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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82화 (181/556)

난 할 수 있어 182화

대찬은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위로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역시 주말 이틀 꼬박 근무에 투입되었던 허운은 찌뿌듯한 어깨를 돌리며 대찬에게 말했다.

“아, 진짜, 그냥 수고했다 말 한마디로 끝내면 나 섭섭해요.”

“주말수당 나갈 건데, 뭐.”

허운은 대찬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웃었다.

“술이라도 똑 한잔 사야지.”

“알았어. 관리자 직원들 전체회식 한 번 하고, 형이랑 산호한테는 따로 더 한잔 살게.”

허운이 흐흐 웃었다.

“이래야 우리 대찬이지. 그럼 따로 날 잡을 것도 없이 오늘 콜?”

“아유, 나도 지금 술 마실 체력이 못 돼.”

“그게 무슨 섭섭한 말이야? 오늘 딱 한 잔만 하자.”

“맨날 지켜지지도 않는 한 잔만 타령, 지겹지도 않아?”

대찬은 완곡히 거부했지만 기어코 허운의 손에 이끌려 또 술을 퍼마셨다.

대찬은 완전히 졸도할 지경이 돼서 실려가듯 택시를 탔다.

그는 옷을 갈아입지도, 세수나 양치를 하지도 않은 채 베개에 뒤통수를 대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월요일.

주말 간의 중노동을 마친 직원들은 쉬지도 못하고 출근했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이 어둡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그럴 수 있는 건 순전히 돈의 힘이었다.

전쟁 같은 영업이 한창이던 때, 대찬은 김태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말에 가족하고 단란하게 시간 좀 보내려고 했더니, 자네까지 날 괴롭히나?”

“죄송합니다, 사장님. 부탁 좀 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오호라, 주말 방해하는 주제에 부탁까지?”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염치없죠. 죄송합니다.”

“죄송한 거 알면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용건만 간단히 말해.”

“보너스 좀…….”

대찬이 운을 떼자마자 벼락같은 호통이 수화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걸 예상한 대찬은 벌써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놓은 참이었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지금 너 때문에 쌓인 적자가 얼만 줄이나 알아! 그런데 뭐? 보너스? 장난해, 지금!”

“요 몇 달 직원들이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주말에도 살인적인 스케줄 소화했습니다. 보상은 충분히 주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줄 거면 네 월급 털어서 줘!”

“그걸로 충당 가능하면 진즉 하지 않았겠습니까.”

“처음에는 설설 기더니 이제는 아주 나한테 말대답도 꼬박꼬박 하는군?”

맹수가 포효하듯 사납게 일갈하는 김태준 사장의 목소리에 대찬의 오금이 살짝 저려왔다.

그래도 할 말을 삼키지는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적자는 이번 달까집니다. 다음 달부터는 매출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보너스가 아깝지 않으실 겁니다.”

“참 나, 싸가지 없는 새끼. 끊어!”

“저, 보, 보너스는……!”

“넣을 거야! 끊어!”

김태준 사장은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지만 대찬의 부탁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필래마트 수유점 전 직원의 급여통장에 특별 수당이 입금되었다.

적지 않은 액수였다.

중노동 때문에 생긴 근육통과 만성피로가 깨끗이 씻길 정도의 액수였다.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들의 태도가 전에 없이 싹싹했다.

‘역시 돈이 보약이야.’

대찬은 흐뭇이 웃었다.

수유점의 성공은 대찬에게나 중요한 일이었다.

매장이 잘되거나 말거나 매장 직원들의 관심 밖이었다.

도리어 손님이 몰리면 일만 더 바빠지니 차라리 파리 날리는 편이 나았다.

그런 그들에게 의욕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로지 돈이었다.

심금을 울리는 일장연설, 상사의 서릿발 같은 카리스마, 가족 같은 사내 분위기.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돈, 돈이 유일한 수단이었다.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은 폐점했다.

업하우스가 문을 닫자마자 맨틀을 뚫고 외핵, 내핵까지 치닫던 필래마트 수유점의 매출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안정적으로 매출을 높여가던 시점의 매출을 훨씬 상회했다.

주말 동안 신선식품을 대대적으로 거저 방출했던 건 그대로 방문고객의 숫자로 증명되었다.

