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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69화 (168/556)

난 할 수 있어 169화

마이크 햇치는 능숙하게 주민들과 일문일답을 나누고 있었다.

“제 시간에 맞춰서 왔네. 다행이야.”

“죽는 줄 알았어. 후보님은 미팅 끝나고 나서 뵐 수 있는 거지?”

“음, 아마 아닐걸?”

“뭐?”

대찬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유진은 웃으면서 대찬의 팔을 두드렸다.

“조금만 기다려봐. 너한테도 더 좋은 일일 테니까.”

대찬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미네소타의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던 마이크 햇치는 연설에 돌입했다.

그는 프로 정치인답게 능숙한 솜씨로 연설을 이어나갔다.

흡입력 있는 연설이었지만 미국 국민도, 미네소타 주민도 아닌 대찬에게는 말 그대로 먼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려는데 마이크 햇치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여러분, 2006년 주지사 선거를 기억하십니까?”

주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당시 공화당은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네소타를 찾아온 이민자를 박해했습니다. 외국인을 몰아내자고 했습니다.”

공화당 얘기가 나오자 민주당원인 주민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미네소타 대학교에 공부하러 왔던 한 한국인 대학생이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린치를 당했습니다.”

‘뭐야, 내 얘기잖아?’

대찬은 뜬금없이 나온 얘기에 눈을 깜빡거렸다.

“바로 그 학생이, 오늘 이 자리를 찾았습니다. 대찬 초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그러자 주민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대찬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유진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올라가!”

대찬은 반사적으로 연단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젠장! 이런 여우같은 인간들.’

대찬은 그제야 유진이 자신을 덜루스로 부른 까닭을 눈치 챘다.

유진의 제안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대찬을 선거에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하기야 만날 사람이 산더미 같은데 아무리 옛날의 인연이 있다지만 덜컥 후보를 만나도록 다리를 놔줄 상황이 아니었다.

대찬이 연단에 오르자 마이크 햇치는 그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대찬은 엉겁결에 꾸벅, 주민들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박수 소리가 더 커졌다.

소리가 잦아들자 마이크 햇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네소타의 교환학생이었던 초는 한국 대기업의 직원이 됐습니다. 회사 역사 이래 최연소 과장이죠.”

최연소 과장은 아니었다.

이 정도 거짓말이야 정치인에겐 숨쉬기보다 쉬웠다.

“그리고 초는 다시 미네소타에 왔습니다. 우리 미네소타의 자랑인 봄버스의 제품을 한국으로 수입하기 위해서죠.”

“어……?”

어떻게 알았지.

대찬은 얼떨떨했다.

마이크 햇치는 잔뜩 고조된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미네소타가 길러낸 인재가 미네소타의 경제를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와아아!”

“공화당의 말대로 이민자를 핍박하고 외국인을 내쫓았으면 가능했겠습니까!”

“노오우!”

“미네소타를 모두가 사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저를 상원으로 보내주시겠습니까!”

“예에이!”

동향 사람인 덜루스의 주민들은 마이크 햇치의 장단을 기가 막히게 맞춰주었다.

마이크 햇치는 대찬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는 넘기는 순간에 마이크의 스위치를 끄고 속삭였다.

“분위기 좀 띄워 봐요.”

마이크를 넘겨받은 대찬은 스위치를 켜고 입을 갖다 댔다.

“덜루스의 주민 여러분, 미네소타의 유권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미네소타의 우수한 교육 여건이 저를 키웠습니다! 저는 미네소타의 상품을 수입하러 왔습니다. 오늘의 이 거래가 작은 보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찬의 힘 있는 목소리에 주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마이크 햇치를 상원으로 보내주십시오!”

“Hatch for senate(햇치를 상원으로)! Hatch for senate! Hatch for senate!”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주민들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고, 마이크 햇치는 대찬의 손을 잡고 번쩍 위로 들었다.

유진은 대찬의 퍼포먼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하게 웃었다.

대찬은 타운홀 미팅 이후 마이크 햇치의 선거캠프까지 그와 동행했다.

고단한 몸을 쉬게 하느라 여념이 없는 시간이지만, 마이크 햇치는 기꺼이 대찬에게 그 시간을 할애했다.

