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164화 (163/556)

난 할 수 있어 164화

“편히 앉아 있어요.”

“아, 예. 그럼 그러겠습니다.”

결국 서원웅은 혼자서 커피 심부름을 나갔다.

그가 자리를 비우고 대찬과 양윤희 둘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양윤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오 과장하고 만났다면서요.”

“예? 오 과장이요?”

“오강석 씨 말이에요.”

양윤희는 오강석을 오 과장이라고 불렀다.

족히 이십 몇 년은 된 오래된 호칭이었다.

“아, 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 과장하고 나는 종종 연락하고 있으니까.”

“그러셨군요.”

오강석은 박필봉, 김인준, 홍상기들과는 연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과 달리 양윤희와는 꾸준히 교류하는 모양이었다.

“별로 좋은 행동은 아니에요.”

대찬은 짧게 한숨을 토했다.

“원웅이는 지금 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원웅이를 돕는 저는 알아야 합니다.”

“회장님이 과오를 범한 것, 그리고 장백주 실장이 몹쓸 짓을 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걸 그쪽이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외람되지만, 그건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양윤희의 표정이 더 굳었다.

“이 일이 잘못돼서 그쪽 하나만 다치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원웅이한테 피해가 가는 건 못 참아요.”

“원웅이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저도 못 참습니다.”

“그걸 안다면 이쯤 해둬요. 원웅이에게 반드시, 절대로 독이 될 테니까.”

양윤희의 어조는 단순한 경고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반드시 독이 될 것이라며 대찬의 행동을 꺼려했다.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제 보니 원웅이가 말대답하는 버릇을 누구한테 배웠는지 알 것 같네요.”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저를 납득시키면 저도 더 들쑤시고 다니지 않겠습니다.”

“그걸 꼭 설명을 해야 알겠어요? 당연히 이 일로 회장님이나 장 실장 비위가 뒤틀리면 원웅이에게 독이 될 게 뻔하잖아요.”

대찬은 집요하게 물었다.

“제가 코를 킁킁거리고 다니는 정도로 원웅이의 후계구도에 차질이 빚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봐요.”

대찬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더군다나 장백주 실장이 여사님이나 오강석 선생님에게 벌인 짓은 회장님이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즉, 장백주 실장이 견제는 하겠지만 그게 회장님의 허락을 얻은 일은 아닐 것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대찬은 양윤희의 말을 끊었다.

“회장님의 비위가 뒤틀려도 저한테 뒤틀리지, 원웅이에게 뒤틀리진 않을 겁니다. 독이 돼도 저한테 독이지, 원웅이에게 독이 아닙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고요.”

“네. 조심히 파겠습니다.”

“파지 말라면 파지 말라고!”

양윤희는 대뜸 고성을 내질렀다.

고성 뒤에는 어색한 침묵이 따랐다.

대찬이 본 양윤희는 기품 있고 인내심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아들을 위해 기약 없는 강화도 생활을 견디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대찬과 몇 마디 말을 나눴을 뿐인데 인상이 험악하게 돌변하며 고함을 질렀다.

‘뭐 때문에 저러시는 거지?’

대찬은 미간을 좁혔다.

양윤희 자신도 순간 통제되지 못한 분노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때 서원웅이 커피와 스콘을 들고 돌아왔다.

“왜 이렇게 분위기가 냉랭해요?”

“…커피가 하도 안 오니까 그러지.”

양윤희는 아들의 눈치를 보며 분을 삭였다.

대찬은 쪼로록, 빨대로 커피를 빨아 마셨다.

양윤희의 말대로 대찬의 행동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으면 서원웅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그 멍에는 대찬이 오롯이 질 자신이 있었다.

양윤희로서는 충분히 걱정할 만한 부분이긴 했지만, 저렇듯 분노할 일은 아니었다.

양윤희의 분노에 도리어 대찬의 의구심이 더 깊어졌다.

대찬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혹시 양윤희 씨도 뭘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대찬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상상력이 너무 풍부해진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현실이 상상을 뛰어넘는 일은 잦았다.

대찬의 상상력이 꺼져가는 그의 호기심에 거푸 장작을 던져주었다.

양윤희를 방문하고 며칠 후, 홍은주는 오강석을 만나러 갔다.

오강석이 홍은주에게 말했다.

“앞으론 오지 않는 게 좋겠어.”

“네? 왜요?”

“…이유는 묻지 말고, 앞으론 오지 마.”

