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181화 (180/556)

난 할 수 있어 181화

대찬은 차재원 대표를 만나러 가지 않고 점장실을 지켰다.

30분쯤 지났을 때였다.

똑똑, 허운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점장님.”

“응.”

“차 대표가 뵙자는데요.”

대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여 그대로 가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점장실로 모셔.”

차재원 대표는 처자식은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점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공손히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뜻밖의 방문이십니다.”

“아, 조 점장, 독하대.”

차재원 대표는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꼬았다.

김산호가 찻잔을 차재원 대표 앞에 내려놨다.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독하다니, 무슨 말씀을…….”

“나 왔다는 첩보 진즉에 입수했을 거 아니에요. 어떻게 코빼기도 안 비쳐?”

“그러는 대표님이야말로 독하십니다. 저희 점포에 몸소 방문까지 해주시고.”

대찬이 그렇게 말하자 차재원 대표는 고개를 들어 그를 흘끔 바라봤다.

여유가 넘치는 얼굴을 보고 다시 고개를 틀었다.

후루룩, 차를 소리 내어 마시고 차재원 대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 미친 짓 계속할 거예요?”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미아사거리점 철수시킬 때까지?”

“네.”

차재원 대표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닌 걸로 아는데? 위마트까지 할인에서 철수한 이상, 조 점장이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감당할 적자가 아닐 텐데요.”

“저희가 적자를 감당하는 만큼 대표님 속도 편치만은 않으시겠죠.”

“나? 내가 왜? 그깟 미아사거리점 적자 좀 본다고 내가 떨 거 같아요?”

차재원 대표는 은근히 반말과 존댓말을 섞었다.

대찬을 상대하면서 우위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화법이었다.

대찬은 휘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면서 그를 압박했다.

“오늘 굳이 저희 점포까지 행차하신 걸 보니, 적잖이 몸이 달아오르신 거 같은데요? 듣자하니 미아사거리점 직원들도 차례대로 내보내고, 진열대를 채우지도 않으신다고 하던데요.”

“…뭐야?”

차재원 대표의 얼굴이 싹 굳었다.

대찬은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대표님께서 경쟁사의 일개 점장을 만나겠다고 부러 찾아오신 것부터가 대표님 속이 불편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이거 듣던 것보다 더 괴팍하신 분이네.”

“평가는 자유니까요.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차재원 대표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 살 깎아먹는 이 미친 할인, 이제 그만둡시다. 나도 그냥 물러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진짜 이럴 거예요?”

“같은 말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배짱이지, 도대체?”

이제 조급증을 내는 건 도리어 차재원 대표였다.

대찬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협상하러 오셨잖습니까.”

“난 협상하러 왔다고 말한 적 없는데.”

“타이밍이 그런데요. 위마트가 할인을 중단한 이 시점이 제가 가장 조급할 때라고 생각하신 거 아닙니까?”

“넘겨짚기 선수군.”

“넘겨짚었다면 죄송합니다만, 그런 거 같진 않네요.”

차재원 대표는 팍 한숨을 쉬었다.

“좋아, 이제 터놓고 말합시다.”

“바라던 밥니다.”

“그래요, 나 협상하러 왔습니다. 당신 덕분에 죽을 맛이었거든. 그렇잖아도 미아사거리점은 위마트, 필래마트 등쌀에 매출 바닥이던 골칫덩이였습니다. 근데 거기에 할인을 끼얹으니 이건 뭐 짐도 그냥 짐이 아니야.”

“그러시겠죠.”

“그쪽은 내 스타일 잘 간파했어요. 나는 무식하게 이런 짐짝 짊어지고 안 갑니다. 그냥 내다버리지.”

“네, 제발 내다버려주십시오.”

차재원 대표는 눈을 빛냈다.

“근데 그러기엔 자존심이 상해요. 그리고 조 점장 상황도 마냥 좋지만은 않을 거거든? 그쪽도 이 상황 빨리 종결하고 싶잖아요.”

“저희도 적자를 감당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리 미아사거리점 폐점하겠습니다.”

대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다.

차재원 대표는 단서를 달았다.

“단, 그냥은 못 나갑니다. 식품류를 제외한 모든 재고를 필래마트 수유점에서 떠안아주세요.”

차재원 대표는 뼛속까지 이문을 추구하는 장사꾼이었다.

못 버티고 도망치는 와중에도 장사를 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격은?”