타운홀 미팅에서 잘 써먹었으니 이 정도 배려는 당연했다.

“제가 봄버스 제품을 수입하러 온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왜 모르겠어요. 봄버스는 내 가장 강력한 후원자 중에 한 곳입니다. 내가 여러 민원을 해결해주는데, 듣자하니 최근 한국 대형마트 체인 중 한 곳에 독점공급하겠다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마침 당신이 한국의 대형마트 체인에 근무한다기에 잠깐 알아보니 딱 맞췄더군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경쟁에 뛰어들긴 했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다른 업체들은 벌써 봄버스와 협상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마이크 햇치는 대찬을 보며 피식 웃었다.

“미스터 초, 이 게임은 이미 당신이 이겼어요.”

“네?”

마이크 햇치는 어딘가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알렉스, 마이크예요. 오늘 타운홀 미팅 한 거 봤어요? 예. 그 한국 청년하고 인연이 두텁죠. 아마 곧 알렉스하고도 인연이 두터워질 거 같은데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대찬은 긴장 속에서 마이크 햇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깐 상대방의 말을 듣던 마이크 햇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알렉스는 척하면 척이군요. 부탁합니다. 아마 돌아갈 보답은 그보다 작지는 않을 겁니다.”

마이크 햇치는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대찬이 그에게 물었다.

“알렉스라면…….”

“알렉스 러셀, 봄버스 대표예요. 필래에 제품을 독점적으로 공급하겠다는군요.”

대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후보님!”

“마냥 나한테만 감사할 거 없어요. 봄버스가 한국시장 진출을 앞두고 이슈를 검토했는데, 필래마트의 이미지가 가장 좋았다더군요. 봄버스는 이미 필래를 파트너로 점찍어놓고 있었어요.”

“그래도 후보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렇게 알아주신다면 저로서는 고마울 뿐이죠. 이미 주민들 앞에서 미스터 초가 미네소타의 상품을 수입해간다고 해놨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면 제 체면이 뭐가 됩니까?”

대찬과 마이크 햇치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피차 일정이 바빠 대찬은 덜루스에서 1박도 하지 않고 다시 미니애폴리스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새벽 비행기에서 김산호가 잔뜩 대찬을 치켜세웠다.

“형님, 진짜 인맥 한번 대단하시네요. 미국 상원의원하고 친구 먹는 사람일 줄이야!”

“아직 후보야. 친구라고 할 정도도 아니고…….”

“낙선한다고 해도 전직 주지사인 거잖아요? 오 마이 갓, 언빌리버블!”

김산호의 호들갑에 대찬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일이 잘 풀렸어.”

“근데 햇치는 봄버스가 처음부터 우리랑 계약하려고 했다는데, 그랬으면 왜 이렇게 비싸게 굴었을까요? 우리 쪽에서 담당자까지 교체하게 만들면서요.”

“그래야 우리가 웃돈을 얹어서 모셔오려고 할 테니까.”

대찬은 비즈니스의 간단한 이치를 깨우쳐주었다.

다음 날, 대찬은 이른 아침에 눈코 뜰 새도 없이 봄버스 본사를 방문했다.

커피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얘기가 끝났다.

봄버스는 한국으로 수출하는 모든 제품을 필래마트에 독점공급하기로 결정했다.

대찬은 기분 좋게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봄버스 측 담당자의 손을 맞잡았다.

대찬이 웃으면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한국에서 봄버스의 매출이 최대한으로 보장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 미네소타와의 또 다른 인연을 맺으셨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BOMBANCE X 필래마트

봄버스가 한국에 온다! 필래마트가 함께합니다.

필래마트는 모든 마케팅 역량을 봄버스에 투입했다.

필초이스의 도약으로 잔뜩 오른 분위기를 봄버스를 통해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대찬과 김산호는 귀국 다음 날 바로 출근했다.

나흘간 한국과 미네소타를 오갔다.

미네소타에 있는 와중에도 미니애폴리스와 덜루스를 오갔다.

중첩된 피로에 시차적응까지 되지 않아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다.

대찬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사옥 입구에서 출입카드를 찍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조 과장님 오고 계십니다!”

빠끔 고개를 내민 채 바깥을 주시하던 유채경이 직원들에게 소곤거리며 알렸다.

그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찬이 오기만을 주시했다.

