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58화
대찬은 부모님에게 알리기 전에 조수진에게 먼저 운을 띄웠다.
그러자 조수진도 아주 마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대찬에게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진 있어?”
“어, 여기.”
서청운 필래 컬처인더스트리 사장의 차남인 서인태도 필래의 직원이었다.
컬처인더스트리에서 과장 직함을 달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은 아예 그의 인사기록카드를 출력해서 대찬의 손에 들려주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조수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생겼다!”
“마음에 들어?”
“응, 난 저런 째진 눈 좋아하거든.”
대찬은 조심스레 물었다.
“한번 만나볼래?”
“왜 마다하겠어.”
쾌도난마로 거침없이 진행되는 논의에 대찬은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본 누나 모습 중에 제일 맘에 든다.”
“내가 할 소리거든? 이제야 내 인생에 도움 좀 되는구나.”
조수진은 따끔하게 쏘았지만 대찬은 히죽 웃기만 했다.
부모님이야 이 말을 듣자마자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돼지를 잡고 마을잔치라도 열 판이었다.
“너, 그 남자 못 잡으면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 알았어?”
“아주 그냥 재벌가라니까 눈이 뒤집혀서는!”
“그럼 안 뒤집히게 생겼어?”
어머니와 조수진은 빽빽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어머니만큼 열성적이진 않았지만 은근히 바라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딸, 잘해봐라. 최선을 다해서.”
“아빠가 그렇게 신신당부 안 해도 나도 그럴 생각이야.”
오랜만에 가족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단결했다.
바로 주말에 약속이 잡혔다.
조수진의 상대인 서인태의 마음이야 대찬이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이 혼담에 영향을 미치진 못할 것이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자 전권을 쥔 서청수 회장의 뜻에 감히 반대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럼에도 대찬은 조수진이 그의 마음에 들길 바랐다.
둘의 결합이 행복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건 이 혼담의 대전제였다.
만남은 서울 모처에 있는 필래호텔 로비의 커피숍에서 이뤄졌다.
대찬은 몰래 건너편 테이블에 몸을 숨기고 둘의 만남을 지켜봤다.
둘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딱 봐도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키 차이도 이상적이고, 그냥 둘이 결혼하라고 만들어놓은 거 같아.”
대찬의 옆에 앉은 김산하가 말했다.
김산하는 굳이 이 자리에 대찬과 동행하겠다고 했다.
아주버님 될 사람을 보고 싶다는 게 명분이었다.
대찬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수진과 서인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둘이 잘돼야 할 텐데.”
“잘돼야지. 그래야 우리도 하니까. 그렇지?”
“벌써 우리 차례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
김산하는 대찬의 말이 불만족스러운 듯 볼에 바람을 넣었다.
“그럼 너는 생각 안 하고 있어?”
“아, 그건 아니고…….”
대찬은 얼버무렸다.
당장 누나의 혼담이 중요했기에 그의 신경은 온통 건너편의 어색한 한 쌍에게로 쏠려 있었다.
몇 마디 말을 나누던 그들은 이내 서로를 보며 웃었다.
단순히 어색함을 깨기 위한 웃음이 아니라 정말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었다.
대찬은 그 웃음에 희망을 굳혔다.
서인태의 태도는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는 얼굴을 조수진 쪽으로 살짝 숙이며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고는 이따금 고개를 세게 끄덕이고, 손뼉도 치면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찬은 숨을 죽이고 그쪽에서 전해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수진이 조심스레 서인태에게 말했다.
“저… 그런데 제 직업이 인태 씨한테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조수진이 서인태를 부르는 호칭은 ‘그쪽’에서 인태 씨로 바뀌어 있었다.
“예? 무슨 뜻이신지…….”
“저는 사서잖아요.”
“그런데요?”
“영화나 드라마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재벌가 며느리로 들어가잖아요.”
“사서가 뭐가 어때서요? 충분히 대단한 직업이에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렇긴 하지만…….”
“수진 씨가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는 잘 알겠어요. 하지만 개의치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저는 재벌가 자식이라곤 하지만, 그룹 경영권 승계랑은 오백 광년 떨어진 사람이에요. 게다가 장남도 아니고요. 제가 필래 서씨라는 것 때문에 부담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서인태의 말에 조수진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저는 오히려 수진 씨가 사서라서 더 좋은걸요?”
