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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68화 (167/556)

난 할 수 있어 168화

“중요한 일이긴 하니까 보내시면 가긴 할게요. 근데 왜 하필 저예요?”

“봄버스 본사가 어디 있는 줄 알아?”

봄버스는 불어로 요란한 술잔치라는 뜻이었다.

대찬은 거기에 착안해서 대답했다.

“파리에 있겠지.”

“아니. 미네소타에 있어.”

대찬의 눈이 커졌다.

“아니, 근데 왜 불어로 이름을 짓고 난리야.”

“장충동 족발이 장충동에만 있는 게 아니잖아.”

“미네소타에서 교환학생 했다고 절 보내시겠다는 거예요?”

“응.”

“서원웅 실장님은 미네소타 안 가셨습니까?”

서원웅도 대찬과 마찬가지로 미네소타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었다.

“명색이 부서장인데 출장으로 오래 자리 비울 순 없잖아.”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대찬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알았어요. 출장 다녀올게요.”

“해외출장 공식짝꿍 김산호 붙여줄게.”

대찬은 피식 웃었다.

“심심하진 않겠네요.”

“바로 내일 출발해. 3시 반 비행기야. 티켓은 예약해뒀어, 비즈니스로.”

“예예, 알겠습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미국 출장이 결정되었다.

대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터덜터덜 김산하의 차로 돌아왔다.

김산하는 운전대에 얼굴을 박고 잠깐 졸던 중이었다.

대찬이 들어오자 그녀가 얼굴을 운전대에 댄 채로 고개만 모로 기울였다.

“서원웅이 뭐래?”

“내일 미네소타로 가라네. 산호도 같이 가기로 했어. 3시 반 비행기.”

“뭐야, 해외출장을 무슨 전날 알려줘?”

“방금 결정된 모양이야. 봄버스를 독점으로 들여오려고 경쟁 중인데, 지금 담당자가 영 시원치 않나봐.”

“봄버스? 한국에 봄버스 들어온대?”

봄버스 얘기가 나오자 졸음기 가득하던 김산하의 눈빛이 확 밝아졌다.

그런 김산하를 보고 대찬은 피식 웃었다.

“누나 반응 보니까 봄버스 꼭 우리 쪽으로 데려와야겠다.”

“응. 위마트한테 뺏기면 나 위마트 자주 갈 거 같거든. 3시 반 비행기라고?”

“응.”

“오랜만에 인천 짠물 냄새나 맡으러 갈까?”

“지금?”

“응, 지금.”

대찬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누나 출근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아프다고 반차 내지, 뭐.”

“그렇게 막무가내로 해도 안 잘려?”

“누님이 일을 좀 많이 잘하거든. 가자, 인천으로.”

김산하는 대찬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사이드브레이크를 풀었다.

그리고 곧장 인천으로 향했다.

가을의 밤은 쌀쌀했다.

대찬과 김산하는 을왕리 해변으로 갔다.

담요 하나를 같이 두른 채 검은 바다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밤 12시까지 하는 조개구이집에서 배를 채웠다. 기분 좋을 정도로 취기가 올랐다.

김산하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하며 말했다.

“찬 기운 맞으니까 담배 피우고 싶네.”

“오랜만에 한 대 피워.”

대찬은 자신의 담뱃갑을 내밀었다.

김산하는 고개를 저었다.

“이왕 끊은 거 쭉 안 피워야지. 너나 한 대 피워라. 간접흡연이나 하자.”

“피우면 피우고 말면 말지, 무슨 간접흡연을 하겠대.”

대찬은 어이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둘은 예정에도 없이 인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칼국수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김산하는 대찬을 공항까지 배웅해줬다.

공항 리무진을 타고 빠듯하게 도착한 김산호는 누나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와, 누나 이런 모습 처음 본다. 나 면접 늦었다고 난리 칠 때도 안 태워주더니!”

“아니꼬우면 차 있는 여자 사귀시든지.”

김산하는 친동생을 냉대했다.

대찬이 웃으면서 김산호에게 말했다.

“원래 누나는 다 그런 거야. 우리 친누나도 매형한테는 죽고 못 사는데 나는 찬밥도 아니고 쉰밥 취급이거든.”

김산하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한갓지게 만담할 시간 없을 텐데.”

벌써 12시 40분이었다.

