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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71화 (170/556)

난 할 수 있어 171화

대찬은 인사발령공고를 모니터에 띄우고 멍한 시선으로 한참 바라봤다.

전략기획실의 모든 직원들도 대찬과 같은 자세였다.

“이, 이게 뭐야……?”

허운은 아연실색했다.

봄버스를 낚아챈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이다.

그런 와중에 난데없는 인사발령이라니.

대찬은 말없이 일어나 옥상으로 갔다.

허운이 그를 쫓아갔다.

대찬의 태도는 덤덤했다.

“조대찬, 왜 이렇게 천하태평이야? 미리 알고 있었어?”

“응. 근데 허 대리하고 우리 김 주임까지 도매금으로 묶일 줄은 몰랐네.”

대찬은 담배를 물며 대꾸했다.

“너 윗선에 밉보인 거 있냐?”

“형이 아는 거 말고는 더 없어. 왜 내 탓이라고만 생각해?”

“그럼 내 탓이겠니? 죽은 듯 잠자코 일만 하는 내 탓이겠어? 너 때문이니까 김산호까지 엮여 들어간 거 아냐.”

“그건 그래.”

대찬이 마른 웃음을 짓는 것과 같은 박자로 담배연기가 뿜어졌다.

“하, 미치겠네, 진짜.”

허운도 어지간히 답답한지 담배를 한껏 빨아들였다가 매캐한 연기를 훅 토했다.

대찬은 픽 웃었다.

“왜, 그래도 승진이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본사하고 지점이 같아? 본사 대리나 지점 과장이나 똔똔이야. 게다가 수유점으로 가라잖아! 매출 바닥! 폐점 1순위!”

“아유, 그렇게 싫으면 사표 쓰고 다른 데 알아보시든가.”

대찬의 매몰찬 말에 허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응? 너도 높으신 분들이랑 놀더니 물든 거야?”

“나도 수유행 열차 탔거든요? 자기 혼자만 수유 가는 줄 아나봐.”

대찬은 담배를 비벼 끄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허운은 거푸 2개비를 더 피웠다.

사무실로 돌아가니 서원웅이 출근해 있었다.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역력했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인사를 건넸다.

“실장님, 출근하셨네요.”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회장님한테 말씀드려야겠어.”

“뭐라고요?”

“이건 부당대우야. 본사 차장으로 승진시키는 것도 모자랄 판에 지점으로, 그것도 수유점에다 발령 내는 게 말이 돼?”

“회장님이 그 말씀 들으면, 네가 맞다 하면서 저를 도로 본사에 들여놓으실 거 같아요?”

“그건……!”

서원웅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하직원 하나에 연연하냐고 실장님을 다그칠 겁니다. 저한테 미운털 박히는 건 덤이고요. 아무 말씀 마세요.”

그는 웃으면서 서원웅의 팔을 잡았다.

“그래도 명색이 승진이잖아요. 허운, 김산호, 나름 사단도 만들어주고 사대문 밖으로 안 쫓아낸 걸 보니 문책성은 아닌 거 같습니다.”

“네가 뭘 했다고 문책이야.”

대찬은 서원웅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수유점 매출 1등으로 만들고 컴백홈 할 테니까 기대해.”

“속도 좋다.”

서원웅은 한숨을 쉬었다.

‘좋기는…… 나도 긴장 많이 된다고.’

대찬은 서원웅을 등지면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김태준 사장은 떠나는 대찬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어쨌거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잘해 봐. 위기이자 기회야.”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유점 상황 개판인 거 조 과장도 들어서 알 거야. 이렇게 된 마당이긴 하지만, 실은 나도 수유점에 극약처방 좀 하고 싶던 차였어.”

“믿고 도와주십시오. 잘 해내겠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유점만큼은 본사에서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을 거야. 조 과장, 아니 조 점장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김태준 사장 입장에서는 꽃놀이패였다.

어차피 폐점을 고민하던 수유점이었다.

잘되면 대찬을 치켜세워 주면 그만이다.

안 되면 어차피 폐점할 지점이었다고 자위하면 된다.

그의 속내를 잘 알았지만 대찬에게도 반가운 방침이었다.

대찬은 사장실을 내려오자마자 미련 없이 짐을 쌌다.

