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59화
조수진과 서인태의 신혼생활은 깨가 쏟아졌다.
대찬은 삭막한 회사에서 지루한 업무를 보는 와중에 발리로 신혼여행을 떠난 누나와 매형의 닭살 돋는 사진을 실시간으로 감상해야만 했다.
거기에 내키지 않는 가식적인 감상평마저 강요당했다.
-응! 좋아 보이네.
대찬은 무미건조한 감상평을 보내고 휴대전화를 멀리 던져놓았다.
그는 퇴근하자마자 김산하를 찾아 말했다.
“우리 신혼여행은 무조건 발리로 간다.”
“언제는 비행기 타는 거 피곤하다고 국내로 가자더니?”
“무조건 발리야. 아니더라도 무조건 발리보다 좋은 곳.”
“나야 환영이지.”
김산하는 대찬을 꼭 껴안았다.
서청수 회장과의 줄다리기는 잘 마무리되었다.
대찬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바라던 대로 대찬을 핏줄로 얽어맸다.
더 이상 무의미한 소모전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진작 이랬으면 좀 좋아.”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 얼마나 쓸데없는 난관을 거쳐야 했는지.
그간 골탕 먹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두통이 일었다.
대찬이 주도했던 사업들도 훈풍을 탔다.
월드몰 인수 후 17개 점포로 시작한 필래마트는 전국 79개 점포를 보유해 업계 1, 2위인 위마트와 업하우스의 점유율을 맹추격했다.
파격적인 새벽배송을 앞세운 온라인 시장에서는 위마트, 업하우스와 호각을 이뤘다.
전통시장과의 상생을 도모한 필래 인 마켓은 대통령표창을 수상하고, SSM 브랜드 중 호감도 1위를 차지했다.
후발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틈새시장을 잘 파고들었다.
점유율 측면에서는 뒤처졌지만, 영업이익을 따졌을 땐 다른 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KD테크와의 제휴로 곧 서비스를 개시할 필래페이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면 상당한 파급력을 떨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달랑 한 곳 남은 점포에 시한부 선고까지 내려졌던 상황이었다.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자면 상전벽해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던 차에 서청수 회장이 다시 한 번 대찬을 호출했다.
“우리 사돈총각 오셨나.”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집안의 내밀한 호칭으로 부르는 걸 좋아했다.
대찬도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구태여 토를 달지 않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비밀임무를 하나 맡기려고.”
“비밀임무라니, 벌써부터 긴장되네요.”
“그럴 거까진 없어. 올해, 2011년이 어떤 해인지 아나?”
2011년이 2011년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필래상회 창사 60주년이네.”
필래상회는 선대회장인 창업주 서광구 회장이 가장 먼저 만든 회사였다.
그 작은 쌀가게에서 필래의 이름이 처음 시작되었다.
“앞으로는 유념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사를 발간하려고 하는데.”
사사란 社史, 즉 회사의 역사를 의미했다.
필래처럼 여유가 있는 대기업은 기념할 만한 해가 돌아오면 이렇듯 회사의 역사를 책으로 편찬했다.
그래서 각 계열사와 전국 도서관에 무료로 배포했다.
비즈니스적인 이익은 약소하다.
다만, 회사의 위상을 떨칠 수 있는 사업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과시용 퍼포먼스였다.
어느 집단이나 역사 편찬은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런 만큼 필래도 그룹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자네가 사사발간TF팀장을 좀 맡아줬으면 해.”
“그룹 본사 직원도 아닌데 제가 맡아도 괜찮겠습니까?”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자네가 맡기에 가장 적절해.”
“왜 그렇습니까?”
“일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자네를 TF팀장으로 삼아도 문제가 없어.”
“하지만 일개 대리가…….”
“아, 이제부터는 조대찬 과장이야.”
서청수 회장보다 진급을 담백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마터면 대찬도 별일 아닌 줄 알고 예예, 건조하게 대답할 뻔했다.
대찬의 눈이 커졌다.
“과, 과장이요?”