대찬은 김산호의 손목을 붙들고 부랴부랴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은 김산하에게서 멀어지며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누나 다음에 공항 갈 때 똑같이 보답할게.”

“면세점에서 향수나 좋은 걸로 하나 사와.”

김산하는 대찬의 뒷모습을 팔짱을 낀 채로 지켜봤다.

이윽고 그가 사라지자 얕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된 회사가 가만 놔두질 않냐구.”

김산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으며 혼자서 서울로 돌아갔다.

분주하게 수속을 밟은 대찬과 김산호는 여유 있게 비행기에 올랐다.

대찬은 좌석에 푹 몸을 묻었다.

김산호도 대찬을 똑같이 따라했다.

“야, 역시 비즈니스가 좋긴 좋네요.”

“미국까지 이코노미로 가려면 좀 쑤셔서 못 살아.”

“그래도 과장님 덕에 편안히 가네요. 다른 직원 같았음 비즈니스 어림도 없지.”

대찬은 피식 웃고는 바로 안대를 내렸다.

“내가 좀 많이 피곤하거든. 잠 좀 잘게.”

“아무렴요. 피곤하시겠죠. 엄청 피곤하시겠죠.”

김산호는 다 안다는 듯 의뭉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대찬은 안대를 들고 따가운 눈빛을 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곤한 잠에 빠졌다.

비행기는 미네소타로 향했다.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에 도착하자마자 대찬은 이전 협상 담당자를 만났다.

필래물류 소속으로 직급은 차장이라고 했다.

대찬은 공항까지 마중 나온 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조대찬 과장입니다.”

“아, 조 과장님, 물류 고석승 차장입니다.”

고석승 차장은 순박한 인상이었다.

얼굴도 둥글둥글했다.

날카로운 계산이 난무하는 협상장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동안 애 많이 써주셨습니다. 필래마트 직원도 아니신데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회장님이 항상 강조하시는 게 우리는 다 같은 필래 가족이라는 건데요. 솜씨가 변변찮아 조 과장님을 미네소타까지 모시게 됐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대찬은 웃음으로 그를 위로했다.

대찬이 미네소타까지 온 건 순전히 고석승 차장의 무능이 원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굳이 날선 말로 그의 속을 후벼 파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인데 식사나 같이 하시겠습니까? 제가 맛있는 레스토랑 수배해놨습니다.”

“아, 죄송하지만 일이 급해서 바로 미팅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대찬은 고석승 차장의 제안을 사양했다.

밥 한 끼 못해줄 것도 없지만, 통보받은 바로 다음 날 출국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위마트와 업하우스 쪽에서는 끈질기게 봄버스 직원들과 만나고 있다는 첩보였다.

고석승 차장은 아쉬운 듯 웃었다.

“어쩔 수 없군요. 건투를 빌겠습니다.”

“고 차장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처럼 제안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한국 들어오시거든 제가 식사 대접하게 해주십시오.”

“별말씀을요.”

고석승 차장과 헤어진 대찬은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다시 밖으로 나섰다.

김산호와 동행하지는 않았다.

“너는 위마트랑 업하우스 쪽 동태 좀 살피고 있어. 급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넵, 알겠습니다.”

김산호는 넉살 좋게 경례를 척 올려붙였다.

대찬은 눈웃음을 짓고 호텔을 떠났다.

얼마 후, 그는 동년배의 백인 청년과 만났다.

대찬과 그는 반갑게 악수했다.

“초! 이게 얼마 만이야?”

“그러게, 유진. 잘 지냈어?”

대찬이 만난 사람은 미네소타 대학교 교환학생 시절 막역하게 지내던 유진 깁슨이었다.

그는 미네소타의 최대 도시인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나 쭉 살고 있었다.

혹시 몇 다리 건너 봄버스 쪽과 연이 닿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야 바쁘게 지내지. 벌써 과장이라며? 소식 들었어.”

“어떻게 알았어? 운이 좋아서 좀 잘 풀렸어. 너는 어떻게 지내?”

“나는 네가 어떻게 사는지 아는데 너는 몰라? 좀 섭섭한데.”

“너처럼 귀가 밝지 못해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미스터 햇치 밑에서 계속 일하고 있어.”

“햇치 주지사?”

“너 미국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구나?”

“한국 정치에도 관심 못 두는 판이야.”

“11월에 대통령 선거 있잖아. 그때 미네소타 상원의원 선거도 있거든.”

“아, 그렇네.”

