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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77화 (176/556)

난 할 수 있어 177화

모두들 구면인 듯 나누는 인사에 격의가 없었다.

“이런 일 아니면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사모님은 잘 계시죠? 저번에 소개해주신 레스토랑에서 가족끼리 식사 맛있게 했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와이프한테 점수 땄어요.”

“하하, 그렇습니까. 사모님 입맛이 역시 고급이시라 그런지 뭘 좀 아시는군요. 웬만한 미식가 아니면 입맛에 잘 안 맞는다고 그러던데.”

“그럼요. 저희 와이프가 다른 건 사치 안 부려도 먹는 데는 돈 안 아끼거든요. 다음에도 슬쩍 귀띔해주십시오.”

“예예, 물론이죠.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아, 이쪽은 우리 서원웅 전략기획실장. 회장님 작은아드님입니다.”

“오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해뜰녘 방태열 대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서원웅 실장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해뜰녘은 두부, 콩나물, 장류를 생산하는 중견기업이었다.

기업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안전한 이미지 덕에 전도가 유망했다.

김태준 사장은 자연스레 서원웅과 방태열 해뜰녘 대표의 안면을 트게 해주었다.

둘은 명함을 교환했다.

이렇게 안면을 트고 골프를 치고 술도 몇 잔 나누면서 서원웅은 자연스레 유통업계에 이름을 알리게 될 터였다.

“그런데 이분은……?”

방태열 대표는 대찬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김태준 사장은 서원웅에게 그랬듯 대찬을 자신의 앞에 내세웠다.

“우리 조대찬 점장. 앞으로 우리 회사의 중임을 맡을 인재입니다.”

“점장……?”

방태열 대표는 잠깐 갸웃거리더니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그 미친 또라이!”

“예……?”

대찬은 어안이 벙벙했다.

방태열 대표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 미안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좋은 뜻이니까. 조 점장 명성이 워낙 업계에 자자해서.”

“제가… 말입니까?”

“입사할 때부터 좌충우돌하면서 필래마트를 여기까지 끌고 온 장본인이라고 들었어요.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연예인 보는 거 같네.”

“전 일개 직원일 뿐인데… 알아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일개 직원이라고 수그리기엔 너무 사고를 많이 치셨어요.”

“하하…….”

대찬은 곤란한 듯 웃었다.

방태열 대표는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며 대찬에게 속닥거렸다.

“협력업체 빼돌려서 위마트, 업하우스 뒤통수 후릴 때는 속이 다 시원했어요. 우리도 그 두 회사한테 앙금이 좀 심하게 있거든.”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방태열 대표는 흐뭇하게 웃으며 대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김태준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은 식사 안 하셔도 든든하시겠습니다. 이렇게 젊은 인재 둘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필래마트의 미래가 아주 밝습니다.”

“그럼요. 이 두 사람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더 큰 중임을 수행하게 될 겁니다.”

“서 실장이 회장님의 뒤를 이을 수도 있다는 풍문이 돌던데, 사실입니까?”

“아직 후계를 논할 단계는 아닙니다만,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죠.”

“오호라, 그렇군요.”

김태준 사장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아마 이 소문은 방태열 사장의 입을 타고 암암리에 퍼질 것이다.

서승학의 명성은 서원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업계에 파다했다.

좋지 않은 일로 구설수에 자주 오르기도 했지만, 그건 대중에게 서승학이 필래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 암시하기도 했다.

반면에 서원웅은 이제 갓 상무급으로 승진한 풋내기였다.

김태준 사장은 그의 우군으로서 어떻게든 업계 요인들에게 그를 알리고자 했다.

회의장은 사교장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김태준 사장에게 얼굴도장을 찍은 방태열 대표는 이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준비를 했다.

“아무튼 필래마트의 건승을 빕니다. 저희 해뜰녘도 필래마트의 파트너로 오래 일하고 싶군요.”

“예. 해뜰녘도 날로 번창하시길 빕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방태열 대표는 비즈니스용 미소를 짓고는 자리를 떴다.

그는 누군가에게로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김태준 사장은 그 누군가를 바로 알아봤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업하우스 대빵이군.”

“아, 저분이…….”

김태준 사장의 말에 대찬은 그쪽을 건너다봤다.

업하우스의 대표는 자주 바뀌는 편이었다.

모기업인 외국계 기업 옥세트는 업하우스의 대표이사에 전문경영인을 앉혔다.

철저히 오너 일가의 측근을 기용하는 필래마트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전문경영인 제도는 철저한 성과주의라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CEO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단기간에 성과를 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진득하게 밀고 가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 집착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특히 옥세트는 참을성이 없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새로운 CEO가 부임하기 직전에도 1년 만에 사람이 갈린 터였다.

