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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60화 (159/556)

난 할 수 있어 160화

대찬은 미간을 좁혔다.

“비서실장님은 왜 나한테 죽은 사람이라고 그랬을까……?”

“게다가 필래랑은 할 말이 없다니, 더 수상했습니다.”

서인태 과장의 말에 대찬도 동의했다.

얘기를 듣기도 전에 거두절미하고 필래랑은 할 말이 없다니.

그렇다면 필래와 선연이든 악연이든 깊이 얽힌 바가 있다는 뜻이었다.

장백주 비서실장이 굳이 죽은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부터 수상했다.

‘이걸 물어, 말아?’

대찬은 잠시 고민했다.

장백주 비서실장은 서청수 회장의 사람이었다.

즉, 그가 은폐한 박필봉을 찾아가는 건 서청수 회장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과 다름없다.

만일 이 일이 서청수 회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생각보다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판도라가 상자를 연 이래 호기심은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독소였다.

그러나 반대로 호기심은 인류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대찬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는 서인태 과장에게 따로 귀띔했다.

“수정액 칠해진 연락처에 다 전화 좀 돌려 주시겠어요? 연락 닿은 사람들만 추려서 저한테 알려주세요.”

“수정액 긁는 건 다른 사람 시켜도 되죠?”

대찬은 서인태 과장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왠지 여러 사람이 알면 안 될 거 같아서요. 과장님이 수고해주세요. 제가 비싼 밥 사겠습니다.”

“그러시다면야 기꺼이.”

대찬은 웃으면서 외투를 챙겼다.

연락처에 쓰인 박필봉의 집으로 직접 찾아갔다.

전화번호가 그대로라면 집주소도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래된 집들이 빽빽한 장위동의 작은 벽돌집에 닿았다.

대찬이 초인종을 누르자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왔다.

대찬은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고 물었다.

“혹시 박필봉 선생님 되십니까?”

“누구요?”

“저는 필래마트 전략…….”

쾅!

박필봉은 필래의 피읖만 듣고도 철문을 매몰차게 닫아버렸다.

대찬이 닫힌 철문에 대고 소리쳤다.

“선생님! 얘기 좀 해주십시오! 창사 60주년 사사 발간 때문에 찾아뵌 겁니다!”

“사사 발간이든 뭐든 나는 필래랑은 할 말 없다고!”

대찬은 1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호기심이 더 깊어졌다.

그때 서인태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팀장님, 수정액으로 칠해진 30개 연락처 중에서 세 분이랑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중 협조적인 사람은 몇 분이나 되나요?”

“한 분도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분들 주소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서인태 과장은 곧바로 문자를 보내주었다.

대찬은 박필봉의 자택 철문을 흘끗 보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곧장 서인태 과장이 보낸 주소를 찾아갔다.

사전에 전화를 해봤자 경계심만 유발할 테니 무작정 찾아갔다.

다행히 모두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었다.

“김인준, 도봉구 쌍문동 거주……. 여기부터 가볼까.”

목적지를 정한 대찬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역시 무작정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요!”

박필봉 때와 같은 질문이 들렸다.

대찬은 박필봉 때와 다른 대답을 던졌다.

“서청수 회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

김인준은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문이 열렸다.

“회장님이 보내서 왔다고?”

“네.”

“…일단 들어와요.”

김인준은 대찬을 순순히 안으로 들여보냈다.

박필봉은 문전박대, 김인준은 무혈입성.

차이는 서청수 회장의 지시라는 명분이었다.

김인준은 차 한 잔까지 내주는 선심을 보였다.

“회장님이 무슨 일로…….”

“필래그룹 창사 60주년을 맞아서 사사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발간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있으시면 제공해주시겠습니까?”

“…고작 그건가?”

고작 그거?

김인준의 말이 대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인준은 더 큰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래전에 퇴사한 사람이다.

대체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본의 아니게 실망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맡은 업무는 그게 다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본의 아니게 실망을 줘야겠군요. 드릴 게 없습니다.”

김인준은 대찬을 냉대했다.

