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166화 (165/556)

난 할 수 있어 166화

업계는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업하우스의 대표는 바로 김태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뭐 하자는 짓입니까!”

“아, 나도 방금 보고받아서요. 현재 뭐 하자는 짓인지 파악 중입니다.”

“장난합니까? 남의 기둥뿌리를 뽑아다가 당신네 서까래로 삼아요? 상도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김태준 사장은 허허 웃었다.

“왜 우리한테 화를 냅니까? 협력업체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잖아요?”

“필래가 바람 살살 불어넣으니까 거기에 헛바람이 들어서 이 지랄 난장판을 해놓는 거 아뇨!”

“아무튼 나는 모릅니다.”

유유자적한 태도에 업하우스의 대표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

“진짜 장사 이따위로 할 겁니까! 우리도 한번 이판사판 들이받아봐요?”

“듣자듣자 하니까 더 못 들어 주겠네.”

김태준 사장의 표정이 굳었다.

“뭐, 뭐요?”

“이봐, 똑바로 들어.”

“이, 이봐? 지금 이봐라고 했어!”

“그래, 했다. 당신네들이 협력업체한테 일처리 똑바로 했으면 이럴 일도 없잖아? 누가 단가 후려치래? 납품기일 안 지키래? 계약갱신 안 하래? 지들이 개판 쳐놓고 누구한테 뒤집어씌워?”

“…….”

“밥 빌어먹고 싶으면 떳떳하게 빌어먹으란 말이야. 새끼, 좆 잡고 반성이나 할 일이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어디서 짖어대.”

김태준 사장은 쾅 소리 나게 수화기를 내려놨다.

그러고는 깊은 날숨을 뱉었다.

“건방진 새끼…….”

PB상품에 대한 상표권은 위마트와 업하우스에 있었다.

때문에 필래마트는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상품을 출시했다.

매콤치킨봉 대신 스파이시닭봉, 이런 식이었다.

기형적으로 본사에 유리했던 계약이 협력업체들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때문에 마진율이 상당히 깎일 수밖에 없었다.

필래마트는 마진율의 감소를 감수하고, 대신 많이 팔아치우겠다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네 글자로 줄이면 박리다매였다.

서원웅은 대찬의 계획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서원웅이 져야만 했다.

한 번이라도 고꾸라지면 안 되는 터라 내심 조마조마하던 차였다.

그래도 1차적인 목표는 달성했으니 꽉 조였던 마음을 조금은 풀어놓을 수 있었다.

서원웅은 웃으면서 말했다.

“일단 판을 흔드는 데는 성공했어.”

“이제 챕터 2로 넘어가야죠.”

“좋았어.”

위마트와 업하우스는 이번 일을 ‘협력업체 빼가기’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필래마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일을 더 키웠다.

김태준 사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대형마트의 대표가 기자회견을 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김태준 사장은 협력업체 사장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었다.

원청업체와 하청업체는 보통 앙숙이었다.

쥐와 고양이였다.

그런데 원청업체와 하청업체의 대표가 한자리에 나섰다.

건수가 되겠다 싶은 언론사들이 기자들을 파견했다.

김태준 사장은 마이크를 잡았다.

“이렇게 저와 협력업체 대표님들은 소비자이자 고객이신 국민들 앞에 공정한 영업을 약속드리기 위해 함께 공개된 자리에 나섰습니다.”

기자들은 침묵을 지키며 김태준 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희는 이 자리에서 지금껏 협력업체에 희생을 강요했던 대표적인 병폐들을 철폐하겠다고 서약하겠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산업부, 경제부 기자들은 아연실색했다.

여태 이런 재벌은 없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협력업체의 고혈을 짜낼 생각을 하지, 자발적으로 공정거래니 병폐의 철폐니 운운하지 않는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기자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김태준 사장은 서약서를 들고 협력업체 사장들과 사진을 찍었다.

기자들은 그걸로 일정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저와 협력업체 대표들은 이 자리에서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흩어지던 기자들의 시선이 다시 김태준 사장에게 모였다.

김태준 사장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즉각 대형유통업체와 협력업체의 상생발전을 위한 법안을 만들어주십시오. 불공정행위를 엄격하게 규제하고, 위반 시 강력한 처벌을 내려주십시오.”

기자들은 김태준 사장의 말을 빠르게 받아 적었다.

그것은 이내 속보가 되어 인터넷으로 퍼져나갔다.

