.”

“아뇨, 뭐…….”

맹윤주는 겸연쩍게 웃었다.

“암튼 문제 해결해줘서 고마워요. 친할아버님이라 내놓고 말하기 어렵지만, 사실 영감님 때문에 이래저래 속 썩었거든요.”

“그럴 만해요. 우리 할아버지지만 사람들 안하무인으로 깔아뭉개는 건 두둔할 생각 없으니까요. 다시 사과드릴게요.”

맹윤주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뇨. 맹윤주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히히.”

맹윤주는 헤벌쭉 웃음을 걸쳤다.

순수하고 시원한 웃음에 대찬도 마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대찬은 진공청소기 할배 때문에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맹윤주를 포섭했다.

축산코너 입점업체 사장에게 맹윤주를 시식코너 판촉사원으로 고용하는 건을 제안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사장도 납득했다.

진공청소기 할배 하나 때문에 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그였다.

어차피 그만둔 직원의 공백을 메워야 했다.

공백을 메우면서 문제도 해결할 방법을 제안받았으니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필래마트 점장은 그의 갑이었다.

구구절절 설명 없이 지시에 가까운 요청만 해도 그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장은 즉석에서 맹윤주를 채용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맹윤주의 사정을 생각해서 제법 높은 시급을 책정했다.

물론 그 높은 시급에는 골칫덩이 고객을 퇴치해달라는 강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손녀 채용은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진공청소기 맹 영감은 손녀를 보고는 한달음에 도망갔으며, 며칠을 기웃거렸지만 계속 버티고 있는 손녀를 보고 발길을 뚝 끊었다.

축산파트 직원들은 앓던 이가 빠진 듯 후련했다.

고기 써는 직원도 오랜만에 남의 눈치 안 보고 본업에 충실했다.

“속이 다 시원하네! 점장님 덕분에 일할 맛 납니다.”

“이게 어떻게 제 덕이에요, 맹윤주 씨 덕분이지.”

대찬은 맹윤주에게 공을 돌렸다.

“그래도 점장님이 안 나서주셨으면 말짱 꽝이었죠.”

“수고를 알아주시니까 고맙네요.”

“말로만 때울 생각 없어요.”

“네? 말로만 때우셔도 되는데.”

그때 축산파트의 다른 직원들이 다가왔다.

“시간 나실 때 저희 사장님이 제대로 술 한번 산다고 하셨거든요!”

그 말에 대찬은 화들짝 놀랐다.

“향응 먹여서 제 모가지 날리시려고요?”

“생각해보니 그, 그렇네요…….”

“제발 말로만 때워주세요. 우리 오래오래 같이 일해야죠.”

직원들은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그만큼 대찬에 대한 고마움이 컸다.

말인즉슨, 진공청소기 할배의 민폐가 그만큼 심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대찬에게 감사를 표하는 건 비단 오래 앓아왔던 문제가 해결된 까닭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찬의 마음 자체에도 감사했다.

그간 입점업체 직원들은 애로사항이 생겨도 필래마트 본사의 우산 아래 들어가지 못했다.

손님과 본사 사이에 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본사는 입점업체를 아랫것으로 여겼지, 일터를 공유하는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구태여 품을 들여가며 자신들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대찬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축산파트에 직원들을 파견하는 입점업체의 사장은 알겠다는데도 여러 번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서러운 사정과 대찬의 따뜻한 마음씀씀이를 구구절절 읊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점장님, 고맙습니다. 점장님 같은 분들 덕에 내가 그래도 이 더러운 판에서 돈 벌어먹고 삽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 줌짜리 작은 회사 사장이지만, 나중에 제 힘이 필요하실 때 앞뒤 안 재고 돕겠습니다. 진심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법이다.

그렇기에 대찬은 사장의 호언장담을 덜컥 신용하진 않았다.

다만, 작은 인연이나마 우호적인 인맥으로 삼는 데 만족했다.

맹윤주는 할아버지를 마트에서 몰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언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저항하는 할아버지를 기어코 마트까지 끌고 왔다.

“사과해요, 빨리!”