그길로 수유점으로 향했다.

허운이 그를 따랐다.

김산호는 칠월칠석 견우직녀처럼 오다혜를 꼭 끌어안고 헤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허운이 김산호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수유는 그야말로 대형 마트의 각축장이었다.

반경 3킬로미터 안에 필래마트, 위마트, 업하우스 3대 업체가 모두 들어서 있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위마트가 터줏대감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업하우스 역시 7층 규모를 앞세워 위마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반면, 출점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필래마트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대찬이 수유점에 도착한 시간에도 파리만 날리는 참이었다.

소식은 수유점 직원들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대찬이 허운과 김산호를 거느리고 수유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직원들이 일제히 대찬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점장님.”

도열한 직원들 중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그의 뒤에 늘어선 직원들도 목청을 높였다.

“어서 오십시오, 점장님!”

“아, 예…….”

대찬은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았다.

우렁찬 환영인사에 몇 안 되는 손님들이 이쪽을 흘끗 바라봤다.

“부점장 표성재입니다.”

“네. 환영인사가 시끌벅적하네요.”

“새로운 점장님이 오시는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표성재 부점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말의 의도를 완벽히 잘못 짚고 있었다.

대찬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었다.

“지금 근무시간 아닙니까?”

“예에?”

갑자기 달라진 기류에 표성재 부점장은 어깨를 움츠렸다.

대찬은 무작위로 직원 한 명을 지목했다.

“그쪽, 담당파트가 어딥니까?”

지목당한 직원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추, 축산파트입니다.”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죄, 죄송합니다!”

척 봐도 앳돼 보이는 인상이었다.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을 바라봤다.

“자발적으로 나왔을 리는 없고 부점장님이 시키셨을 텐데,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게… 점장님이 새로 오시기도 했고, 그래서…….”

“점장 새로 왔다고 여기 쪼르르 몰려들 있으면, 손님은 누가 상대합니까?”

“필수인력은 남겨뒀습니다만…….”

“아, 그럼 여기 계신 분들은 필수인력이 아닙니까?”

“…….”

표성재 부점장이 입을 다물자 대찬은 도열한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각자 위치로 돌아가세요.”

“넵!”

직원들은 썰물처럼 제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대찬은 표성재 부점장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흘렸다.

“부점장은 지금 바로 점장실로 와서 수유점 현황 브리핑하세요.”

“지, 지금 말씀입니까?”

“왜요, 안 됩니까?”

“그게… PPT도 준비해야 하고…….”

대찬은 미간을 좁혔다.

“PPT는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나만 볼 겁니다. 허례허식 빼고 핵심만 간결하게 설명하시면 됩니다.”

“그, 그래도…….”

“PPT 없으면 브리핑이 안 됩니까? 그랬으면 바로 준비를 했어야죠. 첫날부터 헤헤거리면서 술부터 따를 줄 알았습니까? 따라와요.”

“…….”

대찬은 따갑게 쏘고는 성큼성큼 점장실로 걸어갔다.

표성재 부점장은 뒤 마려운 강아지 표정을 하고 뒤따라갔다.

둘만 남은 허운과 김산호는 혀를 내둘렀다.

“뭐야, 조대찬 왜 저렇게 찬바람 쌩쌩이야?”

“형님이 저러시는 거 처음 봤어요…….”

“김 대리도 조심해. 여기서 형님, 형님 했다가는 단칼에 모가지 날아갈 거 같으니까.”

“과장님도 조대찬이라고 부르면 안 될 거 같은데요…….”

허운과 김산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점장실엔 대찬과 표성재 부점장만 자리했다.

표성재 부점장은 수유점 현황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당점 저번 달 매출은 22억에 영업손실은 4천만 원입니다.”

“그건 지지난달이죠. 저번 달 매출은 18억 4천만 원에 영업손실은 8천2백만 원이었습니다.”

“…….”

“저번 달이 이번 달인 줄 알았다기엔 오늘이 벌써 24일이네요.”

“죄송합니다.”

표성재 부점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어려운 거 여쭤봤습니까? 매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그게, 그런 부분은 주로 이전 점장님이 맡으셨기 때문에…….”

“지금 장난합니까?”

대찬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

표성재 부점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부점장은 어떤 부분을 맡고 계십니까? 예?”

