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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84화 (183/556)

난 할 수 있어 184화

말 몇 마디에 공짜 커피도 마시고 공돈까지 받으니 진공청소기 할배의 기분이 기꺼웠다.

물론 대찬이 그에게 들이댄 구실은 모조리 거짓이었으니, 상품권 역시 대찬의 피 같은 사비였다.

대찬은 그를 잘 구슬려 제법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자질구레한 것들은 차치하고, 그가 주목한 건 진공청소기 할배의 손녀였다.

손녀는 이제 갓 스물이라고 했다.

일찍이 부모와 떨어졌다고 했다.

손녀의 아버지이자 진공청소기 할배의 아들은 불행히도 일찍이 병을 얻어 사망하고, 손녀의 어머니이자 진공청소기 할배의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고 했다.

진공청소기 할배는 그년 망할 년이라고, 시아비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아는 년이었다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걸 보니, 자세한 우여곡절은 몰라도 그녀의 가출에 진공청소기 할배의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겠다 싶었다.

어쨌든 조실부모하고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데다, 형편까지 넉넉지 않아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했다.

대학은커녕 생활비를 버느라 밤낮없이 일한다고 했다.

사정이 딱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엉? 그럴 거까진 없는데…….”

호의의 연속에 진공청소기 할배는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오늘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요. 감사해서 그럽니다. 택시로 모셔다드릴게요.”

“고, 고맙긴 한데, 굳이 자네까지 같이 타고 갈 이유가 있을까?”

의외로 정곡을 찌르는 말에 대찬은 급히 구실을 댔다.

“근무시간이잖아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농땡이 좀 피우려고요.”

“이런. 월급 주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불량하군.”

“그래도 가끔은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직장 다니지 않겠습니까.”

대찬은 실없는 웃음으로 진공청소기 할배의 공격을 차단했다.

잡아탄 택시는 후미진 곳으로 들어갔다.

마트가 있는 신도시를 벗어나 원주민들이 살던 낡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진공청소기 할배는 버스값을 아끼려고 집에서 마트까지 그 먼 거리를 도보로 왕래한다고 했다.

참 대단한 근성이라고 대찬은 생각했다.

“그럼 마트에서 또 뵙겠습니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대찬은 굳이 진공청소기 할배를 대문까지 배웅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어, 고맙네.”

진공청소기 할배는 손짓으로 인사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참 별놈 다 보겠네, 지나친 호의가 그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대찬은 진공청소기 할배의 주소를 휴대폰에 입력하고 마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퇴근 후, 다시 그 동네를 찾았다.

‘나 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렇게 툴툴댔지만, 이미 커피값이며 택시비며 상품권까지 나간 돈이 상당했다.

경제학은 이미 써버린 매몰비용은 고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사람 마음이 또 그렇지 않았다.

택시가 멈춘 곳은 달동네였다.

계단이 하늘로 향해 있고, 오래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마트가 있었다.

‘슈퍼마켙’이라고 쓰인 간판이 오래돼 보였다.

정겨운 평상도 놓여 있었다.

대찬은 맥주 1병과 마른오징어 1마리를 샀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저 위에 파란 지붕에 사는 할아버님 계시잖아요, 손녀딸이랑 둘이서 지내시는.”

“아, 맹 영감님? 그 영감님은 왜요?”

성이 맹씨라는 정보가 추가됐다.

“별건 아니고요. 여기 분들끼리는 잘 아시겠어요.”

“집에 빤스 몇 장 있는지까지 다 알지.”

“그 집 손녀분도 잘 아세요?”

대찬이 묻자 주인은 느물거리는 시선을 던졌다.

“왜, 관심 있어?”

“그, 그런 건 아니고……. 사정이 좀 어렵다고 해서 저희 회사에서 좀 도울까 해서요.”

“도와?”

“네. 잠깐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할아버님 성격이 워낙 드세잖아요.”

“맹 영감 성질머리 독한 게 거기까지 소문이 났나보네.”

“하하, 그래서 따로 얘기하고 싶어서요.”

그때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 말에 대찬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 20대로 보이는 여자였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뚜렷했고, 질끈 묶은 포니테일 머리가 야무졌다.

주인이 그에게 말했다.

“윤주야, 너 보러 오셨단다.”

“네? 저를요?”

맹윤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찬을 바라봤다.

순간 대찬과 시선이 맞닥뜨렸다.

대찬은 그녀에게 꾸벅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맹윤주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초면이었으니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불필요한 경계심을 불식하고자 얼른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필래마트 수유점 점장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명함을 받은 맹윤주는 멀뚱히 명함과 대찬을 번갈아봤다.

“무슨 일이시죠?”

“초면에 좀 그렇지만, 맥주 좋아하세요?”

“네에?”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잠시 후, 둘은 평상에 앉았다.

날씨가 바깥에서 술 마시기에 좋았다.

둘은 맥주 1병씩을 손에 쥐었다.

잘 구워 돌돌 말린 오징어가 앞에 놓였다.

가게주인의 선심으로 마요네즈와 고추장까지 종지에 담겨졌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맥주만 나눴다.

그러다 맹윤주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죠?”

“할아버님이 저희 마트를 자주 찾으세요.”

“그런데요?”

“오늘 따로 뵙고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거든요.”

맹윤주의 얼굴이 굳었다.

“혹시 저희 할아버지가 실수라도 저지르셨나요? 만약에 그랬다면…….”

실수 얘기부터 나오는 걸 보니 진공청소기 할배의 악명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닌 듯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문제가 있으면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제가 책임질 부분은 책임지겠습니다.”

당찬 목소리가 대찬의 마음에 들었다.

“그럼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제안이요?”