대찬은 그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새로 부임한 업하우스 대표의 얼굴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재원, 저 녀석이라면 내가 잘 알지.”

“어떻게 아십니까?”

“업하우스로 오기 전에 뱅킷레신저 코리아 사장으로 있었거든.”

“아, 그 세제랑 연료 만드는 회사요.”

“그래. 내가 필래물류에 있을 때 뱅킷레신저 제품을 맡아서 수입했는데, 저쪽 한국법인이 들어오면서 이래저래 처리할 일이 있었어. 그래서 저 사람하고도 만날 일 좀 있었지.”

“어떤 사람인가요?”

“드러나는 성과는 좋은 사람이야.”

서원웅이 웃으면서 물어봤다.

“드러나지 않는 성과도 있나요?”

“드러나지 않는 병폐가 있지. 뱅킷레신저에서도 그랬어. 예쁜 숫자를 위해 그 무엇도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이야. 뱅킷레신저 사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한국공장 3개를 폐쇄하고 다 중국으로 이전해버렸어. 순식간에 공장 노동자들 전부 백수돼버렸지.”

서원웅이 다시 물었다.

“국내 인건비가 비싸서 중국이나 다른 개발도상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건 흔한 일 아닙니까?”

대찬은 서원웅을 흘끗 바라봤다.

의외의 질문이었다.

서원웅은 대찬보다도 더 온정적인 사람이었다.

‘점점 경영인답게 변하고 있구나.’

경영인답다는 건 좋지만도, 나쁘지만도 않은 말이었다.

회사의 이익만 생각하는 경영자는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대찬은 그 평가는 보류하되, 서원웅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지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거야. 노조와 충분히 타협하고 순차적으로 공장을 폐쇄했어야지. 한국에서 장사를 한다는 놈들이 단칼에 한국인 노동자를 대량해고한다? 그건 무식한 방법이야.”

“그럼에도 당장 드러나는 성과를 위해서 감행했다는 거죠?”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사는 성과를 페이퍼로만 판단하니까. 노사분규나 브랜드 이미지 악화, 그런 자질구레한 건 페이퍼엔 안 담기거든. 인건비 대폭 감소, 유동자금 증가, 그것만 보이지.”

김태준 사장과 서원웅이 차재원 업하우스 대표에 대해 얘기하는 사이, 방태열 대표와 인사를 나눈 차재원 대표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째진 눈매에 튀어나온 광대, 빼빼마른 몸.

차재원 대표는 척 봐도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김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업하우스 대표로 부임하셨다고요. 부임하시자마자 코다 대표도 맡으시고, 이거 바쁘게 되셨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경쟁상대가 김 사장님이라니 운이 없어도 단단히 없지 뭡니까.”

차재원 대표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모쪼록 잘해봅시다. 경쟁관계이긴 하지만, 동시에 동종업계의 아픔과 고민을 공유하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하시기엔 너무 생태계를 교란시켜놓으셨더군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위마트와 저희 회사 협력업체를 선동해서 그쪽으로 데려가셨잖습니까. 저도 보는 눈 있고 듣는 귀가 있는데.”

김태준 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선동이라니, 당치 않군요. 시장논리에 따라 적법하게 처리했을 뿐입니다.”

“김 사장님은 예나 지금이나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잘하신다니까요. 아, 칭찬입니다.”

“별말씀을.”

대찬은 김태준 사장의 귀가 붉게 달아오르는 걸 봤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차재원 대표의 도발에 단단히 밸이 꼴리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재원 대표가 멀찍이 사라지자 김태준 사장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수 없는 새끼.”

대찬은 멀리서 재잘재잘 인사말을 떠드는 차재원 대표를 잠자코 바라봤다.

수유점으로 돌아온 대찬은 한동안 점장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하루에 다섯 번은 족히 매장을 둘러보고, 그걸로도 부족해서 주변 경쟁 매장을 돌아보는 점장이었다.

점장이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걸까.

직원들은 점장실의 굳게 닫힌 문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그들의 불안감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대찬의 관심은 차재원 대표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차재원 대표에 대한 최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잡지건 신문이건 인터넷이건 닥치는 대로 모았다.

그리고 뱅킷레신저를 포함해 차재원 대표가 CEO로 근무했던 회사들의 발자취를 살폈다.

종일 차재원 대표만 독파한 대찬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김태준 사장 말 그대로야.”