“죄송합니다…….”

“수유점 매출 부진에 부점장님도 한몫 단단히 하신 것 같군요. 나가보세요.”

대찬의 말에는 잔뜩 날이 서있었다.

표성재 부점장은 점장실을 나가고 나서야 똑바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고는 점장실의 닫힌 문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씨발, 나이도 어린 새끼가…….”

“어어, 부점장님, 언어생활이 터프하시네요.”

마침 점장실로 들어가려던 허운에게 딱 걸렸다.

표성재 부점장의 눈이 호두만 해졌다.

간은 콩알만 해졌다.

허운은 실실 웃으면서 표성재 부점장을 지나쳐 갔다.

“점장님한테 일러야징.”

“자, 잠깐……!”

표성재 부점장이 붙잡기도 전에 허운이 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입 가볍기로는 따를 자가 없는 허운이었다.

“씨발, 나이도 어린 새끼가!”

“뭐, 뭐야, 형!”

대뜸 욕을 얻어먹은 대찬이 화들짝 놀랐다.

허운은 웃음을 흘렸다.

“…라고 부점장님이 그러시던데요, 점장님.”

대찬은 어이없다는 듯 허운을 바라봤다.

열린 문틈으로 표성재 부점장이 보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에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수유점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비단 위마트와 업하우스의 탓만 할 게 아니었다.

수유점도 충분히 조건이 좋았다.

2년밖에 안 된 점포는 노후화된 위마트보다 훨씬 세련됐다.

6층 규모의 점포는 업하우스의 덩치에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알맹이는 엉망이었다.

부점장 이하 직원들의 열의나 태도가 기준 이하였다.

다른 직원들의 허물을 잡을 일이 아니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건 만고의 진리였다.

부점장의 머릿속에는 지난달 매출조차 입력돼 있지 않았다.

그런 부점장 밑의 직원들이 성실하기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점장님, 생각보다 심각해요. 진열대가 비어있는 곳도 어림잡아 열 곳은 되고요, 신선식품 가격도 경쟁업체보다 5에서 많게는 10퍼센트는 더 비싸요.”

대찬을 대신해 매장을 둘러본 김산호가 귀띔했다.

“가관이네, 가관이야.”

대찬은 그 즉시 부점장 이하 관리직들을 점장실로 호출했다.

“매장관리가 기준미달입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일을 못하고 있단 뜻입니다. 혹은 제대로 안 하거나.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러니 제가 일일이 무슨 일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겠습니다. 똑바로 해주세요. 지켜볼 겁니다.”

“…예.”

대찬은 그렇게 선언한 후 한동안은 지하주차장부터 6층 문화센터까지 종일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러면서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병폐를 잡아다 즉각 시정했다.

“냉동만두 납품업체 있죠. 저번에 위생불량으로 영업정지 먹은 거 아십니까?”

“…미처 몰랐습니다.”

“지역 커뮤니티에 어떤 분이 글 올렸더군요. 당장 납품 중단하고 다른 업체 물색하세요.”

“알겠습니다.”

“삼겹살은 그 점포 정육가격의 바로미터입니다. 100그램당 가격이 업하우스보다 120원 비싸고, 위마트보다는 190원이나 비쌉니다. 당장 300원 인하하세요.”

“그러면 마진율이…….”

“마진율이 제로가 돼도 내리세요.”

“알겠습니다, 점장님.”

관리자들의 문제도 산적해 있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실무자들도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한 젊은 주부가 정육코너서써 멈춰 직원에게 물었다.

“장조림 하려고 하는데 어느 부위가 좋을까요?”

“이거나 이거요.”

직원은 세상 모든 귀찮음을 떠안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무성의하게 홍두깨살과 우둔살을 가리켰다.

손님은 말만 듣고서는 알 수 없어 그의 손가락을 지켜봐야 했다.

대찬의 뒤를 따르던 김산호가 팍 인상을 구겼다.

“워크에씩이 너무 엉망이에요. 가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줘야겠어요.”

“아니야. 잠깐.”

대찬은 김산호를 막았다.

“왜요? 관리직은 혼을 옴팡 빼놓으시고서는.”

“실무자들은 달라.”

대찬은 못 본 척하고 지나갔다.

그 젊은 주부는 결국 고기를 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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