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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61화 (160/556)

난 할 수 있어 161화

오강석은 대찬과 마주앉았다.

“용건이 뭐야?”

“회장님과 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전직 직원들 사이의 과거를 알고 싶습니다.”

“그게 자네에게 무슨 가치가 있지?”

“아직 모릅니다.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 그걸 알고자 합니다.”

“일개 과장에게 가치 있을 정보는 아니야. 특히 회장님 지시를 빙자해서 들쑤시고 다닐 만큼은 절대 아니지.”

“네, 그렇겠죠. 제가 일개 과장이라면.”

오강석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것보다 대단한 존재라는 건가? 정말인지 자의식 과잉인지 잘 모르겠군. 도리어 자네한테 독이 될 얘기야.”

“알려주십시오. 듣고 싶습니다.”

“내가 왜? 나한텐 자네한테 얘길 들려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듣고 싶습니다.”

오강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나한테 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이득을 주든가. 한 돈 일이천이라도 들고와봐. 그럼 귀띔을 해줄지도 모르지. 헐값이야.”

“그럴 돈은 없습니다.”

“자네가 일개 과장이 아니라며? 그럼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을 텐데.”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없던 일로.”

오강석은 대찬에게서 매몰차게 시선을 거뒀다.

“제가 선생님에게 막대한 이득을 안겨드릴 순 없습니다만, 막대한 피해는 안겨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얄팍한 협박이 통할 것 같은가!”

대찬은 품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홍상기 선생님께 받은 사진입니다. 보시다시피 전직 직원이 아니고서야 갖고 있기 힘든 사진이죠.”

“……!”

“말씀 안 해주시면, 회장님께 이거 선생님이 제보한 사진이라고 일러바칠 겁니다.”

오강석은 콧방귀를 뀌었다.

“협박도 똑똑하게 해야 통하지. 자네가 동분서주 수소문해서 강탈한 사진이라고 항변하면 돼. 홍상기 그 사람이 자네 편을 들겠나? 그 사람하고 나는 아삼륙이야!”

“홍상기 선생님은 자기가 사진을 줬다고 하는 것보다 선생님이 사진을 제보했다는 쪽을 더 안전하게 여기실 텐데요.”

“이런 고약한……!”

“그리고 회장님은 선생님보단 저를 더 신뢰하시겠죠. 악연으로 얽힌 사이시잖습니까. 저는 회장님의 충견이거든요.”

오강석은 불쾌한 듯 콧잔등을 씰룩였다.

“젠장맞을 자식!”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대찬은 그렇게 받아치고 오강석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회장님과 어떤 사이셨습니까?”

“…….”

오강석은 불쾌한 표정만 짓고 침묵했다.

그러다 결심이 선 듯 푹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들은 건 내가 말하는 게 아니야. 유령이 말하는 거야.”

“물론입니다. 선생님을 건드리면 저도 피 봅니다.”

“나, 그리고 자네가 만나고 온 박필봉, 김인준, 홍상기는 회장님의 부하들이었어.”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나머지 분들은…….”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 사람들은 딱히 핵심이 아니었어.”

“자네가 만난 박필봉, 김인준, 홍상기, 그리고 내가 핵심이었지. 그래서 여태 이사도 못 가고 있잖나. 반강제로.”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강제라면…….”

“요시찰인물인 거야. 한동안은 감시 아닌 감시도 받았지. 뭐 이만큼 세월이 흘러서 지금까지 그러진 않지만, 굳이 거주지를 옮겨서 괜한 의심 살 필요는 없으니 여태 이러고 사는 거야.”

“아아…….”

“우리가 한창 회사에 다닐 때 회장님은 필래제과 사장이었지.”

“네.”

대찬은 오강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서청수 사장 밑에는 양대 라인이 있었지. 나를 비롯한 박, 김, 홍이 한 패였어.”

그들이 나란히 같은 신세인 걸 보고 대찬은 추측했다.

저렇듯 몰락한 파벌이 있다면 출세한 파벌도 있을 것이다.

그 출세한 파벌의 일원들이 지금 서청수 회장의 측근 라인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대찬이 오강석에게 물었다.

“혹시 반대 파벌에는 김태준, 왕윤수, 장백주가 있지 않았습니까?”

“맞아. 두뇌회전이 빠르군.”

오강석은 옛날 얘기에 마음이 갑갑해졌는지 두 번째 담배를 물었다.

“우리는 사사건건 대립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립했던 게 바로 저 여자 때문이었어.”

