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62화
대찬은 발뒤꿈치가 뻣뻣하게 굳는 듯했다.
“…예. 뭐, 어느 정도.”
“잠깐 1층 커피숍에서 얘기 좀 할까?”
장백주 비서실장은 대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냉랭한 태도였다.
커피를 홀짝이던 장백주 비서실장은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삐딱한 시선으로 대찬을 응시했다.
“내가 죽은 사람이라고 했잖아.”
“…예?”
“멋대로 뒤지고 다니던데.”
뒷목이 뻐근했다.
알고 있었나.
변명을 둘러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죽었다고 하면 죽은 거지. 그래, 소득은 좀 있었고?”
“없었습니다.”
들은 그대로를 이실직고할 수 없었다.
오강석 이하 장백주 비서실장이 말하는 ‘죽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
“그래? 자네 취재력이라면 충분히 행간을 짚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실망이군.”
“실장님이 알고 계시니 소득이 없는 게 도리어 다행입니다.”
장백주 비서실장은 후후 웃었다.
“자네가 어디까지 들었는지 모르겠네만, 나는 자네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여기겠네. 그럴 가능성이 실제로도 크고.”
“제가 당부를 저버렸으니 실장님의 곡해도 제 책임입니다. 감내하겠습니다.”
“자네가 죽은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기를 바랐다면 수정액으로 처리하지 않았을 거야. 종이를 찢어버렸겠지.”
“절 시험하신 겁니까?”
장백주 비서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사냥개여야만 해. 사냥개는 사냥감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사냥감 대신 들판의 잡초나 버섯에 코를 킁킁거리는 건 사냥감의 태도가 아니야.”
“말씀인즉슨, 저는 시험에 떨어졌군요.”
“응.”
“끓는 솥에 들어가야 합니까?”
장백주 비서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긴 아깝지. 자네한테 들인 공이 얼만데.”
“그럼…….”
“교훈을 얻었길 바라네. 죽은 사람들의 사연을 들었다면 알아들었을 거야. 사냥개가 한눈을 팔면 어떻게 되는지.”
“무슨 뜻인지 알아는 들었습니다.”
“좋아.”
장백주 비서실장은 일어나 휘적휘적 자리를 떠났다.
대찬은 그의 식어가는 찻잔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네놈 새끼 사냥개가 아니야. 나는 개가 아니야.’
대찬은 찻잔의 손잡이를 꼭 쥐었다.
‘지금 개 노릇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폭발물 탐지견 쪽이지.’
대찬도 일어나 휘적휘적 사무실로 돌아갔다.
사사발간 업무는 바쁘지 않았다.
바쁘지 않으니 잡념이 무시로 일었다.
오강석과 양윤희에 대한 잡념이었다.
‘아니야. 더 신경 쓰지 말자.’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장백주 비서실장은 명백히 경고했다.
옐로카드를 거스르면 다음은 레드카드다.
불쑥 튀어나오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 된다.
대찬은 우선 업무에 집중했다.
사사발간TF는 성공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들이 흘린 땀은 ‘필래 60년’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한 권은 필래그룹의 역사와 비화를 정리한 글 위주의 책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권은 필래그룹의 중요한 순간을 담은 사진들이 담긴 화보집이었다.
그 화보집에는 물론 대찬이 홍상기로부터 얻은 사진은 담기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서청수 필래제과 사장과 그의 비서 양윤희.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인태 과장은 대찬에게 악수를 청했다.
대찬은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과장님도 애쓰셨습니다. 특히 컬처인더스트리 쪽 분들이 고생 정말 많이 하셨어요.”
“그래도 조 과장님이 팀장으로 계셔서 수월했습니다.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게 팀을 잘 이끌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비행기 태우시는 걸 보니 밥도 아주 비싼 걸로 드시고 싶은 모양입니다.”
“아, 당연하죠. 저번에 바람까지 맞히셨으니 이자는 양주로 받겠습니다.”
