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67화
로튼 프룻츠 스스로 법인으로 만들겠다는데 서청수 회장이 말릴 근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대찬이 서청수 회장에게 허락을 구하는 건, 법인화를 이룬 뒤에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
당돌하다면 당돌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청수 회장은 오랜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정도도 못해주면 자네가 너무 섭섭해할 테니.”
“아니라곤 못하겠습니다.”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대표는 자네가 맡을 텐가?”
“제가 저지른 일이니 그게 옳을 겁니다. 하지만 복수의 직업을 갖는 게 사규로 금지돼 있어서…….”
대찬은 말끝을 흐렸다.
서청수 회장의 자비를 구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픽 웃었다.
“예외 규정 있는 거 알지? 이사회의 승인이 있을 경우 가능하다.”
“예. 알고는 있습니다만…….”
“똥 마려운 강아지 표정으로 쓸데없는 교태 부리지 말게. 허락해줄 테니까.”
그제야 대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럼 자네는 우리 회사의 직원인 동시에 사업파트너인 셈이군.”
“적어도 회장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를 믿네.”
로튼 프룻츠는 영리법인으로 출범했다.
그러니까 규모는 작을지언정 버젓한 회사로 일어선 것이다.
고원대학교와 가까운 곳에 작은 사무실도 생겼다.
옛 에피니키온 시절의 위용을 떠올리자면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로튼 프룻츠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조직을 일궈냈다는 데서 보람을 느꼈다.
대찬은 명목상의 대표가 됐지만 엄연히 필래마트의 직원이었다.
로튼 프룻츠의 일에만 몰두할 수 없는 처지였다.
회사로 새 출발을 하는 만큼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 상주하며 일을 전담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적임자가 나타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민승기가 대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내가 로튼 프룻츠 맡아서 하면 안 될까?”
“선배가요?”
“어. 나는 도저히 월급쟁이 팔자가 아닌 거 같다. 체질에 안 맞아.”
민승기가 나서준다면 대찬은 환영이었다.
민승기는 대찬과도 가깝고, 로튼 프룻츠 사람들에게 두터운 신뢰도 얻고 있었다.
눈치도 빠르고 일처리도 괜찮았으니 그보다 적임은 없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지금 다니는 회사만큼 돈 못 버실 거예요. 아니, 당장엔 손가락만 빨아야 할 수도 있어요.”
“알아. 월급 없이 당장 1, 2년 버틸 정도는 돼. 그래도 금방 일어설 거라고 생각한다. 웜샤인이랑 협업이 활발하니까.”
“웜샤인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요. 선배가 직접 활로를 개척해야 해요. 물론 저도 발 벗고 나서겠지만, 키는 선배가 쥐어야 합니다.”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구구절절 설명할 거 없어. 나도 알고 있다고.”
“선배가 맡아주신다면 든든하죠. 공동대표로 저랑 같이 이름을 올리고, 선배님이 전권을 행사해주시면 됩니다.”
“그게 좋겠네.”
“직원도 뽑아야 하지 않아요?”
“일거리가 있어야 직원도 뽑지. 일단 동아리 친구들 위주로 꾸려나갈게.”
야무진 민승기가 그렇게 말하니 대찬도 더 훈수를 두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로튼 프룻츠가 스타트업 기업으로 출범하자마자 사재를 털어 1억 원을 투자했다.
민승기는 펄쩍 뛰며 사양하려고 했다.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청수 회장은 일언지하에 민승기의 사양을 일축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해. 지금 고상한 척할 주제가 아닌 걸로 아는데?”
민승기는 입을 다물고 서청수 회장의 투자를 받았다.
로튼 프룻츠는 웜샤인과의 협업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을 지향했다.
민승기는 밤낮 없이 일하며 로튼 프룻츠의 내실을 다져나갔다.
대찬은 자신의 몫으로 떨어지는 급료를 전액 로튼 프룻츠의 재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PB상품 시장에 성공적으로 파란을 일으킨 공로로 서원웅은 상무로 승진했다.
직책은 그대로 전략기획실장이었다.
대찬은 여전히 과장이었다.
대찬의 승진속도도 경이로웠는데 입사동기인 서원웅은 아득히 높아졌다.
회사 내부에서는 공공연히 소문이 돌았다.
서원웅 상무의 다음 정차역이 필래마트 사장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대찬은 그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꾸라질 염려가 있는 도박수는 이미 김태준 사장 대에서 모두 행해졌다.
새벽배송, 필래페이, 필래 인 마켓, PB 브랜드인 필초이스까지 궤도에 올랐다.
