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83화
빵의 의미는 컸다.
빵 만들어서 상사한테 갖다 바치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빵을 주겠다는 마음을 먹는 건 어려운 일이다.
대찬은 비아냥거리려고 쓰는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말이 수유점에서는 진심으로 통하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사님, 빵 고마워요. 맛있던데요?”
“아이구, 뭘 점장님이 직접 행차까지 하셔서 인사치레를 다 해요?”
“고마워서 그러죠.”
숙정 여사는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에도 한 트럭 구워다 갖다 드릴게.”
“그러셨다간 저랑 정분난 줄 알고 바깥분이 제 따귀 때리실걸요.”
“헹, 그 양반한테 그럴 정도의 사랑이라도 남았나 몰라. 점장님은 결혼상대 신중히 골라요. 한 번의 선택으로 인생이 재미없어진다니까.”
대찬은 김산하의 얼굴을 잠깐 떠올리곤 어색하게 웃었다.
“조언 잘 새겨듣겠습니다. 아무튼 잘 먹었어요.”
그렇게 인사치레를 하고 다시 점장실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축산파트 쪽이었다.
그쪽 직원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 모습에 대찬은 한 직원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요?”
그는 나이가 비슷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젊은 남자 직원에게 물었다.
축산파트에서 고기를 써는 직원이었다.
“아, 점장님, 네. 지금 완전 초비상이에요.”
“왜요?”
“그분이 오셨거든요.”
“그분……?”
대찬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직원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축산파트 직원들의 시선도 이미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저 멀리서 한 할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분……?”
“네. 일명 진공청소기 할배.”
“진공청소기……?”
“우리 파트 시식코너를 초토화시켜놓는 아주 악명 높은 할아버지예요. 진공청소기처럼 다 빨아들이거든요.”
“아.”
그래서 청소기.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래서 저분만 오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어요.”
과연 말대로 직원의 표정은 뻣뻣하게 얼어있었다.
진공청소기 할배는 어기적어기적 축산파트로 걸어왔다.
만두와 소시지 등 진공청소기 할배의 주 종목이 즐비한 가공식품 코너는 이미 쑥대밭이 되었다.
시식코너에 있는 직원들은 바짝 굳었다.
남의 불행은 나의 일이 되기 전까지 와 닿지 않는 법이다.
대찬은 긴장보다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진공청소기 할배를 주시했다.
진공청소기 할배의 명성은 과연 헛것이 아니었다.
돼지 목살을 썰어놓은 코너에 자리 잡은 그는 무덤덤하게 녹색 이쑤시개를 집었다.
그의 손놀림은 능숙했고 태연했다.
그는 2개의 이쑤시개를 이용했다.
이쑤시개 하나로 고기 하나를 집어먹고, 그와 동시에 다른 이쑤시개로 고기를 찔렀다.
그리고 그 다른 이쑤시개로 찌른 고기를 먹으면서 다시 먹었던 이쑤시개로 고기를 찔렀다.
연속된 동작은 흡사 어릿광대의 저글링처럼 부드러웠다.
“오오, 이도류인가…….”
대찬은 그의 솜씨에 감탄했다.
그러자 고기 써는 직원이 아래턱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농담으로 퉁칠 일이 아니에요.”
“분야를 막론하고 고수를 만나면 흥분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너무하세요, 점장님.”
대찬은 팔짱을 끼고 진공청소기 할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말로 잘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겉보기에는 딱 국제신사신데.”
“그게 됐으면 우리가 이렇게 긴장하겠어요? 자, 보세요.”
목살을 자르는 족족 진공청소기 할배에게 강탈당하던 시식코너의 직원은 더 참지 못했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진공청소기 할배에게 말했다.
“고객님, 시식은 말 그대로 시식이에요. 여기서 식사를 하시면 다른 고객들이 못 드세요.”
공격적이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말씨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진공청소기 할배의 얌전한 눈에 찌릿 전기가 튀었다.
“뭐어야?”
“그러니까 다른 고객들이…….”
“이봐, 말 한번 이상하게 하는구먼. 내가 몇 점이나 먹었다고 생색이야, 생색이!”
“고객님…….”
“여기서 몇 점만 먹어라, 법으로 정해놓은 거 있어? 당신들이 장사해 처먹으려고 이렇게 해놓은 거 아니냐고!”
