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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65화 (164/556)

난 할 수 있어 165화

대찬은 다시 한 번 그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말씀해주십시오. 아니면 이대로 쭉 갑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대찬은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계약은 불공정합니다.”

“어째서죠?”

대찬은 저간의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장승필 사장의 입으로 듣고자 했다.

“단가 후려치기. 계약에는 분명히 특정 행사기간에만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반영구적으로 그 가격에 납품하라고 하죠?”

“네. 원재료 가격이 오를 땐 원가 이하에 공급할 때도 있습니다. 미칠 노릇이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요?”

“판매분 매입. 진열대에 올라간 제품 중에서 손님들에게 팔린 제품 가격만 쳐주는 겁니다.”

“나머지는……?”

“다 저희가 떠안아야 할 재고죠.”

“심각하군요.”

같은 얘기라도 건조한 보고서를 통해 접하는 것과 삶의 무게에 짓눌려 파르라니 떨리는 당사자의 목소리로 접하는 것과는 차이가 컸다.

대찬의 광대뼈에 장승필 사장의 한숨이 힘겹게 와 닿았다.

“대금이 제때 입금되는 건 손에 꼽고요. 지연된 대금에 대한 이자는 애초에 기대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하실 순 없으십니까? 계약서에 명시된 조항이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데.”

장승필 사장은 허탈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필래마트와의 인연은 끝장납니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잘 알겠습니다.”

모르지 않았다.

다만, 장승필 사장의 입으로 확실히 듣고 싶을 뿐이었다.

장승필 사장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질구레한 일들이 더 많지만, 굵직한 문제들만 말씀드렸습니다.”

대찬은 짐을 챙겨 일어났다.

“다른 협력업체에도 같은 방침이 적용됐겠죠?”

“예.”

장승필 사장은 단언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본사 측에서도 협력업체와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겠습니다.”

장승필 사장은 대찬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부디 잘 생각해주십시오. 저희들 정말 죽겠습니다.”

체면 따위는 내던지고 애걸복걸하는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노력하겠습니다. 맡겨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사장님,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예, 무엇이든지.”

“우리 회사가 유독 악덕인 겁니까?”

장승필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다른 회사는 협력업체와 관계를 잘 맺고 있나 여쭙는 겁니다.”

장승필 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초록이 동색이지요. 위마트, 업하우스 할 것 없이 협력업체 쥐어짜기에 혈안이 돼 있습니다.”

“…하기야, 10원이라도 남들보다 싸게 팔고 싶어 하니까요.”

장승필 사장은 여전한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찬 역시 씁쓸한 기분을 안고 안양을 떠났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장 대리가 말했다.

“과장님, 협력업체 말 곧이곧대로 들어줄 거 없어요.”

“네?”

“우는 소리 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에요. 메추리도 칠면조만큼 튀겨서 호들갑을 떨어댄다니까.”

“호들갑으로 보였군요.”

장 대리는 피식 웃었다.

“과장님 눈에는 다르게 보였습니까?”

“저는 다르게 보이던데요. 할 줄 아는 게 몸부림뿐이라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몸부림치는 걸로요.”

“의외로 소녀 감수성이군요.”

“글쎄요. 그렇게 치부하고 넘길 정도로 사소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대찬은 홍은주부터 찾았다.

“홍 주임.”

“네, 과장님.”

“위해피랑 엑스트라하우스 있죠?”

“아, 위마트랑 업하우스에서 만든 PB 브랜드요.”

“네, 거기 제품 중에서 가장 판매율이 높은 제품들 엑셀로 추려서 내 메일로 보내주세요.”

“네? 저희 제품 말고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해피, 엑스트라하우스.”

“알겠습니다.”

홍은주는 대찬의 주문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우선 시키는 대로 했다.

대찬은 그길로 곧장 서원웅을 찾아갔다.

그 역시 PB상품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 머리를 뜯어가며 골몰하고 있었다.

대찬의 방문에 서원웅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무슨 좋은 생각 떠올랐어?”

