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73화
덤덤한 반응에 표성재 부점장도 어떻게 나가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예?”
“그렇게 하시라고요.”
“정말… 입니까?”
대찬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맘대로 하세요. 징계위원회도 좋고, 노조랑 연대해서 파업해도 좋아요. 맘대로 하십시오.”
“…….”
“왜, 내가 애걸복걸할 줄 알았습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지금 부점장 이하 관리자들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 저는 이런 빌어먹을 수작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
표성재 부점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본사 윤리경영팀이요? 지금 거기선 실적 부진한 매장에 벌점 부과하는 방안 고민하고 있어요.”
“…….”
“노조요? 노조원 대부분이 실무자인 거 아시죠? 실무자한테 인센티브 나눠주기 싫다는 사람하고 연대할까 싶네요.”
“…….”
“지금 날 끈 떨어진 뒤웅박 취급해서 축구공처럼 이리 차면 이리 굴러가고 저리 차면 저리 굴러갈 줄 아나본데, 단단히 착각하셨습니다.”
대찬은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표성재 부점장은 이제 정신이 혼미해졌다.
‘좆됐다.’
그는 직감했다.
“부점장.”
대찬이 싸늘하게 부르자 표성재 부점장은 바짝 군기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네엣.”
“누가 부추겼습니까?”
“네?”
“부점장이 독단으로 결정한 건 아닐 테죠. 누굽니까, 부점장더러 나 들이받으라고 한 사람이.”
“…최선태 과장입니다.”
표성재 부점장은 그걸 또 곧이곧대로 일러바쳤다.
의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간이 작아도 너무 작다.
대찬은 실소가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알겠습니다. 나가보세요.”
“…네.”
표성재 부점장이 나가자마자 대찬은 최선태 과장을 불렀다.
최선태 과장은 대찬이 자신이 부른 이유를 직감했다.
물렁하게 굴면 도리어 더 당하고 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점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목을 뻣뻣이 폈다.
“부르셨습니까.”
“네. 최선태 과장, 다음 정기인사 때 필래 인 마켓 울릉점으로 발령 날 겁니다.”
“…예?”
“방금 들은 그대로예요.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울릉도로 가라고요?”
최선태 과장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네.”
“무슨 권리로 그러십니까?”
“저한테는 권리 없죠. 인사팀에 그렇게 건의할 겁니다.”
“하, 이거 부당전보예요. 아세요?”
“부당전보요? 글쎄요……. 아닐걸요?”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십니까?”
최선태 과장은 당장이라도 대찬의 아래턱을 가격할 듯 으르렁거렸다.
“종전업무와 상이한 직무로 보내는 경우, 정기인사가 아닌 홀로 인사배치를 받는 경우, 정당한 생활여건을 마련해주지 않는 경우, 회사의 업무효율에 정면으로 배치하는 경우, 사전 상의가 없을 경우.”
“…….”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되어야 부당전보죠.”
“그런데요.”
“그런데 종전업무와 상이하지 않고, 정기인사철에 발령 날 거고, 울릉도에 사택 마련해줄 거고, 업무효율에 정면으로 배치하지 않으니 이건 부당전보가 아닙니다. 아, 사전 상의는 지금 드리고 있고요?”
최선태 과장은 코웃음을 쳤다.
“제가 울릉도로 가라면 얌전히 갈 거 같습니까?”
“얌전히 가지 마세요. 요란하게 가세요. 아니면 퇴사하시든가.”
“진짜 이따위로 나올 거야!”
최선태 과장은 이판사판 버럭 반말로 고함을 질렀다.
대찬은 머리를 쓸면서 분을 한 김 식히고 응수했다.
“얻다 대고 반말 찍찍 싸대. 할 말 없으면 꺼져. 고소하든 파업하든 네 법대로 하고.”
“이런 씨…….”
최선태 과장은 점장실에서 물러나 본사에 항의했다.
하지만 본사는 최선태 과장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어떠한 요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선태 과장은 동료들에게 이걸 호소했지만, 동료들은 그의 편에 서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은 무소불위의 점장 앞에 무력하다는 사실만 통렬하게 깨달았다.
최선태 과장은 완전히 쪼그라졌다.