업하우스의 기존 고객들의 상당수를 필래마트 수유점이 싹쓸이했다.

이걸 본 위마트 미아점은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으로부터 떠안은 신선식품 외의 재고를 주변의 학교나 고아원, 노인정 등에 뿌리면서 대대적인 홍보에 들어갔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후발주자의 아픔을 톡톡히 맛봤다.

여성 후보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이듬해 초가 되어서는 대찬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월례 지점장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대찬은 다시 앞으로 불려나갔다.

하지만 지난 몇 달과는 다른 자격이었다.

매 맞으러 나간 게 아니라 상 받으러 나갔다.

김태준 사장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지난달 수유점 순위가 몇 등이었지?”

“79등이었습니다, 79개 점포 중에.”

김태준 사장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번 달은 20등 했군, 79개 점포 중에.”

김태준 사장의 말에 다른 점장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특히 만년꼴찌 동료를 잃은 가양점 점장은 충격이 더 커 보였다.

점장들은 사장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저들끼리 잠시 웅성거렸다.

김태준 사장은 잠깐의 헛기침으로 소란을 제압하고 말했다.

“뭐, 이번 달에 20등을 했다고 해도 지난 몇 달간의 적자를 메우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네. 최대한 흑자전환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다른 점장님들도 잘 들으세요.”

김태준 사장의 말에 점장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김태준 사장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수유점의 극적인 매출상승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실 내가 수유점을 좀 편애한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겠지요.”

점장들의 시선은 계속 김태준 사장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조대찬 점장의 열의와 적극성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내가 쥐여 준 칼자루는 도리어 부담과 피로만 가중했겠지.”

“…….”

“여기 계신 다른 점장님들은 조 점장의 퍼포먼스를 잘 기억해두십시오. 그리고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려서 매출을 높여보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뭐, 모든 분들께 열정을 강요하고 싶진 않습니다. 현상유지만으로도 벅찬 분들이 계시겠죠. 그런 지점은 본사의 관리를 받는 쪽이 더 편할 겁니다. 누구나 열심히 한다고 잘하는 건 아니니까.”

“…….”

“하지만 잘하고자 하는 점장들에게는 자유를 허락하겠습니다. 별도로 신청을 해놓으면 그 점포는 책임자율경영 점포로 지정하겠습니다. 상품의 관리부터 직원 선발 권한까지 모두 점장님께 드리겠습니다. 물론 결과는 좋든 나쁘든 오롯이 점장님의 책임이 되겠죠.”

점장들은 꼴깍 침을 삼켰다.

김태준 사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점장님들의 선택을 기대하겠습니다. 얼마나 야심이 대단들 하실지. 내 눈여겨볼게요.”

김태준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자리에 있던 점장들 중 대다수는 책임자율경영 점포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했다.

사장이 눈여겨보겠다는데 가만히 있으면 출셋길 막히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정말 자신이 없거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점장들만 책임자율경영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김태준 사장의 선택이 내포한 여러 가지 의미를 눈치챈 탓이었다.

책임자율경영은 기본적으로 필래마트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선택된 제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치진 않는다.

‘원웅이한테 힘을 실어주는 조치야.’

지점에 많은 권한을 주는 만큼 필래마트 본사의 역할은 줄어든다.

훗날 서원웅이 필래마트의 사장이 되면, 자질구레한 업무 대신 그룹 내부의 정치에 온힘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려는 의도 또한 다분하다.

대찬 역시 서원웅의 출세에 일조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그럴 신세가 못 되었다.

‘일단 수유점부터 완전히 살리고 보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적자행진을 마감하고 매출 20위를 기록한 이후, 수유점의 매출은 완전히 상승가도를 탔다.

그다음 달에는 18위, 또 그다음 달에는 15위를 기록했다.

높은 폭의 흑자를 기록하고, 대찬은 김태준 사장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적잖은 금액을 성과급으로 풀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안팎에서 들어오는 희소식에 직원들도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물론 그런 데는 고된 노동 끝에 입금된 두둑한 보너스도 한몫했다.

고무된 분위기는 직원들의 의욕을 고취시켰다.

하루는 표성재 부점장이 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대찬과의 앙금은 풀렸지만 그에게 대찬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점장님, 바쁘십니까.”