“좋은 생각 맡겨놓으셨수? 보자마자 찾게.”

“답답하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번 사업에 실장님 재량이 얼마나 되십니까?”

“재량이라니?”

“조자룡 헌 창 쓰듯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지, 아니면 일일이 사장님한테 결재를 받아야 되는지 그걸 여쭙고 있습니다.”

“이번 건은 내가 전권 쥐고 있어. 사장님도 이번 건으로 내 평판이 갈릴 거라면서 신중하되 과감하게 밀어붙이라고 하셨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돈도 팍팍 풀 수 있겠네요?”

“왜, 또 무슨 꿍꿍이야?”

서원웅은 의심의 눈초리를 벼렸다.

“지금 협력업체 사정이 말이 아닌 건 아시죠? 방금 치즈듬뿍 돈가스 만드는 청명식품 갔다 왔는데, 공장이 아니라 거의 초상집이더라고요.”

“사정은 딱하지만 우리가 남의 사정 봐줄 때가 아니란 건 알잖아.”

“그래도 너무해요. 마른 걸레도 짜듯 하더라니까.”

서원웅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돈 풀어서 협력업체에 쥐여 주자고? 우리가 자선단체는 아니잖아.”

“최소한 공정거래는 하자는 거죠.”

“하지만…….”

대찬은 서원웅의 말을 가로챘다.

“알아요, 우리 소임이 그게 아니란 거. 그래도 협력업체를 확실하게 대우해주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우리 작전은.”

“다음 말을 들어봐야 승인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겠는데.”

대찬은 서원웅에게 바짝 다가가 앉으며 입을 열었다.

서원웅은 잠자코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전략기획실은 PB상품 사업 발전계획의 1단계 조치를 공표했다.

서원웅은 전략기획실장으로서 임원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말했다.

“전략기획실은 우선 PB상품 관련 협력업체들과의 상생을 위해 다음과 같은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서원웅은 말을 잠깐 쉬고 다시 이었다.

“첫째, 단가 후려치기를 금지할 것입니다. 둘째, 대금결제일을 정확히 준수하고, 부득이한 지연 사태 발생 시 계약서에 명시된 이율을 준수해 이자를 지급할 것입니다. 셋째, 판매분에 대한 대금만 지급하던 관행을 엄격히 금지하고, 진열대에 오르는 모든 물량에 대해 대금을 지급할 것입니다.”

서원웅의 거침없는 발표에 임원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김태준 사장의 표정을 읽은 이동수 부사장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서 실장,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서원웅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어째서 말이 안 됩니까?”

“10원 한 장이라도 싸게 팔아야 살아남을까 말까 한 게 PB상품이야. 그런데 그런 불이익을 우리가 온통 떠안으면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아?”

이동수 부사장은 그렇게 일침을 놓고 슬그머니 김태준 사장을 바라봤다.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김태준 사장은 그럴 기분도 안 든다는 듯 뚱한 얼굴이었다.

서원웅은 곧장 응수했다.

“우리가 불이익을 떠안는 게 아닙니다. 비정상의 정상화입니다.”

“허어,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야!”

이동수 부사장이 본격적으로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김태준 사장이 개입했다.

“이봐, 서 실장.”

“네, 사장님.”

“내가 서 실장한테 주문한 건 위해피, 엑스트라하우스보다 우리 필초이스가 더 훌륭한 실적을 내라는 거였어.”

“알고 있습니다.”

“사내 공정거래위원회 노릇 하라고 한 적은 없단 말이야.”

“예.”

김태준 사장은 눈을 부릅떴다.

“그럼 지금의 조치는 필초이스의 실적개선을 위해 필요하다는 거지?”

“예, 필요합니다.”

“…좋아. 지금 당장은 침묵해주겠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침묵은 고리대라는 걸 알아둬야 할 거야. 침묵의 대가를 바로 지불하지 않으면 당신, 파산이야.”

“예, 사장님.”

