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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63화 (162/556)

난 할 수 있어 163화

정말 시험이었다면 담백하게 말할 일이다.

필요 이상의 공포감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서인태 과장에게 은밀히 감시를 지시했다.

일부러 대찬이 오강석과 접촉하도록 뒀다기에는 쓸데없고 자질구레한 품이 많이 들었다.

대찬의 결론은 이랬다.

수정액으로 지워진 연락처는 장백주 실장의 실수다.

의도하지 않게 치부를 들켜버렸다.

대찬은 그 치부의 맨얼굴을 보고 싶었다.

홍은주에게 그 역할을 부탁했다.

홍은주는 서대문구 홍제동의 한 헬스클럽에 나갔다.

오강석은 일주일에 세 번, 그곳에서 운동을 한다고 대찬에게 귀띔해주었다.

그는 열심히 런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었다.

스포츠맨 기질이 있는 그는 적잖은 나이에도 쾅쾅 열심히 달렸다.

홍은주가 그 옆 런닝머신 위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걷듯이 뛰며 정면을 본 채로 말했다.

“조 과장님이 보내서 왔어요.”

그러자 시속 15킬로미터로 뛰던 오강석이 6킬로미터로 낮췄다.

홍은주도 빠른 걸음 정도로 운동했다.

오강석은 대찬의 이름을 듣자마자 툴툴거렸다.

“그 녀석,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호기심이 왕성하신 분이라서요.”

“호기심이 과하면 다쳐.”

“그건 과장님이 감당하실 문제예요.”

“뭘 물어봐달라던가?”

홍은주는 주위를 둘러봤다.

조용하게 탁 트인 공간이 불안했다.

“귀 밝으세요?”

“엉? 어, 그런 편인데…….”

홍은주는 오강석을 한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한 떼의 아줌마들이 진동 다이어트 기구, 소위 덜덜이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 웃음소리는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 쩌렁쩌렁했다.

아들이 이번에 중간고사에서 평균 90점을 맞았다.

남편이 보너스를 받아서 밍크코트를 새로 샀다.

오늘 편의점에 갔더니 아르바이트생이 나더러 30대 아니냐고 하더라.

저마다의 자랑거리를 남들 다 들으라는 듯 떠들어댔다.

그 옆에 가니 귀가 먹먹해졌다.

홍은주가 큰 목소리로 오강석에게 물었다.

“들리세요?”

“…뭐 대충……. 구구절절하게는 얘기 못하겠군.”

홍은주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장백주 실장이 조 과장님을 감시하신대요.”

“어째서?”

“선생님이랑 만나는 걸 알았나봐요.”

오강석은 피식 웃었다.

“그럼 그럴 만하군.”

“조 과장님은 장백주 실장이 그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세요.”

“어지간히 못살게 굴었어야지.”

“네?”

“내가 양윤희랑 미국에 있을 때, 그때 그 친구 패악질이 장난 아니었거든?”

“패악질이요?”

오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양윤희가 미국으로 떠난 후로도 장백주 실장은 자주 그들을 찾아왔다.

김인준과 홍상기가 중도 귀국한 이후, 장백주 실장은 아예 미국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뻔질나게 오강석과 양윤희를 찾아왔다.

장백주 실장 스스로 일컫길, 자신이 오강석과 양윤희의 전담 마크맨이라고 했다.

“그 자식, 지랄맞았지.”

오강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장백주는 집요하고 고약했다.

“내가 부회장님한테 잘 보고드려야 복직할 수 있는 거 알지?”

그는 복직을 무기로 오강석을 멋대로 부렸다.

골프카트 기사로 부려먹는가 하면, 좌우에 여자를 끼고 술 마시는 바에 가서 대금을 모두 지불하게 했다.

그의 패악은 비단 오강석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양윤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강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는 바이어 접대를 양윤희에게 시키더군. 양윤희의 외모가 반반하다면서 말이야.”

“회장님이 사랑하던 사람인데 멋대로 그럴 수가 있나요?”

“끈 떨어진 뒤웅박이라고 확신한 거지. 높으신 분들의 사랑은 쉽게 변질되니까.”

“서원웅 부실장님이 후계자로 왕왕 거론되는 걸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은데…….”

“장백주 그 인간의 예상보다도 더 끈끈했던 거지. 엄연한 불륜이지만, 회장님의 감정은 생각보다도 끈끈했던 거야…….”