“나, 남사스럽게 사과는…….”

진공청소기 할배의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당당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좋은 구경거리에 직원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대찬도 슬그머니 고기 써는 직원의 옆에 섰다.

직원은 대찬을 보고 큭큭 웃었다.

“기술이 좋아졌나봐요. 무소음 진공청소기가 개발됐습니다.”

“맹윤주 씨, 생각보다도 적극적이네요. 영감님을 모시고 올지는 몰랐는데.”

대찬은 씩 미소를 머금었다.

맹윤주는 강하게 버티는 할아버지의 고개를 한사코 숙이게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넓은 의미로 따지자면 조손 관계에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결국 그 뻣뻣하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미, 미안하게 됐어…….”

진공청소기 할배는 시식 코너의 직원들에게 사과했다.

직원들은 애증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진공청소기 할배를 응시하다가 그를 일으켰다.

“그만하면 됐어요.”

“에휴, 참… 미안하게 됐어… 미안하게…….”

맹윤주도 할아버지 옆에 서서 푹 고개를 숙였다.

“일한다고 할아버지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드린 제 잘못도 커요. 사과드릴게요.”

“아이, 이제 됐다니까. 할아버지도 윤주 씨도 그만해. 더하면 우리가 되레 민망해.”

그제야 할아버지와 맹윤주의 고개가 바로 섰다.

직원들과 맹윤주, 할아버지는 서로를 어색하게 응시하다가 풋,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대찬은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흐뭇하게 그 풍경을 즐겼다.

맹윤주는 사장의 배려와 필요로 계속 마트에서 일하게 되었다.

성격이 야무져서 시식코너의 판촉사원 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맹윤주는 당장의 생계가 어려워 높은 시급의 일자리가 필요했고, 업체로서도 제법 유능한 직원을 얻는 일이었으니 윈윈이었다.

싹싹하게 제 몫을 해내는 맹윤주를 보고 대찬도 힘을 얻었다.

‘눈여겨봤다가 괜찮다 싶으면 직원으로 내가 채용해야겠어.’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대찬이 맹윤주를 자기 손으로 채용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수유점의 매출이 한창 깎아지른 듯한 상승곡선을 타고 있던 그때, 김태준 사장이 서청수 회장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았다.

서청수 회장은 으레 측근들을 자택으로 불러 식사를 했다.

결혼으로 맺어진 집안사람이기도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식사를 하던 중 서청수 회장이 말했다.

“거기 수유점 매출 괜찮다며?”

“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 살려놓은 수준입니다.”

“조대찬이 솜씨가 화타라도 되는 모양이야.”

김태준 사장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경쟁점포 어떻게 해보겠다고 차재원 대표까지 연구하더군요.”

“차재원? 뱅킷레신저랑 버거칸에 있던 사람?”

“네. 패턴을 연구해서 점포를 철수시킬 거라고 예상하더군요.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고요.”

“생각은 해도 과감히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웠을 텐데, 하여튼 그놈 곤조만큼은 인정해줘야겠어.”

“예, 이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컴백시켜도 문제없겠지?”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뭐 애초에 점장 발령에 회의적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왕윤수나 장백주도 토 달지 못할 겁니다.”

“그러겠지. 그놈들은 왜 그렇게 조대찬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올라갈 만큼 올라간 놈들이, 칠칠치 못하게.”

“그러게 말입니다. 고작해야 일개 차장인걸요. 조대찬, 그만하면 비 많이 맞았습니다. 이제 집으로 불러들이시죠.”

“그렇게 해. 나도 왕, 장이 하도 난리법석이라 그렇게 하라고 놔뒀을 뿐이니까.”

“예. 그럼 본사로 불러들이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준 사장은 서청수 회장과 식사를 함께한 다음 날, 수유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난데없는 사장의 등장에 수유점 직원 모두가 꽁꽁 얼어붙었다.

소식을 들은 허운은 진절머리를 냈다.

“저번에는 업하우스 대표가 오더니 오늘은 우리 사장이 오고… 암튼 조대찬 때문에 골 깨진다니까.”

