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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70화 (169/556)

난 할 수 있어 170화

봄버스의 제품이 필래마트 진열대에 올라가자 디저트를 좋아하는 젊은 여성들의 방문이 크게 늘었다.

필래마트의 온라인쇼핑몰인 e필래의 매출도 폭증했다.

주문배송을 위해서는 3만 원 이상의 물품을 주문해야 한다.

봄버스의 디저트를 구입하면서 기타 필요한 물품을 필래를 통해 함께 구입한 까닭이었다.

PB브랜드인 필초이스가 좋은 이미지를 획득하면서 얻어진 기회는 꾸준한 후속조치가 수반돼야 했다.

당장의 매출 폭증은 일시적이었다.

반면에 한국 내 봄버스의 인기를 생각하면 봄버스의 필래마트 입점은 장기적인 호재로 해석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측근인 김왕장을 초대한 식사자리에서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사석에서는 딱딱한 말투를 버렸다.

오랜 질곡의 세월을 함께한 동지면서 같은 집안사람이었다.

“태준아, 네가 사장 되고 나서 승승장구다, 승승장구야.”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똘똘한 녀석이 들어와서는.”

똘똘한 녀석이란 대찬을 의미했다.

“음, 확실히 원웅이한테 큰 도움이 될 친구야.”

“쭉 지켜보니 회장님이 왜 그렇게 그 친구를 핏줄로 꽁꽁 묶어두려고 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내 안목은 확실하다니까.”

서청수와 김태준은 대찬에게 한없이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김왕장 중에 왕과 장의 생각은 달랐다.

장백주 실장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회장님이나 김 사장이나 조금 물러지신 거 아닙니까?”

서청수 회장이 장백주 실장 쪽을 바라봤다.

“물러지다니?”

“저간의 사정을 듣자하니 필래마트 전략기획실은 실질적으로 조 과장이 전권을 휘두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김태준 사장이 장백주 실장의 말을 정정했다.

“어디까지나 결정권은 서원웅 실장한테 있어. 조 과장은 서 실장의 지시를 잘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지 않아. 요즘 상황은 그런 수준을 뛰어넘었어. 나는 서원웅이 조 과장한테 잡아먹힐까 염려스러울 지경이야.”

김태준 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뭐 어쩌자는 거야? 잘하고 있는 사람을 좌천이라도 시켜?”

장백주 실장은 김태준 사장과 더 말하지 않고, 서청수 회장에게 직접 말했다.

“회장님, 필래마트는 이미 본 궤도에 올랐습니다. 조 과장이 없어도 잘 굴러갈 겁니다.”

“없어도 잘 굴러가니까 없애라?”

“이대로 전략기획실을 조대찬이 주도하면 서 실장이 제대로 된 경영수업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보모가 밥을 떠먹여주는 것도 모자라 씹어서 먹여 주기까지 하니 제대로 된 교육이 되겠습니까?”

노골적인 비판에 서청수 회장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야!”

“공로가 분명하니 승진을 시키시죠. 대신 다른 계열사로 발령을 내십시오.”

“이봐, 조대찬이가 병신이야? 그걸 승진으로 받아들일 거 같나? 그 자식도 한 성깔 하는 놈이야. 바로 들이받을걸.”

“일개 과장이 들이받으면 어쩔 겁니까? 바로 잘라버리든지 해야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급니까.”

장백주 실장은 적극적으로 대찬을 견제했다.

“자네 뭐 조대찬이한테 억하심정 있어?”

“어, 억하심정은요, 무슨. 다 서 실장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때 내내 침묵하던 왕윤수 필래제과 고문이 입을 열었다.

“점장으로 보내시죠.”

“음?”

서청수 회장의 시선이 왕윤수 고문에게로 향했다.

“점장은 차장급이잖습니까. 점장으로 보내면 승진이라는 구색도 맞추고, 계열사를 이동하지 않으면서도 조대찬을 서 실장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을 수 있습니다.”

장백주 실장이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그게 좋겠습니다.”

“으음, 이 시점에서 조대찬을 원웅이에게서 떼놓는 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군.”

서청수 회장의 고민에도 왕윤수 고문은 좋은 논리를 갖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그렇게 걱정하시는 것부터가 이미 서 실장이 조대찬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벌여놓은 사업의 과실을 수확할 때입니다. 조대찬을 떼놓지 않으면 사업실적이 모두 조대찬의 공로가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점장으로 발령을 내시죠.”