“우리가 들여온 원가에 마진율 20퍼센트 얹은 값으로.”

“그건 어렵겠습니다. 저희 창고도 포화상태라서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렇게 할인을 때려대는데 재고가 남을 리가 없잖습니까.”

“아뇨, 포화상탭니다. 어렵습니다.”

대찬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퇴짜를 놨다.

차재원 대표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가격이면 거저예요. 이 제안마저도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나도 오기가 생겨서라도 끝장 볼 겁니다. 직원들은 다시 구하면 그만이고, 진열대는 채우면 그만이야.”

“겨우 재고 때문에 그런 수고를 감수하시겠다고요?”

“자꾸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걸요.”

“뭐 좋다고 제가 대표님을 자극하겠습니까. 하지만 너무 무리한 요구이십니다.”

“아무 소득 없이 매장을 철수하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깁니다. 다른 점포에서도 같은 전술에 당할 수도 있으니까.”

대찬은 찻잔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위마트에 넘기시죠, 재고.”

“…위마트에?”

대찬은 차재원 대표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마트 미아점도 상황이 좋을 리가 없거든요.”

“그렇겠지. 당신의 그 미친 전략에 동참해서 적자는 적자대로 보고, 지금 점장을 교체하고 가격을 복구시켰다지만 파리만 날리는 상황이니까요.”

“위마트 미아점이 재고를 받아줄 겁니다, 기꺼이. 더군다나 필래마트 수유점보다 위마트 미아점이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하고 더 가깝잖습니까. 어떻게 보면 그쪽이 가장 큰 수혜자거든요.”

대찬의 말에 차재원 대표는 피식 웃었다.

“그쪽에서도 뺀찌 놓으면? 나만 새 되란 거요?”

“아뇨. 저희 측에서도 충분히 분담하겠습니다, 신선식품.”

“신선식품……?”

“예. 품질 문제 때문에 재고처리에 있어 신선식품이 훨씬 까다롭습니다. 저희가 신선식품의 재고를 전량 처리할 테니, 위마트 쪽에는 그 외의 재고를 처리해달라고 제안하면 받아들일 겁니다.”

“으음…….”

“대표님은 신선식품 외의 재고만 제안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매장의 모든 재고를 소진하게 되니, 업하우스로서는 훨씬 만족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왜 굳이 신선식품 재고를 떠안으려는 겁니까?”

“그건 대표님께서 신경 쓰실 문제는 아닙니다.”

차재원 대표는 피식 웃었다.

“뭐, 그렇지.”

차재원 대표는 잠깐 머뭇거리다 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찬도 웃으면서 내민 손을 꽉 잡았다.

협상은 타결되었다.

차재원 대표는 즉시 위마트에 재고처리를 요구했다.

위마트는 처음에 난색을 표했다.

왜 남의 회사에 와서 재고처리를 요구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고를 떠안지 않으면 이 출혈경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차재원 대표의 강경한 발언과, 필래마트가 신선식품을 떠안는다는 귀띔을 듣고 요구를 수락했다.

대형할인점 3사가 박 터지는 경쟁을 벌였던 수유와 미아 일대의 할인전쟁은 이것으로 종결되었다.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은 빠르게 철수했다.

대신 재고처리에 대한 부담을 덜어냈다.

이로써 일대의 소비자를 3등분으로 나눠 가졌던 구도가 위마트와 필래마트가 양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골칫거리가 하나 남았다.

표성재 부점장이 오만상을 지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저 많은 먹을거리들을 어떻게 하실 작정이에요? 냉동창고가 감당 못할 거예요!”

“부점장, 그래도 저거 보면 마음이 뭔가 든든해지지 않아요? 와, 혼자서는 평생 다 먹지도 못할 양이네.”

“그렇게 여유 부리실 때가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신선식품은 조금만 방치해도 금방 음식물쓰레기가 돼버립니다.”

“걱정 마세요, 이번 주말까지 다 소진할 거니까.”

“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공짜로 나눠주지 않는 이상!”

“공짜에 준하는 수준으로 나눠줄 거예요.”

그 말에 표성재 부점장이 펄쩍 뛰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급히 전단지 만들어서 주변 아파트 단지에 좍 뿌리세요. 점장이 대가리에 총 맞아서 거의 공짜로 나눠준다고. 돼지고기며 생선이며 채소며.”

“저, 점장님!”