“아뇨. 무슨 일이에요?”

“저… 제가 이번에 어떻게 하면 매장을 좀 개선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봤습니다.”

“그러세요?”

“네. 그래서 저… 보고서로 만들어봤는데…….”

표성재 부점장은 여중생이 짝사랑하는 남자애에게 쪽지를 건네듯 수줍게 문서를 건넸다.

얇은 두께는 아니었다.

대찬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보고서를 살펴봤다.

날림으로 쓴 보고서가 아니었다.

애쓴 흔적이 잘 보였다.

‘부점장이 웬일이야.’

대찬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로 표성재 부점장을 바라봤다.

표성재 부점장은 대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점장님.”

“네, 점장님.”

“잘하셨어요.”

“아, 네…….”

“훑어만 봐도 정성이 보이네요.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부점장으로서 매장을 위해 할 일은 해야죠.”

‘어쭈,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대찬은 나이는 한참 위인 표성재 부점장을 구구단을 뗀 아들 보듯이 바라봤다.

“힘이 나네요, 부점장이 든든해서. 앞으로도 잘 도와주세요.”

“아, 아닙니다. 제가 뭘…….”

표성재 부점장은 대찬의 칭찬에 몸을 배배 꼬았다.

칭찬을 많이 들어본 적이 없으니 칭찬이 낯설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천천히 검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만 나가보세요.”

“옙, 점장님. 알겠습니다.”

표성재 부점장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점장실을 나섰다.

대찬은 그의 뒷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봤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라니까.’

표성재 부점장은 대찬의 앞에서 표정관리를 하다가 점장실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헤벌쭉 웃었다.

“흐흐, 흐흐흐…….”

그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호랑이선생님 같던 점장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을 들었다.

그는 그것이 두둑한 보너스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점장실 문을 등지고 흐흐, 웃음을 흘리는데 누군가 그의 기쁨을 방해했다.

“부점장님, 여기서 뭐 해요?”

“아… 허 과장.”

허운이었다.

무슨 일인지 품에는 빵을 한 보따리 들고 있었다.

그는 다 안다는 듯 실실 웃으며 표성재 부점장을 바라봤다.

표성재 부점장은 어흠, 헛기침을 하며 길을 터주었다.

“들어가시죠.”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들어가요.”

허운은 큭큭 웃으면서 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말고 그가 표성재 부점장에게 빵 하나를 내밀었다.

“부점장님도 하나 드세요.”

“웬 거예요?”

“맛있는 거예요.”

허운은 그렇게 말하고 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표성재 부점장은 닫힌 문을 보고 툴툴거렸다.

“저 새끼는 꼭 이럴 때 오더라.”

점장실 안으로 들어온 허운은 굳이 표성재 부점장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대찬의 책상 위에 빵 보따리를 내려놨다.

대찬은 빵과 허운을 번갈아보면서 물었다.

“이게 뭐야?”

“보면 몰라요? 빵이지.”

“내가 그거 물어봤어, 지금?”

허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숙정 여사님이 집에서 직접 만드셨대요.”

“숙정 여사님? 수산코너의?”

“네. 괴팍한 줄만 알았더니 이런 면도 다 있네요.”

대찬은 웃으면서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아마추어의 솜씨지만 제법 먹을 만했다.

재료를 아끼는 빵집 빵과 달리 건포도며 호두며 잔뜩 알알이 박혀 있었다.

“와, 이거 맛있네.”

“그죠. 맛있어서 정줄 놓고 먹다가 점심 생각이 싹 가셨다니까.”

“근데 뭘 이렇게 많이 갖고 왔어. 난 두어 개면 되는데.”

“이만큼이 다 점장님 몫이라잖아요.”

대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게 다?”

“네. 집에 가서 두고두고 드시랍디다. 좋겠수, 예쁨 받아서.”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말씀드려야겠네.”

대찬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운은 점장실에 올 때마다 치르는 의식을 이번에도 거르지 않았다.

“빵 줬으니 커피 한 잔 타갑니다.”

“아니, 빵을 당신이 만들었어?”

“내가 갖다드렸잖아요. 유통업계 종사자가 물류의 중요성도 몰라서야.”

대찬은 허운과의 입씨름을 종결하고 수산코너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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