-필래마트, PB상품 협력업체와 공정영업 서약식… “공정위에 강력규제 촉구”

-‘갑질’이 일상이 된 유통업계에 새바람 부나? 필래마트, 기자회견서 ‘셀프규제’ 선언

-필래마트 김태준, “공정위, 협력업체 상생발전 법안 즉각 제정하라!”

여론의 반응은 일관됐다.

잘하는 일이긴 한데 당황스럽다는 것이었다.

필래 인 마켓으로부터 이어지는 윤리경영 방침이 유지되고 발전하는 데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태가 워낙에 엄혹하고 치사했다.

김태준 사장의 기자회견과 동시에 필래그룹의 대관업무팀이 움직였다.

그들은 국회와 재무 관료들에게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밥을 먹이고 술을 먹이면서 청탁을 넣었다.

“그러니까, 정부더러 대형마트가 협력업체 상대 계약을 준수하도록 강제력을 발휘하라는 겁니까?”

“예. 이번에 기자회견 했던 것처럼.”

“참 나, 살다 살다 자기들 목에 목줄 채워달라고 청탁하는 회사는 처음 봅니다.”

“이게 다 국민과 국가와 국회와 청와대를 위한 일 아닙니까. 힘 좀 써주시죠.”

“허허, 참.”

정부와 국회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국민여론이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법안을 제멋대로 집행하지 못하는 건 시종 끈질긴 기업의 로비와 압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형마트의 3마리 공룡 중 하나가 나서서 이쪽으로 확 잡아당기니 정부, 국회는 허허 웃으면서 못 이기는 척 끌려가면 그만이었다.

최재한 역시 허탈한 웃음으로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네 왜 그래? 뭐 잘못 먹었냐?”

“잘해도 뭐라 그러네.”

“뭐라 그러는 건 아니고……. 아무튼 리포트 좀 내려고 하는데 취재원 좀 해줘라.”

“백 번도 더 해드립죠. 빵빠레 좀 크게 터트려줘라. 언론에서 시큰둥하면 우리 완전 독박이야.”

만약 정치권과 언론에서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하면 대찬의 말대로 필래는 독박을 쓰게 된다.

그렇기에 간절한 쪽은 최재한이 아니라 오히려 대찬이었다.

다행히 언론은 필래를 외면하지 않았다.

아이템 자체가 좋을뿐더러 필래의 법인카드가 무자비하게 밥과 술을 쏟아낸 덕택이었다.

서청수 회장 역시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가장 큰 일간지와 인터뷰에 나섰다.

진지한 표정을 한 서청수 회장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걸리고, 한 면 전체를 할애하여 인터뷰 기사가 나갔다.

-서청수 필래그룹 회장 단독 인터뷰 ‘상생으로 한 걸음, 그 속내는?’

-“‘같이 살자’ 외침 외면할 수 없었죠. 재벌의 사회적 역할 성찰한 결과”

서청수 회장이 나선 건 단순히 아들의 뒤를 봐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필래마트가 가한 불의의 일격은 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이 틈을 타 총력을 다해 업어치기 한판을 해야 후발주자 필래마트가 우뚝 솟아날 수 있었다.

게다가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 있으니 개인적으로도 나쁜 기회가 아니었다.

서청수 회장의 가세는 분명히 큰 도움이 되었지만, 까놓고 보자면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것과 같았다.

본래 재벌규제에 적극적이었던 야당은 필래의 선언을 쌍수 들어 환영했다.

노총 역시 필래의 선언을 반겼다.

위마트와 업하우스 내부에 심각한 균열이 갔다.

위마트와 업하우스의 노조는 법이 제정되기 전에 필래의 선언을 답습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위마트와 업하우스의 협력업체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짓눌려왔던 그들 역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재벌 회장님들의 조직인 한국경영인연맹, 약칭 경맹의 정기총회에서 서청수 회장은 이웃들의 집중포화를 견뎌야 했다.

위마트의 모그룹인 새천년그룹의 회장은 서청수를 보자마자 볼멘소리를 했다.

“서 회장님,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요?”

서청수 회장은 시치미를 뗐다.

“뭐가 뭐가요, 입니까? 소탐대실하는 거예요, 그거. 고삐 한번 느슨하게 쥐면 당나귀가 사람 등 위에 올라타려고 드는 법입니다.”

“그쪽 당나귀들은 그렇게 싸가지가 없습니까?”

“필래는 뭐 다를 줄 아십니까? 윤리경영, 허울은 좋죠. 그런데 회장님이 둑 터뜨리는 바람에 우리도 말을 안 들을 수 없게 됐어요.”