이젠 가만히만 놔둬도 알아서 잘 굴러가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앞으로 몇 년 후면 그 시스템은 더욱 공고해질 터.
그렇게 잘 자란 캐시카우를 서원웅이 물려받는다면 필래그룹의 주축으로 일약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서원웅의 승진을 보고 허운이 툴툴거렸다.
“쳇! 솔직히 이번 일도 네가 다 해낸 건데 실장님만 승진하네.”
“왜, 형도 이번에 승진했어야 하는데 못해서 화나?”
“내가 화날 게 뭐가 있어. 그냥 시키는 일만 적당히 했을 뿐인데. 근데 넌 아니잖아. 에이부터 제트까지 네가 다 했잖아.”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다 하기는. 솔직히 실장님 아니었으면 이건 그냥 공상으로 끝났을 거야.”
“뭐?”
허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해봐. 김태준 사장님은 물론이고 회장님까지 일간지랑 인터뷰하고 CR팀까지 풀가동 시켰잖아. 그랬는데 이게 어떻게 내가 에이부터 제트까지 다 했다고 할 수 있어?”
“그래도…….”
“이게 다 서원웅 실장님께서 잘나신 핏줄을 타고난 덕택이라니까. 인정하자고, 이 선천적 불평등을!”
“너는 속도 좋다, 진짜.”
대찬의 과장된 목소리에 허운은 풋 웃었다.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관뒀지만, 승진을 시켜준대도 사양하고 싶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갑자기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면 고산병이 걸린다.
숨이 가쁘고 식은땀이 나기 마련이다.
차라리 서원웅이 무럭무럭 자라 넓은 그늘을 드리워주고, 그 그늘 아래 숨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렇게 대찬의 직장생활은 순탄했다.
일에만 묻혀 사니 가는 시간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일하고, 퇴근하고, 자고.
다시 일어나서 일하고, 퇴근하고, 자고.
그렇게 쳇바퀴 도는 일상을 지내니 해가 바뀌고도 봄, 여름이 지났다.
2012년 10월.
필래마트는 순항 중이었다.
이미 여러 번 큰일을 치른 대찬은 주어진 업무만 착실히 해냈다.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정력적으로 또 다른 일을 벌이려면 야근을 해야 했는데, 대찬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쉼 없이 달려오느라 지쳐 있었다.
모처럼 찾아온 정시퇴근의 계절이었다.
‘일도 중요하지만 잘 쉬는 것도 중요하지.’
야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김산하가 끈적끈적하게 유혹을 걸어왔다.
“나 하고 싶은 거 생겼어.”
“뭔데?”
“내 차로 너 출근시켜주기.”
밤새 같이 있자는 뜻이었다.
대찬은 풋 웃었다.
“알았어. 오늘 오랜만에 근사한 데서 술이나 한잔할까?”
“어제 대학병원 의사 나리들 대접해준다고 늙은 와인들 잔뜩 먹었어. 별로 안 땡긴다.”
“그럼 소맥?”
“바로 그거야.”
대찬과 김산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시시 웃었다.
대찬은 퇴근하자마자 회사 근처의 치킨집으로 향했다.
김산하가 자기 차로 출근시켜준다고 했으니 먼 곳으로 가봤자 애꿎은 김산하만 고생할 터였다.
우선 둘은 주린 배부터 채우기 위해 닭고기부터 먹었다.
허기가 좀 가시자 김산하가 물었다.
“이제 한동안 야근 안 하는 거지?”
“응. 완전 지쳤어. 하라고 해도 안 할 거야.”
“너 안 바쁠 때 자주 봐둬야지. 이런 좋은 시절이 얼마나 갈지 누가 알아.”
“연말까지는 이 분위기로 갈 거 같은데?”
“함부로 낙관하지 마.”
김산하의 촉이 들어맞았다.
이 좋은 시절은 시작하자마자 끝이 나려고 했다.
김산하도 이렇게 빨리 호시절이 결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둘이 손을 꼭 잡고 모텔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대찬의 휴대폰이 웅웅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대찬은 오만상을 지었다.
“뭐야, 이 시간에?”
“누군데?”
“서원웅. 안 받을 거야.”
대찬은 단호하게 말하고 서원웅의 전화를 무시했다.
하지만 서원웅의 끈기가 만만치 않았다.
다섯 번이나 더 전화가 울렸다.
대찬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누나, 내가 욕할 거 같으면 입 좀 틀어막아줘.”
“이왕 막는 거 입술로 막아줘야지.”