이걸로 점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관리자 직원들은 없게 되었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허운이 우려했다.
“너무 세게 조이시는 거 아닙니까?”
“사또가 처음 부임해서 이방 안 조지고 시작하면 멱살 잡히고 끌려 다녀.”
“그래도 너무 심하게 조지는 거 아니에요?”
“백성들 민원은 들어주고, 아전은 개 잡듯이 잡고. 그게 어수룩한 사또가 안 되는 첫 단추야.”
대찬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밀어붙였다.
엉망진창이던 수유점은 대찬이 부임한 지 며칠 만에 조금은 구색이 갖춰졌다.
당장의 기적적인 매출신장은 없었다.
하지만 대찬은 매장을 돌아보면서 분명한 변화를 느꼈다.
고객을 응대하는 직원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직원들은 점장이 시도 때도 없이 매장을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근무를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큰 동기였다.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보는 눈이 없다고 하면 아무래도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보는 눈이 있다고 하면 성인군자가 아니면서도 성인군자 노릇을 한다.
그게 사람이었다.
대찬의 지시에 따른 공격적인 할인전략도 주효했다.
이러나저러나 고객들이 가장 신봉하는 건 가격이었다.
대찬은 생활용품과 냉동식품 재고목록을 받고 매출 하위 30퍼센트에 해당하는 제품들에 온통 가위표를 쳤다.
그러고는 목록을 표성재 부점장에게 넘겼다.
최선태 과장이 대찬에게 KO 당한 이후로 표성재 본부장은 대찬에게 협조적이었다.
“이 제품들 전부 50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팔고 더 납품받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물갈이해주세요. 빠지는 업체만큼 새로운 업체를 물색해서 진열대를 채우세요. 직접 업체도 방문해보고 제품도 써보고 하면서 신중하게 결정해주세요.”
“예, 점장님.”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에게만 맡겨두지 않았다.
신뢰가 안 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몸소 발품을 팔았다.
연일 품절 대란을 일으키는 청명식품의 치즈듬뿍 돈가스를, 장승필 사장과의 안면으로 가장 우선적으로 재입고 받았다.
그의 이웃한 가게이자 이제는 필래마트의 협력업체인 스파이시닭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찬은 비단 제품에만 신경 쓰지 않았다.
수유점에는 적지 않은 부대시설이 딸려 있었다.
대찬은 그 부대시설들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찬은 주로 표성재 부점장, 허운 과장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좋으나 싫으나 수유점의 선장과 부선장, 그리고 항해사였다.
끊임없는 의견교류는 필수였다.
그리고 점심시간은 의견교류의 장으로 삼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대찬이 먼저 제안했다.
“오늘 점심은 푸드코트에서 하시죠.”
“예? 같은 값이면 밖에 식당이 훨씬 낫습니다.”
표성재 부점장의 말에 대찬은 절로 쓴웃음이 번졌다.
부점장도 안 먹는 푸드코트를 누가 와서 먹겠나.
이제 이런 표성재 부점장의 어이없는 발언에 익숙해진 대찬은 허탈하게 웃기만 했다.
점심시간에 찾은 푸드코트는 파리만 날렸다.
입점해 있는 식당 네 곳의 종업원들은 모두 한숨만 푹푹 쉬었다.
“돈가스, 중국집, 한식, 분식. 종류는 딱 적당한데…….”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을 보며 물었다.
“뭐 드실 겁니까?”
“짜장 먹지요.”
“유산슬밥 드세요.”
“예? …예.”
푸드코트의 중국식당에는 별의별 음식이 다 있었다.
이런 소규모 사업장에서 취급하기엔 비효율적인 유산슬밥까지 갖추고 있었다.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에게 그걸 권했다.
그러고는 허운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음, 너무 고민되는데요. 메뉴가 워낙 많아서. 그럼 저도 유산슬밥이나 먹어볼까요.”
“허 과장은 임연수어구이 정식 드세요.”
“그렇게 짚어줄 거면 뭐 하러 물어보십니까?”
“혹시 임연수어 먹나 해서.”
대찬은 싱겁게 웃고는 말했다.
“저는 눈꽃치즈돈가스 먹겠습니다. 냉모밀 딸린 세트로.”