“지금까지 복직이 좌절된 마당에 왜 침묵하고 계셨어요? 장백주가 그런 인간이라고 시원하게 소리라도 지를 수 있잖아요.”

오강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필래그룹의 비서실장쯤, 그것도 실세 비서실장쯤 되면 나 같은 놈팡이의 입을 틀어막는 건 일도 아니야.”

“…….”

“나는 신세까지 망쳐가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배짱은 없는 인간이야.”

“…그렇군요.”

오강석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비겁한 새끼야. 천하의 개새끼야…….”

“장백주 실장이 나쁜 사람인 거죠.”

오강석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내가 개새끼야. 그랬으면 안 됐어. 최소한 여태 입을 다물어선 안 됐어…….”

“…….”

“나는 개새끼야! 구제 못할 쓰레기야!”

오강석의 외침이 주변에서 떠들던 아줌마들의 수다보다 쩌렁쩌렁했다.

일순 아줌마들은 수다를 멈추고 오강석을 바라봤다.

오강석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 눈물을 흘렸다.

홍은주는 그런 오강석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

몇 마디 위로를 보탠들 위로가 될 리 없었다.

홍은주는 대찬에게 들은 그대로를 전달했다.

대찬의 표정 역시 착잡했다.

홍은주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양윤희 씨는 왜 침묵하는 걸까요? 장백주 실장의 일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처지잖아요.”

“그럴 처지가 아니에요.”

“왜죠?”

“장백주 실장은 회장님의 핵심측근이에요. 만약 양윤희 씨가 장백주 실장을 공격해서 적으로 돌리면…….”

대찬이 여기까지 말하자 눈치 빠른 홍은주도 행간을 짚었다.

“서원웅 부실장님의 후계구도에 차질이 생기는군요.”

“치명상이죠. 가뜩이나 정통성에서 밀리는 판에 내부의 조력자인 장백주 실장과 척을 지면 그걸로 후계싸움은 끝입니다.”

“그래도 회장님이 이 사실을 알면 장백주 실장을 내치지 않을까요?”

“장백주 실장은 그저 단물 빠지면 뱉는 껌이 아닙니다. 장백주 실장을 내치면 회장님 역시 입지가 상당히 줄어듭니다.”

홍은주는 마뜩찮은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더 해볼 도리가 없었다.

서원웅에게도 알릴 수도 없었다.

어머니를 희롱한 자에게 의탁해야 한다는 현실이 그를 고뇌로 몰아넣을 터였다.

대찬은 그저 모르는 게 약이라는 오래된 격언을 변명으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홍은주 씨, 이건 나랑 홍은주 씨 둘만 아는 일입니다. 아셨죠?”

“분별없이 떠들고 다니면 저한테도 독이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대찬과 홍은주는 씁쓸하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사사발간TF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해산했다.

깔끔한 디자인과 알찬 내용이었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윗선에서도 흡족해한다는 전언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특히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청수 회장에게 필래그룹은 가업이었다.

집안사람 둘이 나서서 가업의 역사를 편찬했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서청수 회장은 친히 서인태 과장과 대찬을 회장실로 불러들여 치하했다.

금일봉도 잊지 않았다.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찬에게 악수를 건넸다.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대찬은 서청수 회장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활짝 웃는 얼굴이 사진과 겹쳐 보였다.

대찬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뒤에서 장백주 실장이 대찬을 향해 눈빛을 벼렸다.

대찬은 그와 한참 눈을 맞췄다.

지금 당장은 입을 다물어주지만, 언젠가는 음지에 꽁꽁 감춰 곰팡이가 번진 치부에 밝은 햇볕을 쪼여주리라 다짐했다.

대찬은 홍은주를 통해 오강석과 꾸준히 교류했다.

비단 오강석이 쓰임새가 있는 까닭만은 아니었다.

화를 자초한 건 오강석 본인의 탐욕이었다.

하지만 그럴지언정 장백주 실장에게 당한 오욕의 세월을 마냥 냉랭한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처자식도 없이 쓸쓸히 살아가는 중년남자는 동정심이 동하기에 족했다.

홍은주 역시 대찬의 주문이 없음에도 종종 오강석을 찾아가 살뜰히 살폈다.

대찬은 서원웅의 친모인 양윤희에게도 관심이 갔다.

질곡의 세월을 정작 아들인 서원웅은 모르고 있다.

그리고 한동안 모를 것이다.