김산하는 큭큭 웃었다.
대찬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대뜸 소리를 질렀다.
“서원웅 실장님! 퇴근 후 업무지시, 이거 상사로서 아주 안 좋은 버릇이십니다?”
“급한 일이야!”
“나도 지금 급하거든요!”
“빨리 회사로 와.”
“이미 집에 와버렸습니다만.”
“너 산하 선배 만나서 요 옆의 치킨집으로 가는 거 다 봤어.”
“너, 나 사찰하고 다니니?”
“샌드위치 사러 나가다가 우연히 본 거니까 상상의 나래는 접어두시고요.”
젠장맞을!
대찬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 김산하 한 달 만에 만났어. 좋은 시간 좀 보내면 안 될까?”
“안 돼. 급해.”
“야!”
“급한 일이라니까.”
“천하의 대필래그룹에 직원이 나 하나뿐이야? 다른 사람 좀 시켜라, 제발.”
“너 아니면 안 돼.”
“왜!”
서원웅은 단칼에 입씨름을 종결했다.
“안 오면 중국지사로 보내버린다.”
서원웅의 협박에 대찬은 와사비를 대접째 퍼먹은 듯 거친 콧김을 뿜었다.
“갔는데 별거 아니면 진짜 나 사표 써버린다!”
“빨리 와. 끊는다.”
뚝.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두통이 지끈지끈 올라왔다.
대찬은 이마를 탁 짚었다.
김산하가 그를 급히 부축하면서 말했다.
“얼른 가봐. 서원웅이 저렇게 채근할 정도면 진짜 급한 일 같은데.”
“누나가 알던 서원웅이 아니야. 재벌 2세 신분에 완벽히 적응하셔서 요즘 건방이 얼마나 하늘을 찌르는데.”
“됐어. 빨리 가.”
그럴 수 없었다.
대찬은 김산하의 손을 꽉 잡았다.
“누나도 같이 가자.”
“뭐? 미쳤어? 다른 회사 직원이 어떻게 들어가?”
“가끔 잡상인도 들락날락거리는데 뭐. 가서 히스테리 좀 부려줘.”
김산하는 풋 웃었다.
그녀는 걸어가도 되는 거리를 굳이 차를 태워주었다.
“차 안에서 기다릴 테니까 일 보고 와.”
“금방 갔다 올게.”
대찬은 김산하가 눈에 밟혀 회사로 들어가는 잠깐 동안에도 여러 번 돌아봤다.
김산하는 휘휘 손을 저어 대찬을 들여보냈다.
대찬은 잔뜩 뿔이 난 채로 사무실로 올라갔다.
“뭡니까, 진짜.”
대찬은 이 와중에도 회사라는 걸 염두에 두고 서원웅에게 존댓말을 썼다.
“미안. 근데 급하단 말이야, 진짜로.”
“말씀하세요.”
서원웅의 표정이 간절했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대찬도 당장의 분노를 억누르고 일단 들어주기로 했다.
“봄버스(Bombance) 알지?”
“네. 디저트 회사잖아요.”
대찬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봄버스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디저트 회사였다.
거기서 생산된 초콜릿, 마카롱, 젤라또, 티라미수, 심지어는 냉동피자까지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합리적인 가격에 압도적인 맛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한국에는 아직 진출하지 않아 한국인들 사이에선 해외여행 가면 반드시 사와야 할 제품으로 봄버스의 디저트를 꼽았다.
헌신적인 남자 친구들은 해외여행을 가면 여자 친구에게 선물해줄 봄버스 제품부터 찾는다고 했다.
“이번에 봄버스가 한국에 판로를 개척하겠대.”
“그런데요?”
“대형마트 3사 중에서 한 곳에서만 독점판매를 하겠다는 거야. 대신 마진율을 세게 잡아주고.”
대찬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적자를 봐서라도 들여와야 하지 않겠어요? 매장에 봄버스 제품을 들여놓으면 손님이 엄청 늘어날 텐데.”
“그렇지.”
“대단한 뉴스긴 한데, 퇴근한 직원을 도로 불러다가 말할 정도는 아니잖아요? 전화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봄버스를 위마트나 업하우스한테 뺏길 수는 없어.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도 가장 좋은 패를 협상장에 내놔야지.”
“설마 그 가장 좋은 패라는 게 저는 아니겠죠.”
“유감스럽게도 정답이야. 시카고 주재원이 상대하고 있는데 녹록하지 않은 모양이라 대체인력이 필요해.”
대찬은 짧게 한숨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