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80화
대찬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저희 역시 지점 차원에서 발주하는 상품들 중 매출이 좋은 것들을 위마트 미아점과 공동으로 구매하겠습니다.”
“음…….”
위마트 점장은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아무리 지점 차원의 발주만 공동구매한다고 해도 부담이 따랐다.
대찬이야 독립적인 권한을 쥔 특수한 입장이라지만, 위마트 점장은 그렇지 않았다.
본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제휴는 보통 사업분야가 다른 업체 간에 이뤄진다.
동종업계의 경쟁업체와 납품라인을 일원화하는 건 사례를 찾기 힘들었다.
대찬도 그의 고민을 이해했다.
“자칫하면 본사의 눈총을 받을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문제죠. 만약 결과가 미진하면 저는 이대로 끝입니다.”
“하지만 성공하면, 점장님은 확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위마트 점장은 대찬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렇긴 하지만…….”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이 폐점되는 순간, 과실은 점장님께 돌아갑니다. 매출 꺾은선 그래프가 직각으로 치솟을 겁니다. 걸어볼 만한 싸움입니다.”
틀린 진단이 아니었다.
이 모험으로 위마트 미아점은 필래마트 수유점보다 더 큰 이득을 누릴 것이다.
위마트 점장은 연신 침만 삼켰다.
“이미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은 우리가 아니더라도 매출이 부진한 상황입니다. 우리가 슬쩍 등만 떠밀면 그대로 낭떠러지 밑으로 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 일 아닙니까?”
“아뇨. 저희는 이미 포문을 열었잖습니까.”
위마트 점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아직 안 열었는데.”
“아, 그래서 계속 안 여시려고요? 그럼 공멸입니다.”
위마트 점장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대찬은 제휴를 더 구걸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위마트 점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같이하시죠, 점장님.”
위마트 점장은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대찬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부디 조 점장님 생각이 옳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대찬은 씩 미소를 지었다.
그날부로 필래마트 수유점과 위마트 미아점은 지점 단위의 제휴를 맺었다.
위마트 미아점은 마치 번지점프를 하듯 눈을 질끈 감고 대대적인 할인에 들어갔다.
미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가격을 소비자들은 당연히 쌍수 들고 환영했다.
근방의 주민들은 물론, 냄새를 맡은 소비자들이 원정까지 와서 필래마트와 위마트를 털어갔다.
허운은 높은 사무실에서 매장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건 뭐, 전쟁통에 사재기하는 것 같네.”
“더하지.”
“저게 팔리면 팔릴수록 우린 적자라 이거잖아?”
대찬은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웃었다.
“어마어마한 적자지. 업하우스 상황은 어떻대?”
“파리만 날리지, 뭐.”
“좋아.”
대찬은 주말의 명동거리처럼 매장을 꽉 메운 인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단 계획대로 흘러가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안이 가시지는 않았다.
현실은 항상 이론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대찬의 이론은 차재원 대표의 이력을 기반으로 했다.
지금까지 이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는 막연한 추측이었다.
학술용어로는 경로의존성.
하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이었다.
칠면조에게 매일 먹이를 주던 주인이 크리스마스에는 칠면조를 잡아 죽이는 법.
자신이 크리스마스의 칠면조가 아니기를, 대찬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불안 반, 기대 반으로 매장을 내려다보던 대찬에게 김산호가 다가왔다.
“점장님, 전화 왔습니다.”
“어디서?”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 점장이라는데요.”
“아, 없다고 해.”
“알겠습니다.”
위마트와 필래마트가 동반 할인을 시작하자마자 전화가 왔다.
최소한의 여유도 부리지 못할 만큼 다급하다는 뜻이었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대대적인 할인은 한 달 이상 이어졌다.
그동안 엄청난 적자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한 달이 지나자 필래마트 수유점은 다시 전국 필래마트 지점 중에서 매출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냥 최하위가 아니라 창사 이래 최대의 적자였다.
지점장회의에서 김태준 사장은 눈알이 뒤집혀서 꽥꽥 소리를 질렀다.