“그럼 들으면 되지.”

서청수 회장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새천년 회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면 일이 끝납니까? 지금 회장님은 한국경제에 크나큰 손해를 끼쳤어요.”

“크나큰 손해라니, 내가 나라라도 팔았나?”

“회장님 방침 때문에 한국기업들은 전부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게 됐습니다. 나이키 신고 뛰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됐으니, 어떻게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 필래는 확보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서청수 회장은 살살 약만 올렸다.

위마트와 업하우스의 협력업체들은 상당수가 대열을 이탈할 태세였다.

필래에 은밀히 접촉해오는 업체들도 늘어났다.

대형마트가 차별화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분야가 PB상품이었다.

PB상품 시장에서 부진하다는 건 자사의 브랜드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위마트와 업하우스는 계속되는 노조의 으름장과 협력업체들의 이탈에 두 손, 두 발 드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국회에서 법을 제정하기에 앞서 위마트와 업하우스는 필래마트와 마찬가지의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대개 1등이 모든 과실을 취하기 마련이었다.

자발적으로 나선 필래마트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선언에 동참한 위마트와 업하우스에게는 냉소만 따랐다.

필래마트는 착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전국적으로 떨치는 동시에, 위마트와 업하우스의 알짜 협력업체들을 자사의 사단으로 편입시켰다.

필래마트의 기습공격에 위마트와 업하우스는 치명타를 입었다.

완전한 승기를 쥔 필래는 일이 마무리되어가자 다시 대관업무팀을 가동했다.

그들은 다시 밥과 술을 샀다.

그런데 요구사항은 며칠 전과 정반대였다.

대형마트에 대한 규제가 법제화되는 걸 막아달라는 청탁이었다.

이미 이득을 취했으니 불필요한 족쇄를 찰 이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결국 법률로 제정되지는 않고, 공정거래위원회의 권고사항 정도로만 남았다.

이로부터 한 달 후.

필래마트의 모험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숫자로 드러났다.

경영평가실의 보고서를 받은 한태윤 과장이 활짝 웃었다.

“대성공입니다. 필초이스의 브랜드 인지도가 전달 26퍼센트에서 48퍼센트로 크게 뛰었습니다. 브랜드 호감도에서도 필초이스는 42퍼센트에서 85퍼센트로 뛰었고, 위마트는 53퍼센트에서 40퍼센트로, 업하우스는 46퍼센트에서 31퍼센트로 하락했습니다.”

숫자를 들은 서원웅의 표정이 자연스레 확 밝아졌다.

“물론 조정기를 거치긴 하겠지만, 일단은 압승이라고 봐도 무방하군요.”

“필초이스 매출액도 전월 대비 350퍼센트 폭증했습니다.”

“당연히 점포 매출액도 늘었겠죠?”

한태윤 과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대찬이 첨언했다.

“착한 기업 이미지는 당장은 좋지만 나중에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백지장에는 작은 얼룩도 잘 보이는 법이니까요.”

한태윤 과장도 수긍했다.

“맞습니다.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가닥을 이쪽으로 잡은 이상, 윤리경영 기조를 버릴 수 없습니다.”

“노력합시다, 다들.”

그렇게 말하는 서원웅의 목소리가 미더웠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슬슬 리더의 각이 잡혀가는 거 같네.’

대찬은 이 성과를 오롯이 회사에 뺏길 생각은 없었다.

그는 필래 산하 사회적기업인 웜샤인으로 하여금 필초이스의 상생행보에 동참할 것을 제의했다.

합리적인 제의인 까닭에 곧바로 통과되었다.

대찬은 필초이스 위에 웜샤인을 붙이고, 그 웜샤인 위에 로튼 프룻츠를 붙였다.

기생이라면 기생이지만, 이런 성과를 낸 데는 대찬의 지분이 결정적이었으므로 모기가 쏘듯 피 몇 방울 뽑아 마시는 건 괜찮다고 여겼다.

사정을 아는 사람은 이번 성과에 대찬의 공이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임을 알았다.

대찬은 이를 호기로 여기고 서청수 회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바쁘신 몸이었지만 대찬이 한없이 예뻐 보이는 터, 기꺼이 허락했다.

대찬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로튼 프룻츠를 법인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법인?”

서청수 회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예. 일개 동아리로 두기에는 규모도 비대하고 역할도 커졌습니다.”

“그렇긴 하지.”

“법인으로 만들면 운신의 폭도 커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회사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음…….”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지그시 바라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