“저희한테도, 맹윤주 씨한테도 이득이 될 겁니다.”

대찬은 빙긋 웃었다.

둘은 평상에 오래 머물렀다.

오랫동안 이어진 대찬의 말에 맹윤주는 호흡을 한 번 깊게 했다.

그러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게요. 아니, 해야죠.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고맙습니다.”

대찬은 빙긋 웃었다.

“그럼 마트에서 봬요.”

맹윤주는 손을 흔들면서 부랴부랴 집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귀가가 늦어지면 할아버지의 조바심이 극에 달한다고 했다.

그만큼 진공청소기 할배는 손녀를 애지중지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애정의 1퍼센트만이라도 발휘한다면 이런 사달까지는 안 났을 거라고 대찬은 확신했다.

다음 날, 대찬은 어김없이 출근했다.

보통 업무 와중에 짬이 나면 매장을 둘러보거나 허운과 담배를 피우거나 김산호와 커피를 나눠 마셨다.

그런데 이날은 축산파트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고기 써는 직원이 대찬을 발견하고 말했다.

“요즘 부쩍 자주 오십니다?”

“아, 그럴 일이 있어서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고기 써는 직원 옆에 자리를 잡았다.

직원이 바쁘면 그가 직접 나서 손님을 맞이하기도 했다.

“장조림 하시게요? 그럼 홍두깨살로 가져가세요. 우둔도 좋긴 한데 오늘은 홍두깨살이 특히 좋습니다.”

그렇게 대찬이 아예 자리를 깔고 앉으니 직원이 눈을 흘겼다.

“점장님, 부담스러워요. 남의 일까지 거들어주시고.”

“모니터할 게 있어서요.”

그 말에 직원은 흠칫 놀랐다.

“모니터요? 본사에서 입점업체 감시하라고 지시 내려왔어요?”

외주 입점업체 소속인 직원은 감시, 모니터 같은 낱말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얼른 고개를 저어 그의 불안을 불식시켜주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걱정할 거 없어요.”

직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시식코너였다.

그는 진공청소기 할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이틀에 한 번 꼴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꼭 규칙성을 가지는 건 아니고, 언제는 연달아 닷새를 오는가 하면 어떤 때는 일주일간 딱 걸음을 끊기도 했다.

시식코너에 시선을 고정한 대찬을 보고 직원이 씩 웃었다.

“왜요, 맘에 들어요?”

“네?”

“저번에 관뒀던 자리에 오늘 새로 왔거든요. 원래는 아주머니들이 주로 오지, 저렇게 젊은 친구가 오진 않잖아요.”

대찬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죠. 저렇게 젊은 친구가 오진 않지.”

그때 진공청소기 할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직원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속닥거렸다.

“왔다, 왔다.”

위풍당당한 모습에 축산파트 직원들이 긴장했다.

대찬도 침을 꼴깍 삼켰다.

진공청소기 할배는 익숙한 걸음으로 시식코너로 향했다.

새로 온 직원은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고기를 잘랐다.

진공청소기 할배가 그 앞에 딱 버티고 섰다.

그러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수북이 쌓인 시식용 고기를 동내기 시작했다.

새로 온 직원은 당황했는지 가위질을 멈췄다.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공청소기 할배를 응시했다.

그러자 진공청소기 할배가 직원을 빤히 바라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왜 눈깔을 고 따위로 떠? 불만이야?”

“어, 음… 네.”

솔직한 대답에 진공청소기 할배의 눈에서 불빛이 튀었다.

그는 목청껏 빽 소리를 질렀다.

“뭐! 지금 불만이라 이거야?”

“네.”

신선한 대답이었다.

순간 진공청소기 할배의 말문이 턱 막혔다.

“뭐, 뭐라고……?”

“불만이라구요.”

직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가렸던 하얀 마스크를 벗었다.

직원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맹윤주였다.

그러자 진공청소기 할배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너, 너…….”

“끼니 거르지 말라니까 여기서 이러고 계셨어요?”

맹윤주는 한숨을 쉬었다.

진공청소기 할배는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네… 네가 왜 여기 있냐?”

“여기서 아르바이트하기로 했어요.”

“…….”

“고기 더 드릴까요, 손님?”

진공청소기 할배는 자신의 손녀딸에게 할아버지가 아닌 다른 호칭으로 처음 불렸다.

손님이라는 호칭이 낯설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오랜만에 그의 속에서 꿈틀거렸다.

진공청소기 할배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맹윤주는 접객용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고기 더 드릴까요, 손님?”

“으아으…….”

진공청소기 할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도망가듯 마트를 빠져나갔다.

맹윤주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바라보는 얼굴에는 접객용 미소가 아닌 쓴웃음이 번져 있었다.

그녀는 건너편의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효과는 있는 것 같네요.”

“그러게요.”

대찬의 얼굴에도 맹윤주의 쓴웃음이 옮아있었다.

“그래도 후련하네요. 할아버지가 더 민폐 끼치고 다니시진 않을 거 같아서.”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을 텐데 흔쾌히 응해주셔서 고마워요.”

맹윤주는 쓴웃음을 지우고 활짝 웃었다.

“뭘요. 저희 영감님 제대로 단속 못한 제 원죄가 큰데요. 그리고 이렇게 시급 센 알바 구하기도 힘들거든요.”

“괜찮으시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힘써볼게요. 알량한 힘이지만.”

“진짜요? 그럼 진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맹윤주는 씩씩하게 웃었다.

대찬도 씩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매장을 지나가던 김산호가 끼어들었다.

“점장님,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아, 김산호.”

“뭐야, 지금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계셨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누나한테 점장님 바람피운다고 확 찔러버릴까봐.”

김산호의 얼굴은 심술로 잔뜩 부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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