대찬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무기력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

침.

대찬이 아침인사를 미처 끝내기도 전이었다.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게릴라부대처럼 일제히 벌떡 일어났다.

대찬은 당황해서 본능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뭐, 뭐예요…….”

“조 과장님, 축하드립니다!”

펑!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동시에 축하용 폭죽을 터트렸다.

형형색색의 색종이가 사무실 허공에 뿌려졌다.

그들은 웃으면서 우르르 대찬에게 몰려와 그를 부둥켜안았다.

“조 과장님, 진짜 잘하셨어요!”

“대단해!”

“봄버스 사러 위마트 갈 뻔했는데 다행이에요!”

부스스한 머리에 색종이를 뒤집어쓴 대찬이 허탈하게 웃었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대요.”

“아직 안 끝났거든요!”

서원웅이 그렇게 외치며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를 그대로 대찬의 얼굴에 꼬라박았다.

“으읍!”

케이크를 꼬라박고도 한참을 대찬의 얼굴에 대고 뭉갰다.

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대찬을 보고 직원들은 배를 부여잡고 낄낄거렸다.

그 와중에 홍은주만 무표정으로 다가와 수건을 내밀었다.

대찬은 피식피식 마른 웃음을 지으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뭐야, 진짜…….”

툴툴거리긴 했지만 마냥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회의실 책상에는 봄버스에서 들여온 가지각색의 디저트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봄버스의 노예라고 해도 좋을 유채경이 더 못 참겠다는 듯 그쪽으로 몰려갔다.

평소 디저트와 친하지 않던 한태윤 과장도 티라미수를 한술 떠서 먹더니 눈이 커졌다.

“봄버스는 진짜 다르네.”

“그죠?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차원이.”

유채경은 쉼 없이 입에 봄버스를 욱여넣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한태윤 과장도 동감하며 티라미수 하나를 도로 포장했다.

“이건 우리 와이프 갖다줄 거니까 건들지 마요.”

“알았어요! 사모님도 진짜 좋아하실 거예요.”

김산호가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님, 아, 아니, 과장님도 하나 챙기세요. 안 갖다주면 저희 누나 삐쳐요.”

“괜찮아. 필요 없어.”

“엥? 후회하세요, 그러다.”

“됐다니까. 많이들 드세요. 저는 하도 먹어서 입에서 단내 날 거 같아요.”

대찬은 퇴근 후 김산하를 만났다.

면세점에서 산 향수와 함께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향수고, 이건 뭐야?”

“봄버스에서 제일 비싼 치즈케이크야. 누나 치즈 좋아하잖아.”

대찬은 미리 김산하를 위한 것쯤은 빼돌려놓은 터였다.

“아, 정말? 고마워! 봄버스 치즈케이크 진짜 맛있는데.”

“얼른 먹어. 나도 먹어보니까 달고 맛있더라.”

대찬이 플라스틱 포크를 건넸다.

그런데 김산하는 곧바로 치즈케이크로 돌진하지 않았다.

대찬이 멀뚱히 김산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안 먹어?”

“더 맛있는 거 먼저 먹고.”

김산하는 그대로 대찬에게 달려들어 키스했다.

차 안이라 보는 사람도 없었다.

둘은 먹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도록 진하게, 그리고 오래 키스했다.

11월 6일.

미국에서는 선거가 치러졌다.

미국 국민은 예상한 대로 버락 오바마를 재선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이크 햇치 미네소타 주지사는 6년 임기의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마이크 햇치에게, 대찬은 오바마보다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

며칠 후, 대찬의 우편함에 국제우편이 발송되었다.

마이크 햇치 이름으로 된 짧은 편지였다.

모처럼 신경을 썼는지 편지는 한국어로 작성되었다.

-조대찬 님, 당신은 내 두 번의 선거를 도와주었습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에는 워싱턴으로 오십시오. 훌륭한 식당을 알아놓겠습니다. -진심을 다하여, 미 상원의원 마이크 햇치.

대찬은 미소를 머금으며 편지를 읽고는, 6년 전 그에게 받은 감사패 옆에 꽂아두었다.

편지에 적힌 주소로 정성스레 답장을 써서 보냈다.

과연 햇치 상원의원에게까지 전달됐을는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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