대찬이 지정한 메뉴 3개는 모두 일반적이지 않은 종류였다.
부러 그런 음식들만 고른 까닭이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대찬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표성재 부점장은 풀죽에 가까운 유산슬밥을 뜨며 난색을 표했다.
“여물 같네요.”
임연수어구이를 한 점 떼어 맛본 허운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비린내가 너무 심한데요.”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눈꽃치즈가 아니라 진눈깨비치즈라고 해야 할 판이야. 질척거리고 군내 나. 차라리 우리 매장 치즈듬뿍 돈가스 튀겨 먹고 말겠다.”
결국 셋 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표성재 부점장은 거 보라는 듯 대찬에게 툴툴거렸다.
“그러게 밖에서 식사하자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하.”
대찬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부점장, 내가 왜 굳이 푸드코트 와서 먹자고 한 줄 알아요?”
“밖에 나가기 귀찮으셔서……?”
대찬은 잡소리를 지껄이는 표성재 부점장의 얼빠진 얼굴을 뭉개주고 싶었다.
속으로 분을 꾹 삭였다.
“푸드코트는 그 자체로도 매출이 발생하지만, 고객이 매장에 머무는 시간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푸드코트 맛이 좋으면 식사 후에도 쇼핑을 계속하죠. 맛이 없다면 그 반대고요.”
“…….”
“부점장은 푸드코트 맛이 형편없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요?”
“…….”
“푸드코트는 맛이 없으니 밖에 나가 먹자고요?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죄송합니다.”
대찬은 자신보다 7살이나 더 많은 이 사람을 구구단 외는 아이처럼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부점장까지 단 거야?’
미스터리였다.
인격모독의 소지가 있는 생각은 말로 하지 않고 생각으로 그쳤다.
“손님 없을 때 푸드코트 사업자분들 좀 점장실로 모셔주세요.”
“…네.”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 좀 짓지 마시고요.”
대찬은 점장실로 돌아가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러다 성격 완전히 버리겠네.’
푸드코트의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들이 점장실로 모였다.
대찬은 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주력 메뉴 5개만 추려서 운영하는 게 어떨까요?”
“예? 그건 너무 적은데…….”
여물 같은 유산슬밥을 만들었던 중국집 사장이었다.
“사장님, 혹시 본인 가게에서 나온 유산슬밥 드셔 보셨습니까?”
“…손님 드실 건데 제가 먹진 않죠.”
“아니, 그래도……!”
‘손님한테 주기 전에 최소한 무슨 맛이 나는지는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대찬은 간신히 억눌렀다.
그는 분노를 목구멍 뒤로 삼키고 다시 말했다.
“물론 제가 사장님보다 중국음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손님 자격으로 식사했습니다. 솔직히 유산슬밥은 못 먹을 정도였습니다.”
“입맛이 까다로우신가…….”
“아뇨. 그냥 맛이 없었다고요.”
“우리 마누라는 맛있다던데.”
“맛있으면 손님들이 많이 오겠죠.”
“…그거야 원체 수유점에 손님이 없어서 그런 걸…….”
중국집 사장의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아유, 뵈기 싫어.’
대찬은 억지로 시선을 그쪽으로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짜장, 짬뽕, 볶음밥, 탕수육, 깐풍기. 여기서 식사하시는 손님들 중에 90퍼센트는 이걸 벗어나지 않습니다. 유산슬 만드는 데 해삼, 죽순, 표고 들어가죠. 만드는 과정도 까다롭고요.”
“예.”
“저 다섯 메뉴 중에 해삼, 죽순, 표고 들어가는 음식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사장님은 잘 팔리지도 않는 유산슬밥 때문에 해삼, 죽순, 표고를 사셔야 합니다. 잘 안 팔리니까 냉장고에 오래 머물겠죠. 당연히 안 신선하겠죠.”
“그러겠죠.”
“그럼 메뉴에서 빼는 게 올바른 판단 아닐까요?”
또 입술만 쭉 내밀고 말이 없다.
대찬은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돈가스집 사장님도 마찬가집니다. 메뉴 간소화하시고요. 한식집 사장님, 생선 관리하기 어려우면 그냥 생선구이를 메뉴에서 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들은 대찬의 앞에선 알았다고는 했지만 즉각 이행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