왕윤수와 장백주의 진언에 서청수 회장은 김태준 사장에게 물었다.

“태준이 자네 생각은 어때?”

“글쎄요. 일개 점장으로 두기에는 좀 아까운데요.”

“지금 조대찬을 가장 잘 써먹을 수 있는 자리를 물어보는 게 아니야. 만약 백주나 윤수 말대로 원웅이가 성장하는 데 조대찬이 걸림돌이 되면 곤란하네.”

“아주 틀린 지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 실장이 조대찬의 의견에 치우쳐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으음, 그런가.”

서청수 회장이 그렇게 가닥을 잡자 왕윤수 고문이 한마디를 더 얹었다.

“김 사장 말대로 일개 점장으로 썩히기 아깝다면, 흥읍점으로 보내시면 안 됩니다.”

“어째서지?”

“흥읍점은 실질적인 필래마트 1호점입니다. 상권도 좋고, 듣자하니 유명한 중식당도 입점해 있어 굳이 조대찬이 아니어도 잘 팔리는 점포죠.”

“그렇지.”

“그럼 매출이 최악으로 나오는 점포라야 조대찬을 보내는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듣자하니 수유점이 애를 많이 먹고 있다던데.”

왕윤수 고문이 운을 띄우자 김태준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유에는 이미 위마트와 업하우스 점포가 있었는데 무리하게 신규출점을 한 부분이 없잖아 있지.”

“그쪽으로 보내시죠.”

“아예 서귀포점으로 보내버리시지.”

장백주 실장은 낮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서청수 회장은 팔짱을 끼고 무거운 신음을 뱉었다.

“으음, 맞는 일인지 모르겠군.”

왕윤수 고문은 은근한 말로 서청수 회장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회장님, 칼끝이 무뎌지셨군요. 고작 이런 일로 고민하십니까.”

“고민은 내가 언제 고민을 했다고 그래! 말을 이상하게 하는군!”

“그러면 속히 결단을 내려주시지요.”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야. 일단 다들 물러가봐.”

“…알겠습니다.”

김태준, 왕윤수, 장백주 세 사람은 서청수 회장의 앞에서 물러났다.

왕윤수 고문은 돌아가는 길에 얼굴을 찡그렸다.

“회장님이 변하셨군.”

“변하다니.”

김태준 사장이 묻자 왕윤수 고문은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아랫사람 쳐 내는 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양반 아닌가. 그런데 고작 과장 하나 때문에 이러시는 건…….”

“그놈이 보통 과장인가. 나도 그놈 데리고 있어봐서 알지만, 황금알 낳는 거위야. 자칫 잘못 다뤘다간 거위 배를 가르게 생겼으니 회장님 판단도 신중할 수밖에.”

이미 대찬에게 악심을 품은 장백주 실장은 그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르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점장으로 발령 내라는 조언에 이렇게 신중하신 건 좀…….”

김태준 사장은 그에게 눈을 흘겼다.

“지금 회장님 판단을 불신하는 건가?”

“부, 불신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거지!”

김태준 사장은 장백주 실장에게 눈을 흘기고 자리를 떴다.

장백주 실장은 자신과 왕윤수 고문, 둘만 남은 자리에서 경멸조로 말했다.

“김태준 그 자식, 밸도 없나? 지금 그 솜털 난 애새끼 감싸고도는 거 봤어?”

“태준이의 문제만은 아니야. 회장님도 많이 무뎌지셨어.”

“도대체가 서원웅이면 몰라도 그 시종밖에 안 되는 녀석한테 왜 이리 쩔쩔매는지!”

왕윤수 고문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저력이 있는 녀석이었어.”

김태준 사장이 차를 타고 자택으로 돌아가는 중에, 서청수 회장이 전화를 걸었다.

김태준 사장은 얼른 받았다.

“네, 회장님.”

“솔직히 얘기해봐.”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조대찬, 수유점 점장으로 보내는 게 맞다고 보나?”

김태준 사장은 잠깐의 침묵 후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무책임한 말이군.”

“솔직하게 말씀하라고 하시기에…….”

서청수 회장은 얕은 숨을 뱉었다.