“네? 정말요?”
서인태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얘기가 나온 혼처는 전부 부담스러웠어요.”
“네? 왜요?”
“어느 회사 오너의 딸, 엘리트 커리어우먼, 파리에서 개인전도 했다는 도예가, 다 그랬거든요. 그래서 지금껏 솔로로 살았어요.”
“그분들에 비하면 전 너무 초라하네요.”
“초라한 게 아니에요. 겉으로는 그분들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묵묵히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이 좋아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고요.”
“그런가요?”
“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절대 그분들보다 수진 씨가 못하다거나 대하기 편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제 말은…….”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알아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는 조수진을 보고 헛구역질을 했다.
“웩! 저런 요조숙녀 같은 표정도 지을 줄 알았단 말이야?”
“원래 요조숙녀니까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거야.”
김산하의 지적에 대찬은 응수했다.
“나중에 시누이한테 당해보면 누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 알게 될 거야.”
“그 말은 나랑 결혼하겠다는 뜻?”
“말이 그렇단 거야.”
김산하는 웃으면서 대찬의 팔을 꼭 잡아당겼다.
대찬은 다시 조수진과 서인태의 대화에 집중했다.
서인태는 적극적으로 조수진에게 구애했다.
“우리 둘 다 우리를 위한 목적으로 만난 건 아니지만,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진 씨는 어떠세요?”
“저도 그래요. 부끄럽지만, 인태 씨 사진만 보고도 마음에 들었거든요.”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저야말로 부끄럽네요.”
둘은 한동안 발그레 얼굴을 붉히고 뭐가 그리도 좋은지 킥킥 웃었다.
그러다가 조수진이 서인태에게 말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회장님은 왜 이런 자리까지 마련해가시면서 제 동생을 붙들고 싶어 하시는 걸까요?”
그 말에 대찬의 귀가 쫑긋 섰다.
서인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희 큰아버지, 그러니까 회장님은 저희를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즐겨 하셨어요. 뒤를 맡길 사람 하나만 만들면 그 인생은 실패할 수 없다.”
“뒤를 맡길 사람이요?”
“네. 그리고 그 사람은 반드시 가족이어야 한다. 핏줄을 배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핏줄만큼 사람을 단단히 묶어두는 것도 드물다, 라고 덧붙이셨죠.”
“그럼 회장님은 제 동생에게 뒤를 맡길 생각이신 건가요?”
조수진의 물음에 서인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들인 서원웅 부실장의 뒤를 맡길 사람으로 점찍으신 거죠. 그런데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시는 걸 보면, 서원웅 부실장에게 중임을 맡길 계획이 있으실 거예요.”
“중임이라면…….”
“봉황의 큰 뜻을 참새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서원웅 부실장의 능력 여하, 또 서승학 사장의 능력 여하에 따라 대권이 서원웅 부실장에게 갈지도 모르죠.”
“그렇군요…….”
서인태는 빙긋 웃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회장님은 동생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계세요.”
“그래요?”
“네. 아예 콕 집어 말씀하시던걸요. 인태야, 너는 절대로 조대찬 대리 위에 서지 못할 거다. 그러니 손해 보는 결혼이 아니라 네가 감지덕지해야 할 결혼이다.”
조수진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건 회장님께서 너무하셨어요.”
“뭐, 저도 백 퍼센트 찬성하진 않아요. 저도 나름대로 자존심 있는 사람이니까.”
“당연하죠! 저도 찬성 안 할래요.”
“하지만 감지덕지해야 할 결혼이라는 덴 동의해요. 이렇게 좋은 여자를 만났는데 어떻게 안 그래요?”
서인태의 말에 조수진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대찬은 속이 거북할 따름이었다.
“어쩜 저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할까?”
그러자 김산하가 하이힐의 날카로운 굽으로 대찬의 발을 콱 밟았다.
“저런 것 좀 배워! 이 재미 대가리 없는 자식아.”
“윽!”
대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소리를 냈다가는 조수진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후환이 두려웠다.
대찬은 말없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조수진과 서인태의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애초에 대학생의 풋풋한 소개팅이 아니었다.
둘 다 혼기가 꽉 찼다.
근시일 내의 결혼을 전제로 한 선이라고 하는 편이 가까웠다.
게다가 워낙 둘의 궁합이 좋았다.