“이제 자네는 내 집안사람이야. 공로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선물이야 당연하잖나.”
“예, 가,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도 없어. 자네는 자격을 직접 증명했으니까. 과장 정도면 소규모 TF 정도는 지휘할 수 있지.”
“예…….”
대찬은 여전히 얼떨떨한 감정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서청수 회장에게는 사사발간TF가 주된 화제였다.
회장이라는 까마득히 높은 자리에서 보자면 대리나 과장이나 오십보백보였다.
겨우 과장이 됐다고 감정을 주체 못하는 걸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은 서둘러 사사발간TF에 관한 얘기를 이어나갔다.
“사사발간이 중책은 아니지만, 동시에 회사의 내밀한 사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지. 사사발간TF팀장은 내 신임의 증표야.”
SSM기획TF에서 실질적인 수장의 역할을 대찬이 맡기는 했다.
하지만 대외적인 공은 서원웅에게 돌아갔다.
이번에는 대찬이 공식적인 TF팀의 수장이었다.
이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에 한 단계 격이 올라가는 셈이었다.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별로 티도 안 나는 일이야. 적당히 쉬엄쉬엄하라고. 출판물 제작은 컬처인더스트리 쪽에서 인력 파견할 거야. 잘 지휘해서 분란만 없도록 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서청수 회장이 말한 컬처인더스트리 쪽 인력이란 서인태 과장을 의미했다.
아무래도 대찬이 한 가족이 됐다는 티를 어지간히도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서인태 과장에게 알은체를 했다.
“매형, 이렇게 같이 일하게 됐네요.”
“처남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회사에서는 엄연히 상사니까 잘 모시겠습니다, 팀장님.”
“그러시면 제가 오히려 불편해요.”
그러자 서인태 과장은 웃으면서 대찬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처남 소리 듣고 싶으면 이따 퇴근하고 술 한잔하자.”
“좋죠. 제가 사겠습니다, 매형.”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사발간에 가장 중요한 건 자료수집이었다.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처럼 후대에 길이길이 남기기 위한 숭고한 작업이 아니었다.
다만, 기업의 위상을 홍보하는 속물적 발상에서 기인한 일이었다.
시시콜콜한 활자들로만 책을 내면 출판되자마자 골방에서 먼지나 뒤집어쓰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니 사사는 글보다는 사진이 중요하게 취급된다.
대찬이 지휘하는 사사발간TF는 회사 안팎으로 자료를 수집했다.
퇴직한 전직 직원들의 명부를 구해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서청수 회장의 비서실장이자 김왕장의 일원인 장백주가 대찬에게 낡은 수첩 하나를 건네주었다.
“회장님께서 자네를 도와주라시더군.”
“이게 뭡니까?”
“회장님이 쓰시던 수첩이야. 그때 재직했던 직원들 연락처가 적혀 있어. 몇 개는 불통이겠지만 연락이 닿는 쪽도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대찬은 장백주 비서실장에게서 수첩을 넘겨받았다.
수첩을 쓱쓱 넘기던 대찬은 수정테이프가 발라진 이름들을 발견했다.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들은…….”
“어, 그, 그거……?”
장백주 실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말이 궁색했는지 잠깐 침묵했다.
대찬은 그를 바라봤다.
대찬이 묻지도 않았는데 장백주 비서실장이 선수를 쳤다.
“그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현재 사망한 걸로 확인된 인원들이야. 자네가 허탕 치는 일 없게 미리 표시를 해뒀어.”
“그렇군요. 안타깝네요.”
“그래.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인데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심껏 하겠습니다.”
“모쪼록 안팎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길 바라네.”
“네, 실장님.”
대찬은 의욕을 갖고 업무에 임했다.
그는 낡은 수첩에 적힌 연락처를 정리해서 각 직원들에게 할당해주었다.
그리고 서인태에게 낡은 수첩을 넘겨주었다.
“이게 원본이에요. 서 과장님은 책갈피 뒤에 있는 부분부터 전화 돌려주시면 됩니다.”