오강석은 사진 속의 여인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대찬은 그 이름을 발음했다.

“양윤희…….”

“그래. 서청수 사장이 사랑했던 여자야. 아마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서청수 사장 비서였어.”

“왜 양윤희 이분 때문에 대립하신 겁니까?”

“그때 서청수 사장은 저 여자한테 반쯤 미쳐 있었어. 마누라하고 헤어지고 저 여자랑 결혼할 마음까지 품었으니까.”

“반쯤이 아닌 것 같군요.”

오강석은 피식 웃었다.

“난리가 났지. 더군다나 그땐 창업주인 서광구 회장이 후계자를 지목할 즈음이었어.”

“경쟁자는?”

“뭘 묻나. 당연히 서청규지.”

“아…….”

“서광구 회장은 서청수 사장을 마음에 두고 있었어. 그런데 저 여자가 걸림돌이었지. 서광구 회장은 서청수 사장한테 단단히 엄포를 놨어.”

대찬은 그 엄포의 내용을 능히 예측했다.

“아마도 이러셨겠죠? 양윤희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으면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겠다.”

오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모아놓고 어떻게 할지 묻더군. 양윤희를 곁에 두고 자력으로 투쟁해 회장 자리를 얻어내느냐, 아니면 양윤희를 포기하고 쉬운 길을 가느냐.”

“선생님께서는 양윤희 씨를 지키는 쪽에 서셨겠군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쯤 양윤희가 서청수의 정실부인 역할을 했을 테니까.

서원웅이 서청수의 적자가 됐을 테니까.

“응. 다른 쪽은 양윤희를 버리라고 했지.”

“누가 봐도 양윤희 씨를 버리는 쪽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냉혹한 정글에서 남녀상열지사는 하찮으니까요.”

“맞아. 하지만 양윤희를 버리라고 말하는 건 서청수 사장의 미움을 사는 일이기도 하지.”

“그것도 그렇군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었기 때문에 정조가 왕이 될 수 있었네. 그런데 정조가 왕이 되자마자 뭐라고 했는 줄 아나?”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래. 서청수에게 양윤희는 사도세자 그 이상이었어. 우리는 양윤희를 지키라고 말하는 게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믿었지.”

“결국 회장님은 사랑 대신 옥좌를 택했군요.”

“서광구 회장이 작정하고 서청규를 밀어주기 시작했었거든.”

“그 선택에 따라 선생님은 그대로 옷을 벗어야 했겠군요.”

“서청수 사장이 그렇게 냉혈한은 아니었어. 세가 위축된 정도였지, 옴팡 망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하지만 이미 경쟁에서 뒤처졌다고 생각한 우리는 무리수를 뒀어.”

당시의 오판이 떠오르는 듯 오강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뭡니까?”

“서청수 사장의 사모님을 무너뜨릴 자료를 몰래 모으고 다녔지. 그러면 양윤희를 정실로 세우고, 우리가 세를 되찾을 거라 생각했거든. 멍청했지. 뭘 해보기도 전에 발각됐어.”

“그래서 팽 당하셨고요.”

“팽도 아니지. 간신배를 숙청한 거야. 나를 뺀 나머지는 팽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찬은 오강석이 앞선 셋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실책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회장님이 너무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 완전히 몰락한 우리에게 너무 잔인한 제안을 하시더군.”

“어떤 제안 말입니까?”

오강석은 그때의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

1982년, 서청수가 필래그룹 부회장이 되었다.

오강석은 양윤희를 정실로 세우기 위한 무리수 때문에 회사에서 잘렸다.

그런 오강석에게 장백주가 찾아왔다.

장백주는 오강석과는 달리 승승장구, 부회장의 비서실장이 돼 있었다.

“오 과장, 요즘 지낼 만해?”

“약 올리러 왔으면 1초라도 빨리 꺼지는 게 좋을걸. 죽여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이고, 무서워라.”

장백주는 싱글벙글 웃었다.

“용건이 뭐야?”

“부회장님께서 자네들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주시겠다는군.”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지, 그럼. 일 하나만 잘 해내면 복직시켜주신다고 약속했지.”

“뭐야, 그 일이?”

장백주는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너희가 양윤희를 내세워 일을 위태롭게 했으니, 이걸 바로잡는 일을 해줬으면 해. 그러니까 결자해지지.”

“…….”