홍은주는 당황했다.

며칠 전만 해도 막걸리 몇 병 받아오라며 친근하던 그였다.

돌변한 태도가 의아했다.

그 얘기는 곧 대찬에게도 전해졌다.

“양윤희 씨를 만난 직후, 오강석 선생님도 그렇게 나왔단 말이지…….”

“이상하죠?”

“네, 이상하네요.”

오강석은 양윤희의 말을 듣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장백주에게 과거가 있듯, 양윤희에게도 과거가 있을 것이다.

대찬은 심호흡했다.

장백주 실장의 눈초리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양윤희의 눈치까지 보게 생겼다.

게다가 유력한 정보원이던 오강석도 대찬과의 교류를 일방적으로 차단했다.

대찬은 우선 이 일을 묻어두기로 했다.

사사발간이 완수된 후, 필래마트 전략기획실에는 인사변동이 있었다.

김태준 사장은 전략기획실장인 도진석 상무를 다른 부서로 전보시켰다.

그리고 서원웅 부실장을 전략기획실장에 임명했다.

부실장은 오직 서원웅만을 위해 만들어놓은 자리였으니, 서원웅이 실장이 되자마자 사라졌다.

이렇게 되니 도진석 상무의 위세를 믿고 멋대로 굴던 김영우 차장, 황경원 대리의 신세가 궁색해졌다.

이제 전략기획실은 완전히 서원웅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김태준 사장은 필래마트의 주요 사업들을 전략기획실에 몰아주기 시작했다.

이런 기류를 짐작한 사람들은 서원웅이 김태준의 뒤를 이어 필래마트의 사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중 유력한 사업이 PB상품 기획이었다.

서원웅은 실장으로서 주재한 첫 번째 회의에서 말했다.

“사장님이 상품기획부와 협의해서 공격적으로 PB상품 기획안을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한태윤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우리가 조금 소극적이긴 했죠.”

PB상품은 유통업체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제품을 의미했다.

필래마트의 경쟁업체들 역시 자사만의 브랜드를 내걸고 제품을 생산, 판매하고 있었다.

PB상품은 유통업체가 직접 기획하고 생산한다.

그런 만큼 기존 제품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질을 보장할 수 있었다.

경기가 위축되면서 소비자들은 알뜰한 쇼핑을 원했다.

그런 심리 탓에 PB상품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공격적으로 PB상품을 기획하라고 한 김태준 사장의 지시는 적절했다.

오히려 늦은 편이었다.

한태윤 과장은 팔짱을 끼면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PB상품 기획이 녹록한 일은 아닙니다. 특히 실장님처럼 착한 캐릭터에게는 더더욱 그렇죠.”

“…그러게 말입니다.”

서원웅은 한태윤 과장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 저렴한 가격에 좋은 질로 무장한 PB상품의 이면에 구린내 나는 착취가 숨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명목상 PB상품은 유통업체가 생산하지만, 생산설비를 갖춘 유통업체는 거의 없었다.

외부업체에 하청을 주기 마련이었다.

물론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부분의 외부업체들은 중소기업이었다.

좌중은 모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 허운이 말했다.

“하지만 고상하고 착하게만 굴어봤자 알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위마트와 업하우스 쪽에서는 거의 걸레 쥐어짜듯 뽑아내고 있어요.”

유채경도 조심스럽게 허운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청업체의 사정만 들어주다가는 우리만 손실을 떠안게 될 거예요.”

한태윤 과장 역시 현실의 벽 앞에 순응하는 쪽을 주장했다.

“사장님은 숫자만 보실 겁니다. 위마트와 업하우스에 견주어 숫자가 모자라다면, 실장님, 그리고 우리 팀의 앞날이 밝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죠, 아무래도…….”

서원웅의 낯빛이 어두웠다.

현실은 전쟁터였다.

성큼성큼 따라붙고 있다지만, 여전히 필래마트는 위마트와 업하우스에 뒤지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윤리니 도덕이니 따지는 건 어수룩한 일이었다.

흡사 적군이 강을 다 건널 때까지, 진지를 다 구축할 때까지 정정당당만 외치다가 쓰디쓴 패배를 맛본 춘추시대의 송나라 양공의 꼴이 날지도 모른다.

서원웅은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 과장은 어떻게 생각해?”

“다른 분들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서원웅은 맥이 빠졌다.

대찬이라면 용케 빠져나갈 묘책을 마련해줄 줄 알았다.