흥분한 나머지 서류를 대찬의 면전에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야! 너! 미쳤어!”
“…….”
대찬은 고개를 푹 숙였다.
김태준 사장은 광분한 고릴라처럼 날뛰었다.
“꼴도 보기 싫어! 회의 끝날 때까지 나가있어!”
“알겠습니다.”
대찬은 풀 죽은 표정을 하고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바로 옆에 앉아있던, 만년꼴등 가양점 점장이 살짝 손을 잡아주었다.
“이거 안타까워서 어째?”
“뭘요. 이번 달은 저희 지점이 쿠션 해드렸으니까 다음에 소주 한잔 사주세요.”
“아이구, 이 상황에 술타령은. 얼른 나가봐. 사장님 명패 날아올라.”
대찬은 싱긋 웃으며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그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무료하게 밖에서 대기했다.
회의가 끝나고 점장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들은 대찬을 한 번씩 흘끔거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더러는 동정의 시선이고, 더러는 조롱의 시선이었다.
가양점 점장은 다시 한 번 대찬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나갔다.
동병상련이었다.
점장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김태준 사장이 걸어나왔다.
그러고는 대찬의 어깨를 툭툭 털며 격의 없이 말했다.
“내가 너무 오버했나?”
“다른 점장님들이 절 비 맞은 똥개처럼 불쌍히 여기시는 걸로 봐서는 연기 잘하신 것 같습니다.”
“쯧, 그냥 잠자코 하던 일이나 했으면 이런 연극 안 해도 되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 후회하던 참입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김태준 사장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어쨌든 이왕 시작했으니 결실은 꼭 봐야 해.”
“예, 그래야죠. 아니면 책임지고 사표 내야 하는 걸요.”
“사표로 될 거 같아? 민사소송 걸 거야.”
“아이고…….”
김태준 사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밥이나 먹고 가.”
“알겠습니다, 사장님.”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근처의 식당으로 이끌었다.
식사가 나오기 전, 대찬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말했다.
“상황은 좀 어때?”
“나쁘지 않습니다.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업하우스 점장한테 항의전화가 왔습니다.”
“뭐라던가?”
대찬은 웃으며 대답했다.
“안 받았습니다.”
“또라이!”
김태준은 비식비식 웃더니 이내 폭소했다.
김태준 사장은 그것으로 됐다는 듯 한창 식사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대찬을 향해 말했다.
“조 점장이 가진 가장 큰 무기가 뭔 줄 알아?”
“뭡니까?”
대찬은 답을 짐작했지만 공을 김태준 사장에게 넘겼다.
김태준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사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다는 거야.”
“맞습니다. 전폭적인 신뢰가 없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못했겠죠.”
“차재원은 감이 좋은 사람이야. 생각보다 점포를 빨리 뺄 수도 있어.”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픽 웃으며 먹던 것을 마저 먹었다.
김태준 사장은 이 자리에서 대찬을 향한 신뢰를 다시 한 번 확인해주었다.
점포의 명운을 걸고 치킨게임에 뛰어든 대찬에게는 더없이 든든했다.
차재원 대표가 생각보다 점포를 빨리 뺄 수도 있다던 김태준 사장의 말은 빗나갔다.
김산호는 대찬에게 비보를 알려왔다.
“점장님,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도 대대적인 할인에 들어갔답니다.”
“…뭐?”
대찬은 당혹했다.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 점장의 단독결정은 아닐 것이다.
‘설마 차재원 대표가 이 치킨게임에 동참하겠다고 나선 건가……?’
이해할 수 없었다.
김태준 사장이 진득하게 밀어붙이는 전술에 차재원 대표로서는 1초라도 빨리 발을 빼는 편이 옳았다.
그런데 도리어 이 미친 할인전쟁에 동참하겠다니.
대찬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밀조밀 모인 대형마트들이 일제히 미친 할인에 들어갔다.
이건 강북구민과 강북구청장만 헤벌레 입을 벌릴 일이었다.
이미 발을 들인 이상 관둘 수 없다.
대찬은 차재원이 던진 뜻밖의 변화구에 입술을 악물었다.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은 한 달 이상 할인을 유지했다.