“누나한테 돈 좀 꿔야겠는데요.”
대찬의 너스레에 서인태 과장은 난색을 표했다.
“그럼 제 이번 달 용돈 탈탈 털립니다! 제가 사는 꼴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양주는 뺍시다.”
대찬은 서인태 과장과 넉살 좋게 농담을 나누며 퇴근했다.
대찬은 수고한 다른 직원들에게 법인카드를 넘기는 걸 잊지 않았다.
“가장 좋은 상사가 법인카드만 남기고 사라지는 상사라면서요? 오늘 가장 좋은 상사 한번 하겠습니다.”
“아, 왜요! 과장님도 같이 한잔하셔야죠.”
“그렇게 절 나쁜 상사로 만들고 싶으세요?”
직원들은 입을 모아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딜레마예요. 법인카드만 주고 빠지는 게 좋다는 걸 아는 분은 애초에 좋은 상사시라고요. 그걸 모르는 나쁜 상사만 자리에 죽어라 끼고요.”
“사탕발림에 안 속습니다. 서 과장님까지 껴안고 제가 사라져 줄 테니까 편하게 자리 가지세요.”
대찬은 직원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인태 과장과 따로 만났다.
낙엽 쌓인 스산한 인도를 걸으면서 대찬이 말했다.
“우리 처음으로 더블데이트나 해볼까요?”
“친누나가 애교 떠는 모습을 라이브로 보고 싶으세요?”
서인태 과장의 말에 대찬은 곧바로 후회했다.
“아, 그건 좀…….”
“오늘은 조 과장이랑 오붓하게 마시렵니다.”
“조 과장이 아니고 처남이요.”
서인태 과장은 대찬을 흘끗 보고 픽 웃었다.
“그래, 처남이랑.”
둘은 포장마차 좁은 테이블에 구겨 앉았다.
꼼장어랑 우동을 앞에 두고 서로 소주를 따라주었다.
시시한 자기 여자 얘기를 주고받던 와중에 서인태 과장이 대찬을 또렷이 응시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대찬도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처남, 혹시 회사에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뇨, 딱히. 왜요?”
“아니, 비서실장님이 아까 나한테 귀띔을 하길래.”
장백주 비서실장이……?
대찬은 건조한 입술을 소주로 축였다.
“…뭐라고 하셨는지 여쭤봐도 돼요?”
“처남이 수상한 짓을 하면 바로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하던데.”
“…….”
대찬은 들었던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술맛이 싹 달아났다.
서인태 과장은 우려하는 눈빛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실장님이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내가 장가들어도 처남을 신뢰 못하신다는 건가…….”
“그러게 말입니다.”
서인태 과장은 대찬의 손을 꼭 붙들었다.
“걱정하지 마. 실장님한테 따로 보고 안 할 테니까. 그 이전에 처남이 수상한 짓을 할 리도 없지만 말이야.”
“고맙습니다.”
대찬은 서인태 과장에게 감사를 표하는 순간에도 그를 의심했다.
믿어도 될까.
서인태 과장도 어쨌거나 필래 서씨다.
이렇게 안심시켜 놓고 내 뒤를 캐는 건 아닐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아닐지라도 나중에 변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서인태 과장이 순수한 믿음을 보여주는 이 와중에도 의심이 불쑥 솟았다.
자괴감이 들었다.
대찬은 부러 더 세게 서인태 과장의 손을 잡았다.
“매형.”
“응?”
“내가 진짜 수상한 짓 하고 다니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 글쎄, 진짜 뭐 있는 거야?”
“만약에요.”
“음…….”
“장백주 실장님한테 바로 일러바칠 거예요?”
서인태 과장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곰곰이 고민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농담으로 받아칠 것이다.
그런데 서인태 과장은 진지하게 그 상황을 가정하고 고민했다.
대찬은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매형은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서인태 과장은 웃으면서 결론을 말했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는 편이 좋겠어. 요즘에는 본가보다는 처가에 더 마음이 끌리거든?”