오바마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는 선거였다.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의 사건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지만, 신문을 통해 알음알음 들은 바로는 이번에도 역시 버락 오바마가 공화당의 미트 롬니를 꺾고 재선 대통령이 될 확률이 농후했다.

“주지사님도 이번 선거에 출마하셨어. 미네소타 상원의원으로. 나는 지금 공보비서로 일하고 있고.”

“미국 정치에 관심이 있었어도 주지사님이 출마했는지는 몰랐을 거야.”

“현직 상원의원인 에이미 클로버샤가 이번에도 출마하려고 했는데, 주지사님이 간발의 차로 꺾고 민주당 후보가 됐어.”

“그렇구나.”

“클로버샤가 우리 캠페인에 소극적이어서 박빙 판세로 바뀌고 있어.”

“그렇구나…….”

대찬은 유진의 말이 슬슬 지루해졌다.

대찬이 원하는 화제는 미국의 선거가 아니었다.

봄버스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덥석 비즈니스부터 논할 순 없었다.

대찬은 유진의 모터 달린 입을 막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진이 말했다.

“아, 오랜만에 후보님이나 만나볼래?”

“응? 내가?”

대찬은 속으로 은근히 먼저 운을 띄워볼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주지사를 지낸 데다 유력한 상원의원 후보라면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봄버스에 압력을 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여겼다.

“후보님이 반가워하실 거 같은데? 어쨌거나 네 덕분에 박빙 주지사 선거에서 이겼으니까.”

“그건 그렇지?”

게다가 마이크 햇치는 그 당시 대찬이 고의로 사건을 만들어 자신의 승리에 일조했다는 걸 인지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은혜를 갚겠노라 공언했다.

그게 진심이 아닐지라도, 혹여 진심이었지만 지금은 잊었을지라도 밑져야 본전이었다.

“어때, 자리를 한번 만들까?”

“그래줄래?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좋아.”

대찬과 유진 깁슨은 맥주가 든 잔을 경쾌하게 부딪쳤다.

대찬이 호텔로 돌아오자 김산호가 그를 반겼다.

“저 빼고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너는 법인카드로 호텔 뷔페 먹었으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혼자 뷔페를 어떻게 가요! 요 앞에 중국식당 가서 볶음밥 먹었거든요.”

“볶음밥도 맛있는 음식이지.”

김산호는 몇 마디 더 툴툴거리고는 일 얘기를 했다.

“위마트랑 업하우스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아요. 봄버스 쪽에 미팅을 잡으려고 전화했더니 내일, 내일모레는 이미 다른 한국회사랑 일정이 잡혀 있다고 하던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한창 우리 때문에 코너에 몰려있는데, 봄버스를 들여오면 상당부분 만회가 될 테니까.”

“일단 최대한 빨리 만났으면 한다고 말해뒀어요. 이르면 모레 미팅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케이. 수고했어.”

내로라하는 한국의 대형마트들이 일제히 봄버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위마트와 업하우스는 말이라도 붙이고 있었지만, 대찬의 필래마트는 담당자의 얼굴조차 구경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확실한 열세였다.

다음 날 아침, 유진 깁슨에게서 전화가 왔다.

“후보님이 오늘 저녁 미네소타 대학교 덜루스 캠퍼스에서 타운홀 미팅을 하기로 했어. 혹시 올 수 있어?”

“뭐? 오늘 저녁?”

“응. 미안. 일정이 워낙 유동적이라. 후보님도 오늘이 적기라고 하셔서.”

“알았어. 바로 갈게.”

같은 미네소타라고 하지만 여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대찬이 있는 미니애폴리스에서 덜루스까지는 250킬로미터였다.

서울에서 대구 가는 거리였다.

대찬은 전화를 끊자마자 김산호에게 외쳤다.

“빨리 덜루스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표 알아봐! 제일 가까운 시간으로!”

“네, 넵! 알겠습니다!”

대찬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호텔을 빠져나왔다.

공항 카운터에 가서 비행기 표를 결제한 대찬은 바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덜루스로 향했다.

덜루스는 미네소타 제3의 도시이면서 마이크 햇치의 고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주민들과 가깝게 소통하는 타운홀 미팅을 통해 표밭을 확실히 다지려는 심산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서두른 덕분에 대찬은 타운홀 미팅이 막 시작했을 때 도착했다.

유진 깁슨이 팔을 뻗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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