“역시 남들 하는 것처럼 하는 수밖에 없나.”

축 처진 서원웅을 보고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시작도 안 했는데 힘 빠질 거 없잖아요. 아직 기획 단계입니다, 기획.”

그 말에 허운이 적극 찬동했다.

“조 과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다 보면 좋은 방책이 떠오를 거예요.”

“실장님이 힘을 내야 우리도 힘내죠!”

김산호도 웃으면서 서원웅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그 말을 듣고 서원웅도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선발주자들의 전략과 노하우를 알아보도록 하죠.”

“미투전략, 가장 안전한 방법이죠.”

한태윤 과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 이미 성공한 전략을 그대로 따라하는 미투전략은 어느 업계에서나 횡행했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별도의 연구비도 들지 않는다.

대찬은 자신의 앞에 널브러진 서류를 착착 정리하며 첨언했다.

“미투로 끝나선 안 되겠죠. 타사의 성공사례를 기반으로 해서 더 발전적인 전략을 수립하도록 해요.”

필래마트에도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PB 브랜드가 있었다.

이름은 필초이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대찬은 필초이스의 잘 팔리는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를 견학하기로 했다.

안양의 한 업체가 생산하는 치즈듬뿍 돈가스는 필초이스 제품 중 가장 인기가 좋았다.

필초이스 제품이 경쟁사에 밀리는 와중에 치즈듬뿍 돈가스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자연산 치즈가 풍부하게 들어있어 소비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 제품은 한 중소식품업체에서 위탁생산되고 있었다.

대찬을 위해 상품기획부 장 대리가 안내를 자청했다.

단체서명 소동 때부터 맺은 좋은 인연이 잘 이어져오고 있었다.

“여기가 치즈듬뿍 돈가스를 생산하는 청명식품 공장입니다.”

“그렇군요.”

명성에 비해 공장은 허름하고 규모도 작았다.

필래마트 본사 과장이 왔다는 소문을 들은 사장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연락 받았습니다. 청명식품 장승필 사장입니다.”

“필래마트 조대찬 과장입니다.”

장승필 사장과 대찬은 명함을 교환했다.

“자,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다과라도 드시면서 말씀 나누시죠.”

“다과는 괜찮습니다. 견학차 온 것이니 너무 마음 쓰실 거 없습니다.”

대찬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장승필 사장의 긴장은 영 풀리지 않았다.

장승필 사장은 직접 대찬을 안내했다.

본사 직원이 방문했다고 엄청 으름장을 놓은 모양이었다.

제품을 생산하는 청명식품 직원들은 필요 이상으로 위생에 신경 쓰고 있었다.

빵가루를 묻히는 직원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탄압을 받는 여성처럼, 위생복부터 해서 온몸을 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찬이 지나갈 때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잔뜩 긴장했다.

‘무슨 탐관오리가 된 기분인데.’

대찬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작업현장 견학은 이쯤이면 됐습니다.”

“아, 그럼 술이라도 한잔 대접할까요? 너무 이른 시간인가? 하하…….”

“아닙니다. 사장님하고 단둘이 말씀 좀 나누고 싶은데.”

대찬의 말에 장승필 사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 예에? 무, 무슨 이유로…….”

“긴장하실 거 없습니다. 나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예. 그럼 이쪽으로…….”

장승필 사장은 대찬을 사장실로 안내했다.

황경원 대리도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대찬은 그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단둘이라고 했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장승필 사장을 들여보내고 매몰차게 사장실의 문을 닫았다.

장승필 사장은 여전히 경직된 모습이었다.

대찬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사장님.”

“예, 옙, 과장님.”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외국인이 이 모습을 보면 과장이 사장보다 높은 직급이라고 여길 만했다.

“필래마트와 청명식품 사이에 계약이 공정하게 이뤄졌나요?”

“예? 예. 물론…….”

장승필 사장은 말끝을 흐렸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래도 됩니까?”

“네. 본사 전략기획실에서는 PB상품에 대한 전면적인 혁신에 나서고자 합니다. 사장님이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야 병폐를 시정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논의할 수 있습니다.”

장승필 사장은 주저했다.

그가 지금까지 대해온 본사 직원은 상종 못할 종자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오고, 은근히 뒷돈이나 술접대를 요구하며 사리사욕까지 챙기던 작자들이었다.

대찬의 태도가 이전의 본사 직원들과 다르긴 했지만 여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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