김태준 사장의 방문은 대찬에게도 전해졌다.

대찬이라고 긴장 안 할 도리가 없었다.

대찬은 서둘러 매장 입구로 나가 김태준 사장을 맞이했다.

“사장님, 어쩐 일로…….”

“어, 조 점장 농땡이 안 치고 일 잘하고 있나 불시검문.”

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적잖이 못 미더우셨나봅니다.”

“그저 하는 말이지. 성적이 좋은데 미덥지 못할 리가. 매장 점검 핑계 대고 커피나 한잔 얻어 마시러 왔어.”

그 말을 듣고 뒷줄에 선 허운이 김산호에게 속닥거렸다.

“점장실 커피 맛있는 거 사장님한테까지 소문이 났나봐.”

허튼소리에 김산호는 응답하지 않았다.

대찬은 점장실로 길을 터주었다.

김태준 사장은 앞장서라는 손짓을 했다.

둘은 점장실에 마주앉았다.

대찬이 김태준 사장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착석했다.

김태준 사장은 커피를 한입 머금고 입을 열었다.

“조 점장 곧 본사로 컴백시킬 거야.”

“아, 그렇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기분 좋지 않아?”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점장 생활도 마냥 나쁘지는 않아서요.”

“그럼 그대로 정년까지 여기서 푹 썩을래?”

“아휴, 아뇨. 슬슬 타성에 젖어가던 중이었습니다. 치열하게 일하는 본사가 슬슬 그립던 참입니다.”

김태준 사장은 픽 웃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허운 과장이랑 김산호 대리도 마찬가지로 본사로 불러들일 거야.”

“바늘 가는 데 실 가니까요. 감사합니다.”

“바늘에 실까지는 아니고, 빅맥세트에 감자튀김이랑 콜라 딸려오는 정도지. 부서는 당연히 전략기획실이 될 거고, 직급은 차장.”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본사로 들어오면 바빠질 거야. 이번에 나 그룹 본사로 들어가기로 돼 있다. 이동수 부사장이 사장 노릇 할 거고, 얼마 안 있어서 원웅이한테 자리 넘어갈 거야.”

대찬의 귀가 쫑긋했다.

이동수 부사장은 김태준 사장만큼의 카리스마가 없다.

본인의 욕심도 큰 편이 아니다.

자연히 서원웅에게 힘이 쏠릴 수밖에 없는 형편.

게다가 김태준 사장이 그다음은 서원웅이라고 콕 집어 말했다.

서원웅이 사장이 되면 지금까지의 알력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치열해질 것이다.

대찬은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바빠지긴 하겠군요.”

“그럴 거야. 서원웅이 사장 되면 조 점장도 굵직한 일을 해내야 할 테니까.”

“예, 그렇겠죠…….”

“바짝 긴장해둬. 잔뜩 부려먹어줄 테니.”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차근차근 수유점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흡사 말년병장 같았다.

다시 본사로 돌아가면 바빠질 터.

부랴부랴 휴가도 다녀왔다.

일은 분대장 격인 표성재 부점장이 맡아서 처리했다.

대찬은 여유작작 웃으면서 말했다.

“나 휴가 다녀오는 동안 업무에 별일은 없었죠?”

“넵. 매출 순위가 16위로 올라간 거 말고는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제가 없어도 알아서 잘 돌아가네요.”

“점장님이 기반을 잘 닦아놓으신 덕택입니다.”

“저 조만간 본사로 돌아가는 거, 알고 계시죠?”

표성재 부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저, 정말입니다.”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믿어드릴게요. 출근길에 사장님이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사장님이요?”

“네. 저한테 후임 점장으로 누가 좋겠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아, 모쪼록 좋은 사람으로 추천해주셨길 바랍니다.”

대찬은 씩 웃었다.

“글쎄요, 그렇게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제 매장은 점장님처럼 꽉 쥐고 안 흔들어도 잘 돌아갑니다. 숨통 좀 트고 싶어요.”

“와, 이제는 제가 갈 때 됐다고 막말하는 겁니까?”

표성재 부점장은 멋쩍게 웃으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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