서인태에게 수첩을 넘겨준 건 그를 대우해주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그런데 서인태는 대찬으로부터 수첩을 넘겨받고 눈살을 찌푸렸다.
“분량이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잘 보세요. 몇 군데는 수정액으로 지워져 있으니까. 그거 빼면 얼마 안 돼요.”
서인태는 수첩을 넘겨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무렴 제가 일부러 매형을 골탕 먹이겠어요.”
“그건 그렇죠?”
서인태는 멋쩍게 웃었다.
각자 업무를 할당받은 직원들은 열심히 전화를 돌렸다.
TF팀장인 대찬부터 말단 직원까지 같은 분량을 소화했다.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워낙 오래된 연락처였다.
옛날 연락처를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용케 연락이 닿는다고 해도 화보에 실을 만한 사진을 가진 사람은 적었다.
예상된 난항이었다.
이틀 내내 전화에 매달린 결과물은 궁색했다.
30년 전 필래제과 공장에서 생산되던 과자봉지 하나.
필래그룹의 첫 해외진출사업인 필래식품 칭다오 공장 착공식 사진 한 장뿐이었다.
초라한 실적이었다.
자연히 직원들의 사기도 떨어졌다.
수화기를 놓고 발로 뛰려고 해도 아무런 도구가 없었다.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다.
아쉬운 대로 같은 번호로 두 번, 세 번 전화를 걸었다.
그다지 득 될 것 없다는 걸 직원들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 그렇게 했다.
그러다 그마저도 지쳐 해풍에 말라가는 오징어처럼 의자에 축 늘어졌다.
적막이 감돌았다.
그때 이질적인 소리가 적막을 깼다.
슥슥슥, 슥슥슥.
그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직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완전히 퍼져 있던 대찬도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서인태 과장의 자리였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찬이 서인태 과장에게 물었다.
“뭐 하십니까?”
슥슥슥, 슥슥슥.
서인태 과장은 그 소리를 계속 내면서 대찬에게 대답했다.
“부질없는 짓이요.”
“부질없는 짓이라뇨?”
대찬은 몸을 일으켜 파티션 너머의 서인태 과장을 바라봤다.
그는 어깨를 오므린 채 작은 칼로 수첩을 긁고 있었다.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뒤로 다가갔다.
전화번호 위에 덧칠되어 말라붙은 수정액을 긁어내고 있었다.
그는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처럼 조심스럽게 수정액을 긁어냈다.
훅, 숨을 불어 오래 굳어있던 흰 가루를 날렸다.
그러고는 수정액 아래 묻혀 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대찬은 픽 웃었다.
“정말 부질없는 짓이에요. 그거 어차피 돌아가신…….”
대찬이 말을 미처 맺기 전에 서인태가 수화기에 대고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필래그룹 서인태 과장이라고 합니다.”
“……!”
대찬의 눈이 커졌다.
죽은 사람이 전화를 받은 셈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인태 과장을 바라봤다.
내막을 모르는 서인태 과장은 열성적으로 통화했다.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저희가 사사를 발간하는데, 선생님의…….”
“필래랑은 할 말 없소.”
뚝.
서인태의 친절한 말씨가 무색하게 전화를 받는 쪽은 한없이 무뚝뚝했다.
서인태는 끊긴 전화를 보고 입술을 삐죽이더니 대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필래랑은 할 말이 없대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전화를 받았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감동스러운 일인가요?”
“감동이 아니고… 그 번호 주인은 이미 돌아가셨다고 했거든요.”
“…네?”
서인태 과장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유령과 전화를 한 것은 아닌가 싶어 소름이 돋았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유가족 아닐까요?”
같은 TF에 소속된 직원 하나가 가설을 제기했다.
그에 서인태 과장이 바로 반박했다.
“늙은 남자 목소리였는데?”
“그럼 전직 직원이 여자였을 수도 있죠.”
“박필봉은 누가 봐도 남자이름 아니야?”
“박필봉 여사일지도 모르……. 에잇! 과장님 말씀이 맞아요.”
말이 궁해진 직원은 자신의 가설을 폐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