그는 대찬에게 차 한 잔 다 마실 여유도 주지 않고 집에서 내보냈다.

“뭐야, 대체 뭐가 있는 거야…….”

대찬은 닫힌 철문을 두 번째 응시했다.

그러고는 서인태 과장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홍상기,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거주…….”

대찬은 의정부로 향했다.

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이었다.

누구요, 묻는 말에 서청수 회장이 보냈습니다, 대답으로 응수했다.

홍상기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대찬에게 용건을 물었다.

대찬은 ‘고작 그거’로 대답하는 대신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과거의 일에 대해 홍상기 씨의 허심탄회한 마음을 듣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뭐? 허심탄회한 마음?”

홍상기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대찬이 움찔 놀랄 정도로 사나웠다.

“…네, 허심탄회한.”

“정말 회장님이 그렇게 말하셨나? 그렇게 무심하고 무책임한 말씀을 하셨나!”

홍상기는 불붙은 폭죽처럼 갑자기 폭주했다.

‘뇌관을 잘못 건드렸구나.’

대찬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홍상기는 서청수 회장을 두고 무심하고 무책임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에 서청수 회장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게 분명했다.

“실은 옛일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면서, 이번 사사발간을 계기로 위로의 말씀을 전하라고…….”

“그게, 그게 정말이야?”

“예. 추후 과거의 일을 풀어낼 기회가 있을 거라고…….”

“그렇단 말이지.”

점점 거짓말의 꼬리가 길어진다.

대찬은 이쯤에서 꼬리를 잘랐다.

“그러니 혹시 옛 추억을 반추할 수 있는, 또 회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있으시다면 잠시 빌려주시겠습니까?”

“옛 추억을 반추할 수 있는 사진이라.”

홍상기는 픽 웃었다.

그는 대찬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서재에서 사진 1장을 가져왔다.

젊은 티가 나는 서청수 회장이 밝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여러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곁에는 젊은 시절의 홍상기도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서청수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미모의 여직원이었다.

“이걸 회장님께 갖다드리면 옛 추억을 반추하실 수 있을 거야.”

“혹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자네는 회장님 지시로 왔다며? 자네가 이 사진의 의미를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옳은 지적이었다.

대찬은 사진 1장을 얻어 홍상기의 집을 떠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박필봉, 김인준, 홍상기.

그들과 서청수 회장이 얽힌 과거가 궁금했다.

서인태 과장이 건넨 주소는 이제 한 군데 남았다.

일단 사진 1장을 얻었으니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를 캐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 발 남은 총알을 아끼기로 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대찬은 혼자 그 사진을 앞에 두고 골몰했다.

사진만 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박필봉, 김인준, 홍상기의 인사기록카드를 찾아봤지만 자료를 얻지 못했다.

그보다 더 오래된 직원의 정보도 얻을 수 있는 판이었다.

그들의 정보가 없다는 건 고의로 삭제됐다는 뜻이었다.

“회장님 측에서 일부러…….”

수상한 냄새가 더욱 폴폴 풍겼다.

대찬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진 속 서청수 회장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필래제과라고 쓰인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필래그룹의 대표이사 부회장이 되는 건 필래의 세자로 책봉받는 것과 같았다.

서청수 회장이 필래그룹의 부회장이 되기 전 역임한 직책이 바로 필래제과 사장이었다.

대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회장님이 필래제과 사장을 역임한 건 77년부터 81년까지…….’

당시의 필래그룹은 지금처럼 굴지의 대기업이 아니었다.

게다가 필래제과는 필래그룹의 본체와 다름없었으니, 서광구 회장이 필래제과를 직접 챙겼다.

그러니 서청수 회장은 20대를 벗어나자마자 사장 자리를 얻었다.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도 왕이 된 세종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여전히 국정을 좌우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렇다면 이 사진도 77년부터 81년 사이에 찍혔으리라.

대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진 속 여인에게 시선이 끌렸다.

흑백사진임에도 고혹적인 미모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대찬은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그 여직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서원웅이 슬금슬금 대찬의 뒤로 다가왔다.