“고작 과장 하나에 이러느냐고 하지만, 그 녀석도 고작 과장이 감당해야 할 것 이상으로 감당했어.”

“옳은 말씀이십니다.”

“나는 그 녀석을 단순히 내 아들 뒤나 닦아주는 도구로 생각하지 않아. 원웅이만큼은 아니지만 그놈도 키울 가치가 있단 말이야.”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하지만 윤수나 백주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고.”

“그럼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 말인가.”

“조대찬에게 선택하게 하십시오.”

서청수 회장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대찬이 선택하게 하라?”

“예.”

“…그래, 그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맺으려는데, 서청수 회장이 물었다.

“태준아, 내가 지금 약해진 거냐?”

“원래 나이 드시면 좀 부드러워지셔야 합니다. 잘하고 계십니다.”

“…그래.”

다음 날,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사장실로 불렀다.

사장실에 불려가서 좋았던 기억이 없는 대찬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사장님.”

“어, 조대찬이. 앉아. 커피 줄까?”

그 말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랑 달리 호의를 베푸시는 걸 보니 안 좋은 일이군요.”

“너는 그 삐딱선 타는 버릇부터 고쳐야 돼.”

“고치겠습니다.”

“네 예측이 틀리진 않았어.”

“역시.”

김태준 사장과 대찬은 서로를 보며 가벼운 웃음을 교환했다.

김태준 사장은 친히 커피를 타서 대찬의 앞에 내려놓았다.

대찬은 그게 사약처럼 느껴졌다.

자리에 앉은 김태준 사장이 말했다.

“중언부언 안 하고 딱 본론만 얘기하지.”

“예, 각오하고 있습니다.”

“자네를 수유점 점장으로 보낼까 해.”

그 말에 대찬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점장이요?”

“그래. 차장으로 승진하는 셈이야. 하지만 마냥 좋은 일은 아니지. 수유점 사정은 자네도 들어서 알 거 아니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택권을 주려는 거야. 갈지, 말지. 어떤 걸 선택하든 뒤탈은 없을 거야.”

“뒤탈이 없다면 당연히 여기 남는 걸 선택하겠습니다, 만.”

“만?”

대찬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갑자기 이 제안을 하시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걸 말씀해주십시오. 듣고 싶습니다.”

“음, 그러니까…….”

김태준 사장은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

어설프게 거짓으로 둘러대봤자 저 여우새끼한테 들켜버리란 걸 알고 있었다.

사정을 들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떡하겠나.”

“저를 수유점 점장으로 보내주십시오.”

“어째서 선택을 바꿨지?”

“일단 왕 고문님, 장 실장님 생각에 동의해요.”

“동의한다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서원웅 부실장을 가리고 있다는 생각을 저도 하고는 있었어요. 그게 제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요.”

“겨우 그 이유뿐인가?”

대찬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저를 수유점으로 내동댕이치면 알아서 찌그러질 거라는 그 생각, 그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직접 증명하겠습니다. 오만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도리어 그분들이 오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고 일갈했을 김태준 사장이었다.

하지만 대찬의 말에 일언반구도 보태지 못했다.

수유점으로의 발령은 대찬도 자청할 정도는 아니지만,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윗선에서 서원웅이 대찬이 있기 때문에 못 큰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대찬은 그 반대도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대찬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과실은 서원웅에게 돌아갔다.

그게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서원웅이 없었으면 그저 망상으로 지나지 않았을 생각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이 있었다.

하지만 대찬도 사람인 이상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대찬을 서원웅의 바짓가랑이에 붙은 밥풀처럼 요행히 출세했다고 보는 시선도 파다했다.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수유점을 직접 멱살을 쥐고 끌어올린다면?

이 평가는 불식될 것이다.

그러니 대찬에게도 마냥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물론 이는 대찬이 잘 해낸다는 전제가 있을 때 성립한다.

‘난 할 수 있어.’

대찬은 이를 악물었다.

-인사발령공고

아래와 같이 인사발령 사항을 공고합니다.

전략기획실 과장 조대찬 : 필래마트 수유점 점장(차장급)

전략기획실 대리 허 운 : 필래마트 수유점 영업팀장(과장급)

전략기획실 주임 김산호 : 필래마트 수유점 농산물파트 매니저(대리급)

하루아침에 전략기획실 인원의 절반이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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