“예, 맞는데요…….”
진공청소기 할배의 목에 핏줄이 팍 곤두섰다.
“맞으면 맞는 거지, 맞는데요는 뭐얏!”
결국 시식코너 직원은 패배했고, 진공청소기 할배는 전리품으로 목살 몇 점을 입에 더 욱여넣었다.
고기 써는 직원이 대찬에게 말했다.
“거보세요. 소용없다니까요.”
“생각보다 강적이네요.”
목살 시식코너를 초토화시킨 진공청소기 할배는 건너편의 미숫가루 시식코너로 향했다.
후식까지 챙기는 야무진 생활력이었다.
그는 미숫가루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쥐포 한 장을 질겅질겅 씹으며 원정을 마무리했다.
그가 쓸고 지나간 시식코너는 초토화되었다.
“이건 마트 차원에서 제대로 대응해야겠는데요?”
“그렇죠. 해야죠.”
“근데 왜 보고가 안 올라오죠? 브리핑에서 못 봤는데.”
대찬의 질문에 고기 써는 직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트 차원에서 대응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마트 입장에서는.”
“네?”
“저희, 파견이잖아요.”
“아.”
씁쓸한 맛이 번졌다.
시식코너에서 판촉을 진행하는 직원들은 필래마트 소속이 아니었다.
입점업체 소속, 그보다도 경우가 안 좋으면 입점업체가 다시 인력파견업체에 의뢰해 구한 직원들이었다.
그렇다보니 할아버지 하나가 와서 시식코너를 싹쓸이해도 필래마트에 명시적인 책임은 없었다.
모두 입점업체의 부담이었다.
필래마트는 입점업체를 위해 굳이 마트의 이미지 훼손과 극성 고객과의 감정소모를 감수할 의무도,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시식코너 직원들은 마트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진공청소기 할배의 희생양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진공청소기 할배의 주 타깃인 축산파트는 상황이 더욱 열악했다.
위탁이 가능한 부분은 대개 입점점포로 운영하는 상황이었다.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는 축산파트의 경우, 아예 수수료 매장에 위임한 터였다.
그러니까 축산파트는 약자의 약자였다.
이런 문제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점장의 힘으로 이 부분을 개선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필래마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수수료 매장으로 위임한 축산파트 직원들이 다소 열악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것이 필래마트의 이익에 부합하기에 그렇게 두었다.
다만, 보너스를 차등 없이 지급하는 정도의 온정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의 말이 더욱 마음의 짐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된 이상 마냥 방관만 할 수 없었다.
대찬은 턱을 괴고 말했다.
“흠, 이래저래 난처하겠네요, 직원들은.”
“아무래도요. 난처한 동시에 처량하죠. 아무도 편이 없으니까.”
“으음.”
대찬은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 진공청소기 할배를 상대했던 시식코너 직원이 눈물을 훌쩍거리면서 이쪽으로 왔다.
그녀는 같은 업체 소속인 고기 써는 직원에게 이르러서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 이제 이 일 더 못하겠어.”
“아, 아줌마… 그래도…….”
“말리지 마. 내가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이젠 안 될 거 같아.”
완전히 넌덜머리가 난 그녀는 그날로 사표를 쓰고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우울한 축산파트에 그늘이 더 짙게 드리웠다.
며칠간 축 가라앉은 축산파트를 살핀 허운은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딱하네.”
“딱하지.”
대찬도 그 이상의 감상을 내놓을 여지가 없었다.
허운이 대찬을 보며 말했다.
“점장님이 손볼 방법이 없을까?”
“내가 뭘 어떻게 해? 악성고객 하나 때문에 축산파트를 직영으로 돌릴 수는 없어.”
허운은 실실 웃었다.
“말은 그러면서 속으로는 걱정돼 죽겠죠?”
“아니야!”
“아니얘!”
허운은 대찬의 말을 익살스럽게 따라하면서 낄낄거렸다.
대찬이 찌릿 눈빛을 쏘고는 허운의 곁을 떴다.