이것으로 두 달째.
대찬이 쏘아올린 작은 공은 강북구의 생활물가를 전국 최저로 낮추는 동시에 대형할인점 3사에 막대한 적자를 야기했다.
이쯤 되니 김태준 사장의 견고하던 신뢰도 슬슬 흔들렸다.
툭하면 대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거 괜찮겠어? 차재원이가 예상하고 다르게 움직이는데?”
“네. 확실히 예상 밖이긴 합니다.”
“차재원이한테 언제 이런 곤조가 생겼지? 허허, 참.”
“상황을 빨리 종식시킬 방법을 찾겠습니다.”
“그러는 편이 좋겠어. 안 되겠다 싶으면 빨리 철수하는 것도 방법이야. 자네하고 내 체면을 구기긴 하겠지만.”
전화를 끊고 대찬은 한동안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할인전쟁 세 달째.
직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고통을 호소했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며 일을 그만두는 매장 직원들도 더러 있었다.
게다가 위마트 미아점 점장이 교체되었다.
미친 할인에 동참한 죄를 물어 미아점 점장은 좌천되었다.
위마트 미아점은 적자 할인을 종료하겠다고 선언했다.
동맹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최악이군.”
이쯤 되니 대찬 역시 슬슬 전의를 상실해갔다.
괜한 욕심으로 애써 쌓아올린 것마저 무너뜨린 건 아닌지 괴로웠다.
머리를 싸쥐고 있을 때, 뜻밖의 소식이 닿았다.
김산호가 대찬에게 보고했다.
“점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이라니?”
“제가 요즘 업하우스 매장으로 출근하잖아요.”
“응.”
김산호는 대찬의 지시로 매일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으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그곳의 동향을 살피고 실시간으로 대찬에게 보고했다.
“요새 수상한 동향이 감지됐습니다.”
“수상한 동향이라니?”
“하루아침에 매장 직원을 10명 넘게 내보냈다는데요.”
대찬의 귀가 쫑긋했다.
“확실한 정보야?”
“예. 나간 직원들 이름을 알아보고 매장에서 찾아봤는데 진짜 없더라고요.”
“일 잘하네, 김 대리.”
“아무렴요, 누구 동생인데요.”
대찬이 웃으며 말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차 대표는 매장을 철수할 생각을 갖고 있단 거네.”
“네. 실제로도 다 팔린 진열대를 빈 채로 두는 곳도 있었어요.”
“그렇단 말이지…….”
정황은 확실했다.
대찬은 드디어 이 밑 빠진 독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주 금요일, 허운이 점장실로 들어왔다.
“점장님.”
“커피 다 떨어졌어. 돌아가.”
“아니, 커피가 아니고 대단한 손님이 왔는데?”
그 말에 대찬은 허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단한 손님? 누구?”
“차재원 대표가 왔어요.”
대찬의 동공이 커졌다.
“뭐? 그 양반이 왜? 날 보러 왔대?”
“…아뇨. 그건 아니고 처자식 데리고 카트 끄는 거 보니까 쇼핑하러 온 모양인데요.”
“쇼핑?”
대찬은 피식 웃었다.
기가 막혔다.
‘허세 부리기는.’
대찬은 이미 김산호를 통해 업하우스 미아사거리점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슬슬 발을 빼는 와중에 차재원 대표가 직접 필래마트 수유점에 와서 시위를 한다.
허장성세일 뿐이었다.
허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 나가보십니까?”
“내가 왜? 차 대표는 그냥 쇼핑하러 왔다며.”
차재원을 만나러 나갈 이유가 없다.
그게 대찬의 결론이었다.
차재원 대표가 필래마트 수유점을 찾아온 목적은 둘 중 하나.
조롱하러 왔거나, 협상하러 왔거나.
조롱하러 왔다면 일부러 면전에서 조롱당할 이유가 없다.
협상하러 왔다면 먼저 나가 숙이고 들어갈 이유가 없다.
둘 중 가능성이 높은 쪽은 후자였다.
겉으로는 여유만만이지만, 속으로는 줄행랑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