“감동인데요.”
“처남은 내가 그러면 안 도와줄 거야?”
“물론 도와드리죠.”
대찬의 대답은 서인태 과장과는 달리 재빨랐다.
진심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서인태 과장은 웃으면서 건배를 권했다.
“자, 우리 잘 지내자.”
“네, 매형.”
대찬은 기분 좋게 서인태 과장과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개운하지 않았다.
장백주 실장의 지나친 감시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대찬을 압박할수록 대찬은 더 활개를 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장백주 실장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대찬 자신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건 위험수위가 너무 높았다.
서인태 과장에게까지 약을 쳐놓는 장백주 실장을 생각하면 대찬을 감시하는 시선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했다.
대찬이 선택한 사람은 홍은주였다.
“홍은주 씨, 오늘 점심 같이 먹을까?”
“예? 다른 팀원들이랑은 같이 안 드시고요?”
“홍은주 씨한테 할 말 있어서.”
홍은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아닌데. 조 과장님 애인 있다고 했는데…….
대찬은 홍은주가 품은 잠깐의 상상을 불식시켰다.
“괜히 치근덕거리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아, 네…….”
대찬은 홍은주에게 괜찮은 점심을 사주었다.
홍은주가 식사를 마쳐갈 즈음 용건을 꺼냈다.
“은주 씨, 내가 부탁 좀 하려는데.”
“부탁이요? 네, 하세요.”
“가벼운 부탁이 아니에요.”
홍은주는 눈을 깜빡거렸다.
살짝 굳은 대찬의 얼굴을 보고 예삿일이 아니라는 걸 금세 파악했다.
홍은주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들어나 볼게요.”
“들으면 무조건 들어줘야 하는 부탁이에요.”
홍은주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그러게요.”
둘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홍은주는 옷깃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불법만 아니면 할게요. 과장님한테 진 빚이 많으니까.”
“무르기 없깁니다?”
대찬이 재차 묻는데도 홍은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뭘 부탁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도 나쁜 기회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회?”
“네. 저는 계약직이었어요.”
뜬금없는 말에 대찬은 얼떨떨했다.
“그런데요?”
“과장님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계약직일 거예요.”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받은 은혜가 커요. 과장님한테 진 빚이 많다고요.”
“꼭 그렇게 부담 느끼실 것까진 없는데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과장님 덕분에 정규직이 됐으니 이러나저러나 저는 과장님의 사람이에요. 저도 이 정글 같은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한쪽에 붙어야 해요. 붙어야 한다면 조 과장님 쪽이죠, 당연히.”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어중간하게 있다가 내쳐지느니 차라리 도박을 하죠. 잘 해내면 입김 타고 승승장구할 수도 있잖아요?”
홍은주가 그렇게 말해주면서 대찬이 단순히 홍은주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대찬은 자신이 하기엔 제약이 따르는 일을 홍은주에게 넘기고, 홍은주는 보은 겸 승승장구를 위한 배팅을 할 기회를 얻었다.
상호 간에 수지맞는 거래가 되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군요.”
“조 과장님을 믿으니까요. 지금까지 과장님이 손대서 탈 난 건 없으니까.”
“불운한 1번 타자가 될 수도 있어요.”
“그건 순전한 운의 탓이니까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요.”
대찬은 홍은주의 시원시원한 태도에 웃음을 지었다.
“그럼 우리, 한 배 탄 겁니다?”
“잘 부탁드려요, 선장님.”
홍은주도 밝게 웃었다.
장백주 실장은 무언가 숨기고 있다.
수정액으로 지워진 연락처는 장백주 실장이 운운했던 것처럼 고의적인 시험이 아닐 것이다.
대찬은 확신했다.
대찬이 수정액으로 지워진 연락처를 발견하자 장백주 실장은 당황했다.
미리 준비한 일이라면 당황할 이유가 없다.
그가 나중에 불러다 시험이었다며 단단히 엄포를 놓은 건 구차한 변명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