그런 그가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저 형은 나를 너무 잘 알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잘 인지하지 못했던 진공청소기 할배가 대찬의 레이더에 자주 포착되었다.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조자룡 헌 창 쓰듯 녹색 이쑤시개를 자유자재로 놀리며 시식코너를 초토화시키는 그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시식코너의 직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진공청소기 할배의 존재는 장기적으로는 마트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런 계산적인 생각을 차치하고서라도 평균적인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축 처진 축산파트를 보고 딱한 생각이 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우선은 한동안 방관했다.
진공청소기 할배의 행동을 관찰했다.
물론 단순하게 보자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과식하기, 대드는 직원에게 더 큰 목소리로 대드는 것, 2가지뿐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 잇… 좀생이 같은 놈들아! 고기 몇 점 축낸다고 나를 무슨 거지새끼로 취급하는데, 네들 장사 그따위로 하면 안 돼!”
“고객님, 그게 아니라…….”
“나 거지 아니다? 멀쩡한 집도 있고, 예쁜 손녀딸도 있어. 엉? 나 거지 아니라고!”
“예예, 그럼요, 고객님. 저희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내가 왜 여기 오는 줄 알아?”
직원이 굳이 묻지 않는데도 진공청소기 할배는 구태여 구구절절 사연을 풀어놓았다.
내심 손톱만 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왜 오시는데요……?”
“우리 손녀딸이 착해서 그래! 할애비가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서 밥 굶는 꼴을 못 봐! 그래서 새벽같이 출근하면서도 꼭 밥상을 차려놓는단 말이야!”
“아, 그러세요.”
본업이 상담사가 아닌 시식코너 직원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고기를 구워다 바치는 건 물론이요, 이제 말벗까지 해야 되나 싶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업무량이었다.
“그러니 할애비 마음이 어떻겠어. 고 어린것이 할애비 밥 멕이겠다고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걸 보는 마음이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굳이 여기 와서 이러는 거 아니야!”
“네…….”
직원의 표정을 떨떠름했다.
속으로는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자기 손녀딸 고생 안 시키려고 남 고생시키는 정신머리를 받아줄 성인군자는 흔치 않았다.
‘영감님, 편협한 마인드 대단하십니다.’
멀리서 이를 엿듣던 대찬도 속으로 좋지 않은 말을 꿍얼거렸다.
한바탕 식사를 마친 진공청소기 할배는 휘적휘적 마트를 떠날 태세였다.
대찬은 천천히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고객님, 시식은 만족스러우셨나요?”
“엉?”
갑작스러운 접근에 그는 대찬을 못 미더운 눈초리로 훑어봤다.
그러자 대찬이 접객용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여기 점장입니다.”
“어엉… 뭐, 잘 먹었소.”
제아무리 막무가내인 영감이라도 웃는 낯에 다짜고짜 반말로 험한 말을 지껄이긴 어려웠다.
거기다 점장이라고 하니 어째 함부로 대하기 어려웠다.
“만족스러우셨다니 다행입니다. 더 큰 만족을 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직원이 좀 퉁명스럽죠?”
“으, 응?”
대찬의 물음이 진공청소기 할배는 당혹스러웠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그였지만, 직원이 퉁명스러운 부분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찬이 한술 더 떠 먼저 직원 흉을 보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실은 저 직원들은 저희 마트 소속이 아니고 외주거든요. 저는 점장으로서 외주 직원들을 감시하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그래?”
“네. 그래서 그런데 잠깐 저랑 어디 다방 가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고객님들 평가를 깊이 경청하고 평가에 반영하려고 하는데요.”
대찬의 말에 진공청소기 할배는 팍 인상을 썼다.
귀찮은 건 누구나 싫겠지만 노인에겐 더한 법이다.
“그럴 시간이 어딨어!”
“저희 마트 상품권도 드리고 있습니다. 남들은 못해서 성화인 좋은 기회예요. 잠깐이면 됩니다.”
“그래……? 커피는 댁이 살 거지?”
“그럼요, 고객님.”
대찬은 진공청소기 할배와 다방으로 향했다.
대찬은 오랜만에 다방커피를 마시면서 독대했다.
어른하고 대화하는 건 자신 있었다.
어른의 말을 고분고분 끝까지 듣는 참을성과 찰떡같은 맞장구 기술만 지니고 있으면 손쉬웠다.
“그래도 필래마트에 인재가 있었구먼. 사람이 이렇게 얘기가 통해야지, 얘기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의견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대찬은 그렇게 말하며 5만 원권 상품권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