사진을 건너다보던 서원웅이 말했다.

“어? 우리 엄마다.”

푸흡!

대찬은 순간 커피를 뿜었다.

사진과 컴퓨터 모니터에 커피가 분사되었다.

대찬이 캑캑거리며 급히 휴지로 사진에 튄 커피를 닦았다.

“뭐, 뭐라고?”

“뭘 그렇게 놀라? 우리 엄마야, 저 사진에 있는 여자. 이 사진 어디서 난 거야?”

대찬은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우리 회사 사사 발간하는 과정에서 얻은 사진이야.”

“응? 그런 사진에 왜 우리 엄마가 있지? 설마 저 웃는 남자는 회장님이야?”

“어, 회장님. 너희 아버지.”

사진 속 서원웅의 모친은 누가 봐도 직원이었다.

서원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엄마는 대학 나와서 아르바이트 하던 식당에서 아버지 만났다고 하셨는데…….”

“사진 보면 그 말씀은 아무래도 거짓 같네.”

“…그러게.”

“일단 너는 모르고 있는 걸로 하자. 내가 더 알아볼 테니까.”

서원웅은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단서를 얻었다.

서원웅은 어머니의 이름이 양윤희라고 일러주었다.

그녀의 인사기록카드 역시 당연하다는 듯 사라지고 없었다.

필래의 전직 직원들과 서청수 회장 사이의 과거.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양윤희.

대찬은 마지막 남은 한 사람에게서 확실한 스모킹 건을 얻고 싶었다.

대찬이 다시 차 키를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나서면서 서인태 과장과 마주쳤다.

“오늘 비싼 밥 사기로 한 거 안 잊었죠?”

“아, 이거 어쩌죠? 내일 사드릴게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내일 꼭 사드릴게요, 내일!”

매형의 항의를 뒤로하고 대찬은 부리나케 종종걸음으로 나섰다.

서인태 과장은 대찬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비겁하긴!”

“오강석, 서대문구 홍제동.”

대찬은 앞선 이들을 찾아갔을 때처럼 딩동,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요?”

“서청수 회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용건이 뭐요?”

“사사발간에 쓰일 자료를 모으기 위해 왔습니다. 회장님과 쌓은 추억이 많으실 것 같더군요.”

주고받는 대화 역시 앞선 사람들과 같았다.

오강석은 대찬을 안으로 들였다.

“회장님과의 추억? 추억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아픈 기억인데.”

오강석은 집 안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그는 매캐한 연기를 뿜었다.

“자네도 한 대 태우려나?”

“가족분들께 실례가…….”

“이혼했어. 혼자 살아.”

“그럼 감사히 피우겠습니다.”

대찬은 오강석과 맞담배를 피웠다.

실내가 2배로 매캐해졌다.

오강석은 서재의 책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회장님이 자네를 보냈다고?”

“예.”

“정말로? 회장님께 여쭤봐도 되겠나?”

대찬은 오강석의 눈을 잠깐 응시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예, 그러시죠.”

“뻔뻔하기도 하지. 당당하게 거짓말을 줄줄 읊는군.”

“너무 쉽게 단언하시는군요.”

“그럴 만도 하지. 회장님이 나한테 사람을 보낼 이유가 조금도 없거든.”

대찬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미 박필봉, 김인준, 홍상기, 세 분을 만났습니다.”

“그 머저리들은 용케 속여 넘겼는지는 몰라도 난 아니야. 그치들보다는 머리가 좀 좋은 편이거든, 내가.”

“뻔뻔하게 거짓을 읊는 건 선생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

오강석의 눈썹이 꿈틀했다.

“회장님과 직통으로 연락할 수 없는 처지잖습니까. 직접 여쭤본다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회장님이 선생님께 사람을 보낼 이유가 조금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선생님의 연락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두뇌회전은 빠른 친구군.”

“선생님도 영민하십니다.”

오강석은 피식 웃고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대찬도 그렇게 했다.

매캐한 연기가 점차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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