김태준 사장의 엄포에도 서원웅은 물러나지 않았다.

김태준 사장은 그 배짱만큼은 높이 샀다.

전략기획실의 조치는 바로 관철되었다.

필래마트는 본사의 이익을 크게 줄이고 협력업체에 대한 파격적인 조치를 감행했다.

이론에서는 당연한 조치지만 현실에서는 파격적이었다.

이 사실이 협력업체들에게 전달되자마자 대찬의 전화가 울렸다.

장승필 사장이었다.

“과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한테 감사하실 일이 아니에요. 본사가 결단을 내려주신 겁니다.”

“예, 아무렴요. 사장님께도 감사드릴 일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야 숨통이 트였어요!”

“열심히 일해주십시오. 저희도 사장님의 제품이 잘 팔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저기 소문 잘 내주시고요.”

“재갈을 물리신대도 소문 안 낼 재간이 있습니까!”

장승필 사장의 날아갈 듯한 목소리에 대찬까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전화를 끊고도 은은한 미소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이뤄진 조치에 업계가 들썩였다.

“과장님, 말씀하신 자료 메일로 보냈습니다.”

“아, 고생 많았어요, 홍 주임.”

홍은주는 위해피와 엑스트라하우스의 주력 PB제품들을 정리한 자료를 대찬의 메일로 발송했다.

대찬은 그 자료를 들고 다시 서원웅을 찾았다.

“자료 준비됐습니다. 각자 맡아서 발 빠르게 움직이죠.”

“그러자. 빨리 성과를 보여줘야지. 안 그러면 사장님 입에서 불 뿜어질 거 같아.”

서원웅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대찬과 서원웅, 한태윤 과장, 허운, 유채경, 김산호, 홍은주는 일제히 사무실을 떠났다.

그들은 각자 맡은 업체들로 향했다.

대찬은 안양의 한 식품회사로 향했다.

청명식품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장승필 사장의 귀띔을 들으니 그와 호형호제하고 격주로 술을 마실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했다.

필래마트의 파격적인 조치가 그의 귀에도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필래마트 조대찬 과장입니다.”

“아, 예……. 그런데 필래에서 무슨 일로 저희를 찾으셨는지…….”

이 업체는 위해피의 효자상품인 매콤치킨봉을 생산하고 있었다.

저렴한 가격에 조리법도 쉬운 제품이었다.

집에서 홀로 술을 즐기는 소비자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매콤치킨봉, 저도 종종 집에서 혼자 즐겨먹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탐나더군요. 위마트가 아니라 우리 필래마트에서 팔면 정말 좋겠다고요.”

“하지만 우리는…….”

“네, 위마트랑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계시죠.”

사장은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오랜 인연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계십니까?”

“아, 그거야…….”

“단가가 제대로 책정되었습니까? 납품기일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습니까? 판매 분에 대한 대금은 제대로 지급되고 있습니까?”

“…….”

“우리는 우리의 협력업체를 제대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예,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미 위마트와의 계약은 만료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위마트 쪽에서 이미 후려쳐진 단가로 계속 상품을 공급받으려고요. 맞지요?”

“맞습니다.”

대찬은 사장을 지그시 응시했다.

“저희랑 하시죠.”

“…….”

사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홍은주가 엑셀로 추려낸 업체는 총 28곳이었다.

그중 위마트의 협력업체가 15곳, 업하우스의 협력업체가 13곳이었다.

위마트의 15개 협력업체 중 6곳, 업하우스의 13개 협력업체 중 4곳이 필래와 함께하기로 했다.

파격적인 조건에 더불어 위마트, 업하우스와의 계약에 문제가 없는 업체들이었다.

필래마트와 손을 잡지 않은 업체들도 심각하게 동요했다.

그들도 당할 만큼 당했다.

법적 문제가 얽혀 있어 당장 필래 쪽으로 넘어오지 못한 업체의 사장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번 계약만 만료되면 필래와 일하고 싶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필래의 손을 잡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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