대찬은 웃으면서 부연했다.

“단, 거의 공짜 수준의 이 할인에는 조건이 있어요.”

“조, 조건이요?”

“네. 필래마트 회원적립카드를 만들 것.”

“아……!”

그제야 표성재 부점장도 감을 잡았다.

“업하우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으니, 업하우스를 이용하던 고객들을 최대한 많이 끌어들여야 합니다. 우리 점포보다 위마트 미아점이 업하우스에서 더 가까우니, 그냥 손 놓고 있으면 위마트만 쾌재를 부르겠죠.”

“그래서 신선식품으로 고객들을 끌어들이시려는 거군요.”

“네. 일단 고객들은 잡아두면 잘 떠나지 않습니다. 특히 알뜰살뜰한 주부님들은요. 마지막 출혈입니다. 빠르게 움직여주세요.”

“알겠습니다, 점장님.”

표성재 부점장은 지금까지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신속하게 움직였다.

급히 전단지를 만들어 주거지역에 마구잡이로 뿌려댔다.

대찬은 매장 전 직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지금까지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쟁 같은 몇 달을 보냈습니다. 버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노력은 노력대로 하고 적자는 적자대로 보는 상황에 불만이 잔뜩 쌓였던 직원들이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점장이 저렇게 예의를 차리니 미운 마음이 적잖이 누그러졌다.

대찬은 이어 말했다.

“이번 주말까지만 고생해주십시오. 그 후부터는 일상적인 업무가 계속될 겁니다. 살인적인 업무에 내몬 점, 점장으로서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대찬이 예고한 대로 주말은 지금까지의 고된 노동을 장난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 만큼 고됐다.

전단지를 보고 일대의 주부들이 총집결했다.

특히 ‘가격복구 전 마지막 세일’이라는 문구가 그들의 발걸음을 필래마트 수유점으로 이끌었다.

필래마트의 그 넓은 매장에 인파들이 꽉 차는 건 물론이고, 그 앞에 장사진을 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개판이어서 일일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질서유지 요원들이 진땀을 뺐다.

대찬 역시 팔을 걷어붙이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표성재 부점장이 자기가 하겠다며, 대찬에게는 쉬시라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직원들을 중노동 현장으로 내몰아놓고 점장은 집에서 쉬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더군다나 표성재 부점장에게 그런 중임을 맡길 정도로 신뢰가 가지도 않았다.

이날의 영업은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관건은 헐값에 신선식품을 사는 손님들에게 회원적립카드를 발급하는 일이었다.

까다로운 과정이 한 가지 추가되었기 때문에 반감을 드러내는 손님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카드를 발급하느라 계산이 더뎌져 손님들이 제대로 순환되지 않았다.

대찬은 양치기 개처럼 계산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뛰어다니며 일을 해결했다.

“아이, 나 빨리 가봐야 한다니까! 카드 줄 거면 빨리빨리 줘!”

그렇게 투정을 부리는 손님한테 대찬이 쪼르르 달려갔다.

“손님, 제가 얼른 발급해드리겠습니다. 급하시면 매장 나가시면서 말씀하세요.”

“그래요. 그게 낫겠네.”

대찬은 성큼성큼 걷는 손님의 보조를 맞췄다.

그 와중에 한 손에는 한 보따리 두둑한 삼겹살을 대신 들어주었다.

“어머니, 성함하고 연락처 말씀해주시고요, 주소 알려주시면 우편으로 카드 보내드릴게요.”

“이름은 이순애고, 연락처는 010…….”

“감사합니다. 신청되셨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매장 많이 이용해주세요.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젊은 양반이 싹싹하니 좋네. 진즉 그럴 것이지. 점장은 뭐 한대요? 이런 직원 보너스나 챙겨주지.”

“하하…….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업하우스에서 받아온 신선식품은 빠르게 동나기 시작했다.

가장 값비싼 한우는 개시 10분 만에 동나버렸다.

1인당 구매액수를 제한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물론 팔릴수록 당장은 적자였지만 미래의 고객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과정이었다.

세일 대상으로 준비된 신선식품은 주말 이틀 사이에 모두 소진되었다.

이 기간, 필래마트 수유점의 회원적립카드를 새로 신청한 사람은 총 5,500명이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한 사람들이 필래마트 수유점의 꾸준한 고객으로 남아줄 것이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직원들은 완전히 탈진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