“양윤희를 데리고 한 5년만 미국에 가있어. 영감님 죽고 부회장님이 회장 자리에 오르면 복직시켜주실 거야. 돈은 부족하지 않게 보낼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서청수가 무사히 회장이 될 때까지 양윤희를 감시하라는 뜻이었다.

오강석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5년 동안 처자식은…….”

“기러기 아빠 된 셈 쳐. 어차피 당신 마누라랑 사이 별로 안 좋은 거 다 아는데, 뭐.”

“싫다면?”

“그럼 어떻게 될지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당신이 나보다 1년 먼저 부회장님 모셨잖아.”

오강석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그때까지도 재기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미국으로 가지.”

오강석은 양윤희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김인준과 홍상기도 오강석과 동행했다.

박필봉은 거부했다.

그 대가로 그는 필래의 입김이 닿는 곳에 재취직하지 못했다.

일용직을 전전했다.

게다가 필래는 그를 감시하기 위해 거주지를 옮기지 말 것을 권고했다.

말이 권고지, 실은 강요였다.

대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미국으로 가셨지만 결국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믿은 내가 등신이지.”

“안타깝습니다.”

“김인준과 홍상기는 2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갔어. 필래는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못 견딘 호랑이 취급했지. 박필봉이랑 매한가지 신세가 됐어.”

“선생님께서는……?”

“악착같이 버텼어. 웅녀 될 줄 알고 악착같이.”

양윤희와 고된 세월을 함께 버텼다고 했다.

대찬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그럼 지금 부인과 함께 살지 않는 것도 그때의 영향이 있을까요?”

오강석의 광대가 잠깐 꿈틀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곤 못하겠군.”

“힘든 시간이셨겠습니다.”

“…나도 나지만, 양윤희 그 여자가 많이 힘들었지. 나야 지은 죄가 있으니 억울하진 않아.”

“저도 마음이 편치는 않네요. 원웅이가 감내했을 고통을 생각하니…….”

대찬이 서원웅을 말하자 오강석의 눈이 커졌다.

“원웅이, 서원웅 말하는 건가?”

“네, 서원웅.”

“네가 그 친구를 어떻게 알지?”

“선생님이야말로 원웅이를 어떻게 아십니까?”

오강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모르겠나. 미국에서 낳았는데.”

“아, 시기상으로 그렇겠군요. 지금은 필래마트 전략기획실 부실장으로 있습니다. 잘 있습니다.”

“그렇군. 더 승승장구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힘써 돕겠습니다.”

오강석은 대찬을 보고 웃더니 몸을 일으켜 천천히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밥이나 한 끼 하고 가겠나? 차릴 건 없지만서도.”

“아뇨.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강석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단물 다 빨아먹으니 휭 가버리겠단 건가?”

“오래 있어봤자 좋은 거 없잖아요. 선생님도 아시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만남은 들을 것만 남기고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

배웅 나오려는 오강석을 대찬은 한사코 방에 앉혔다.

혹여나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면 큰 화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집 밖으로 나가려던 대찬은 오강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직도 박필봉, 김인준, 홍상기, 그분들과 교류하고 계십니까?”

그 말에 오강석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인생의 가장 괴로운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하고 있으면 고통스러워. 연락 끊긴 지 꽤 되었지.”

“…그렇군요.”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길.

대찬의 기분은 복잡했다.

굴지의 재벌이 된 사람이 그 정도 흠결이야 당연히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있을 줄 아는 것과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박필봉, 김인준, 홍상기, 오강석.”

대찬은 찜찜한 이름들을 불렀다.

“양윤희.”

대찬은 양윤희, 그 이름을 오래 생각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대찬은 어딘가 공기가 달라진 걸 느꼈다.

경직되고 착 가라앉아있었다.

대찬은 영문을 모른 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유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장백주 비서실장이 대찬의 빈자리에 앉아있었다.

본사의 비서실장은 회사 내에서는 슈퍼파워였다.

그와 맞먹는 직원은 열 손가락까지 갈 것도 없이 한 손만 써도 됐다.

그런 판이니 사사발간TF의 직원들은 일동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찬도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장백주 비서실장에게 다가가 허리를 꺾었다.

“비서실장님,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조 과장, 어디 갔다 이제 들어와?”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료 입수 좀 하고 왔습니다. 사진 같은 거요.”

“사진이 그래, 쓸 만하겠던가?”

장백주 비서실장은 웃음을 흘리면서 대찬을 올려다봤다.

그 웃음이 어딘가 석연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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