대찬은 만몽거사에게 둘의 사주를 들고 갔다.
“어째, 궁합이 좋아요?”
“아주 그냥 찰떡이네, 찰떡이야. 볼트 너트가 아주 꼭 들어맞아. 속궁합도 기가 막히겠는데? 안 봐도 비디오야.”
“친누나 밤일까지 알고 싶진 않고요…….”
“지랄! 속궁합이 맞으면 그걸로 끝이야, 끝. 하긴, 너 같은 물고추가 뭘 알겠어.”
“아, 진짜, 아니라니까!”
“흐흥, 그것도 안 봐도 비디오인걸, 뭐.”
대찬은 길길이 날뛰면서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그러자 왕말숙 여사가 만몽거사에게 말했다.
“저렇게 지랄발광을 하는 걸 보니 진짠가봐요.”
“애인만 안됐지, 뭐.”
만몽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쯔쯔 혀를 찼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상견례가 이뤄졌다.
다행히 사돈 될 서청운 사장도 무던한 인물이었다.
후문을 듣자하니 서청운 사장도 이 혼사로 적절한 보상을 챙긴 모양이었다.
서청수 회장으로부터 필래 컬처인더스트리의 역점사업인 유명 영화사 인수합병에 그룹 차원의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했다.
조수진, 서인태 부부가 살 강남의 고급아파트를 증여받은 건 덤이었다.
혼수치고는 거했다.
들어오는 혼담마다 퇴짜를 놨던 애물단지 차남이 어떻게든 짝을 만났으니, 애초부터 서청운 사장 부부로서도 아주 꺼리지 않던 참이었다.
둘은 첫 만남 후 3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소위 스드메며 식장 예약 등 자질구레한 일들은 서청수 회장의 직권으로 단칼에 해결되었다.
필래호텔 예식장에서 결혼이 진행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들이 보낸 화환으로 복도가 꽉 메워져 있었다.
-축의금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있는 집안의 여유가 돋보였다.
서청수 회장도 직접 참석했다.
그가 참석하자 계열사의 사장들도 자연히 자리를 채웠다.
거기에 평소 그와 친분이 있는 유명인사들까지 자리를 빛냈다.
당대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가수가 축가까지 불렀다.
기자들의 출입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단, 최재한만큼은 허락을 받았다.
졸지에 단독보도를 하게 된 최재한은 대찬에게 감사를 표했다.
“네 덕분에 한 건 했다?”
“사실만 담백하게 전해줘.”
“아무렴. 수진 누나는 나도 잘 아는데.”
“너하고 잘 아니까 더 걱정이야. 누나한테 네가 헤드락을 몇 번 걸렸더라?”
“200번은 넘을걸. 걱정 마. 사적인 감정으로 막 왜곡보도하고 그런 사람 아니다?”
“그림 땄다고 휭 가버리지 말고 이따 피로연장에서 나랑 소주나 한잔해.”
그러자 최재한은 픽 웃었다.
“소주는 무슨. 여기 필래호텔이야.”
“아, 어쨌든 남아.”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누나한테 축하인사도 해야 하고.”
서청수 회장은 직접 주례사를 읽었다.
최재한은 가져온 소형 카메라로 그림을 놓치지 않았다.
“직업정신 한번 투철하다.”
대찬은 그렇게 툴툴거리고 식에 집중했다.
화촉을 밝히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보고서는 대찬도 마음이 뭉클했다.
“하나, 둘, 셋!”
사회자의 구령이 떨어지자 조수진은 부케를 뒤로 던졌다.
“내 거야, 내 거!”
이를 악물고 기다리던 김산하가 조수진의 노처녀 친구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부케를 쟁취했다.
그는 대찬을 바라보며 부케를 마구 흔들어댔다.
“무섭다.”
대찬은 한없는 압박을 느꼈다.
“자, 신부 측 하객들 사진 촬영할게요.”
사진사의 외침에 조수진의 지인들이 모여들었다.
대찬 일당도 사진의 한구석을 차지했다.
대찬은 가족끼리 찍을 때와 똑같이 뻣뻣한 자세였다.
그 옆에 김산하가 밝게 웃으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최재한과 서원웅도 빙그레 웃었다.
가장 덩치가 큰 마강국은 그들과 분리되어 맨 뒷줄로 쫓겨났다.
그렇게 조수진은, 대찬은 필래그룹의 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