그러니 서원웅의 절친한 친구의 자격으로, 또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의 책임감으로 대찬은 양윤희를 생각하기로 했다.

대찬은 퇴근길에 불쑥 서원웅에게 말했다.

어머니를 뵈러 가자고 했다.

서원웅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 뵈러 가자고?”

“응.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뵀잖아.”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찾다가 갑자기 왜?”

“그냥. 너희 아버지는 회사 상사라고 뻔질나게 뵀는데 어머니께는 그러지 못해서.”

서원웅은 돌연 눈빛을 벼렸다.

“너, 우리 엄마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있지?”

대찬은 속으로 움찔했다.

무디고 무딘 서원웅이 회사에서 좀 굴러먹었다고 제법 눈치가 날카로워졌다.

대찬은 즉각 부정했다.

“아니.”

“아닌 게 아닌데. 뭐야, 빨리 말해.”

“아니라니까. 쓸데없는 의심병만 도져서는.”

대찬은 툴툴거리는 것으로 서원웅의 의심을 떨쳤다.

“뭔가 있긴 있는 게 분명한데……. 좋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줄게.”

“넘어가주기는 개뿔. 어머니 혼자 심심하시니까 허구한 날 보는 아들 대신 잘생긴 아들 친구 얼굴 좀 보여드리려고 그런다.”

서원웅의 입사 이후, 양윤희는 강화도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양윤희의 존재가 자꾸 드러나게 되면 서원웅의 회사생활, 더 나아가 후계구도에 악영향을 준다.

이를 염려한 서청수 회장이 그녀에게 먼저 강화도행을 제안했다.

충분히 짐작하고 있던 양윤희도 군말 없이 강화도로 떠났다.

주말, 대찬은 서원웅과 함께 양윤희를 찾았다.

겨울의 문턱이었다.

김산하가 신경 써서 골라준 겨울옷을 지참하고 나섰다.

“엄마, 저 왔어요.”

서원웅의 인사에 양윤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팔자주름만 조금 더 깊어졌을 뿐, 사진 속의 얼굴과 판박이였다.

양윤희가 아들을 냉대했다.

“뭐 하러 왔니?”

“뭐 하러 오긴, 엄마 보러 왔지.”

서원웅은 민망하게 웃었다.

대찬도 겸연쩍은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조대찬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먼 길 오셨네.”

양윤희는 대찬을 향해서는 따뜻이 웃었다.

온도 차가 느껴졌다.

양윤희는 다시 서원웅을 향해서는 차갑게 말했다.

“앞으로 명절 말고는 가급적 찾지 말거라.”

이쯤 되니 어머니를 뵈러 가자며 제안했던 대찬이 다 민망할 정도였다.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냉담한 이유를 대찬은 물론 서원웅도 알고 있었다.

서원웅이 뻔질나게 드나들면 양윤희가 강화도로 온 보람이 없어지는 까닭이었다.

때문에 겉으로 엄한 태도를 견지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리라 대찬은 생각했다.

“추운데 얼른 들어와요.”

그렇게 권하는 양윤희의 목소리에는 기품이 실려 있었다.

대찬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김산하가 골라준 겨울옷을 선물로 내놨다.

“취향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자태가 고우셔서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어머, 예뻐라. 남자가 고른 건 아니다, 그죠?”

양윤희의 눈썰미에 대찬은 웃었다.

“애인이 골라줬습니다.”

“애인 안목 한번 끝내주네요.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양윤희는 옷이 마음에 드는지 옷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녀가 기뻐하니 대찬도 기뻤다.

“선물을 받았으니 커피라도 맛있는 걸로 대답해야지. 원웅아.”

“응.”

양윤희는 서원웅에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차 타고 5분 정도 가면 바닷가에 카페 하나 있어. 거기 라떼가 맛있거든? 가서 좀 사와. 스콘도 맛있으니까 넉넉히 사오고.”

“아예 같이 가서 드시는 게 좋지 않아요? 오는 길에 식을 일도 없고.”

“웬만하면 너랑 같이 있는 걸 외부에 보이기 싫구나.”

“강화도 깡촌에서까지 그럴 건 없잖아요.”

“언제부터 그렇게 말대답하는 버릇이 들었니? 출세 좀 했다, 이거야?”

어머니의 으름장에 서원웅은 찔끔 움츠리고는 공손히 카드를 받았다.

대찬이 따라나서려 하자 양윤희가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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