차재원 대표는 업하우스 CEO가 되기 전, 뱅킷레신저를 포함해 4개 회사의 CEO를 역임했다.

4개의 회사에서의 영업방침은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뱅킷레신저에서 취임하자마자 공장을 폐쇄하고 중국으로 이전했듯, 첫 CEO 커리어를 시작했던 한 아울렛 체인에서도 가장 먼저 세일 앤 리스백(sale and lease back)을 통해 입점업체를 일체 물갈이한 전력이 있었다.

세일 앤 리스백은 갖고 있는 매장을 리스회사에 처분하고, 그곳에 다시 세입자로 입주하는 걸 뜻한다.

차재원 대표는 그렇게 함으로써 일시에 유동자산을 확보,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사업에 다시 투자했다.

매장의 소유권이 리스회사로 넘어가면서 그곳에 입주했던 식당, 카페, 카센터, 영세입점업체 등은 일제히 퇴거조치 당했다.

연후 차재원 대표는 매출이 부진한 점포를 매각했다.

단기간에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마친 다음에 공격적으로 사업에 돌입했다.

아울렛 체인에서 나온 후 대형 카페 프랜차이즈의 대표를 역임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먼저 무분별하게 이뤄졌던 출점을 제한하고 실적이 부진한 매장에 일제히 재계약불가 의사를 통보했다.

그렇기에 차재원 대표가 CEO로 있던 회사들과 얽힌 노동자, 영세사업자들은 차재원 대표를 악마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살에 이른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이런 부작용에 대해 차재원 대표는 사과는커녕 유감조차 표하지 않았다.

자신은 합법적으로 경영효율성을 추구했을 뿐이라는 게 그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업하우스에서도 비슷한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높겠지…….”

업하우스 역시 덩치는 커졌지만 매출이 부진한 점포들이 많았다.

위마트와 경쟁구도를 형성하면서 공격적인 출점을 한 결과였다.

자신만의 전략으로 재미를 봤던 차재원 대표는 이번에도 같은 패턴으로 나올 확률이 컸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있었다.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어.”

차재원 대표는 7년 전, 미국의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버거칸의 한국법인 대표를 역임했다.

버거칸에서는 그가 나머지 3개 회사의 대표를 역임할 때와는 다소 결이 다른 전략을 구사했다.

무인판매기를 도입하고, 조리과정에서 자동화를 최대한 추구하는 등 근로자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건 나머지 3개 회사와 같았다.

하지만 나머지 3개 회사의 대표를 역임하던 때처럼 대대적인 점포 철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부임한 첫해와 다음 해에는 점포의 숫자가 증가했다.

“버거칸에서는 왜 그런 거지?”

대찬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더 품을 팔아 자료를 수집했다.

자료들을 모아놓고 대찬은 한참을 씨름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답을 얻었다.

“알아냈다.”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무의식적으로 업무노트에 날카로운 필치로 몇 글자를 적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허운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대찬은 싱겁게 웃으며 물었다.

“왜, 또 점장실 커피 생각나서 온 거야?”

“아니. 오늘따라 방에 콕 박혀서 통 안 나오시길래, 생존 확인차 왔지요. 야동이라도 보고 계셨나?”

“야동은 허운 과장님이나 보시겠죠. 저는 굳이 모니터 속 여인네들이 필요 없는 처지라.”

“아, 진짜! 나도 채경이 있거든.”

허운이 꽥 소리 지르는데도 대찬은 덤덤히 말했다.

“생존 확인했으면 그만 본인 자리로 돌아가지.”

“겸사겸사 커피라도 한잔하고요. 한잔하실래요?”

대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허운은 능숙하게 커피 두 잔을 탔다.

허운은 대찬의 책상으로 다가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려놨다.

“저 없으면 커피도 못 타 드세요? 올 때마다 커피믹스 개수가 그대로인 거 같아.”

“누구랑 다르게 바빠서 커피 마실 짬도 안 나네.”

“부하직원 갈구고 싶거든 좀 그럴듯한 명분을 찾아봐요.”

대찬은 허운과의 무의미한 입씨름이 지겨워졌다.

“아니, 영업팀장이면 매장에 발붙일 시간이 없어야 정상 아닌가? 이런 식이면 인사고과 진짜 재미없게 나온다.”

“점장실에 얼굴 비칠 때 빼고는 열심히 밖으로 뽈뽈 쏘다니고 있습니다요. 영업 쪽에서 빵꾸 난 적 없잖아요. 음? 뭐야, 이게?”

허운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고 대찬의 책상 위에 놓인 업무노트를 봤다.

그러고는 노트에 적힌 글자를 발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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