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57화
“터져도 안에서 터져야 해. 일이 커지면 도리어 내가 위험해져.”
“위험해지다니? 너는 죄 없잖아.”
“이건 사장의 묵인하에 진행된 일이야. 이 건을 밖으로 터트리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거야.”
그 말에 최재한도 수긍했다.
“에이, 그래도……!”
최재한이 한 번 더 대찬을 채근하려다가, 그의 뒤에서 무섭게 째려보는 마강국을 보고 뒷말을 침과 함께 삼켰다.
“…어쩔 수 없네. 보도했다가는 다음 날 내 부고 기사 뜨겠어.”
“역시 경호원 하나는 잘 뒀다니까.”
“당연하지.”
대찬은 마강국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마강국도 주먹을 뻗어 대찬의 주먹과 맞닿게 했다.
대찬은 좋은 말로 최재한을 얼렀다.
“안두홍 건으로 재미 많이 봤잖아. 이번은 넘어가자, 응?”
“별수 있겠냐. 네 뜻대로 해야지.”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친구 이전에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가르고 싶지 않아서야.”
셋은 조잘거리는 목소리로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깨며 걸어갔다.
대찬은 이 일을 윤리경영팀에 제보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사장실로 달려갔다.
김태준 사장이 그를 맞았다.
“그래, 장백주 실장한테 직접 보고하질 않고?”
“사장님께 보고하는 편이 더 맞는 일이라서요.”
“그래? 얘기해봐.”
“여야가 대형마트에 최고임금제를 적용하는 법안에 합의할 것 같다는 소식입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김태준 사장은 의아했다.
그 정도 건수가 있다면 여태 김태준 사장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대찬이 물어온 건수는 거짓일 확률이 농후했다.
김태준 사장은 순간 장백주 비서실장을 의심했다.
‘일부러 조대찬 엿 먹이려고 거짓정보를 흘렸나?’
그러나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에 일단 그는 대찬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래? 그거 정말 큰일인데.”
“안심하셔도 됩니다. 헛소문으로 판명 났으니까요.”
“…헛소문이라고?”
김태준 사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찬의 말에 김태준 사장의 심리가 복잡해졌다.
‘이거 장백주가 답지 않게 이동수 같은 짓을 또 저질렀구먼.’
김태준 사장의 복잡미묘한 표정변화를 대찬은 감지했다.
“예, 완벽한 헛소문입니다.”
“…다행이군.”
“예, 다행이죠.”
김태준 사장의 얼굴이 괴팍해졌다.
“그런데 굳이 사장실까지 찾아와서 그 헛소문을 알려주는 이유가 뭔가? 내가 그걸 시간 들여가며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예,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김태준 사장은 덤덤하게 말했다.
“양철 부장이 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헛소문을 제게 일러주도록 옛 동료인 보좌관에게 사주했습니다.”
“지금 상사를 음해하는 건가?”
“음해가 아닙니다. 그 보좌관이 전모를 실토했으니까요.”
“…….”
“양철 부장은 지인을 이용해 저의 정상적인 업무를 방해했습니다. 이건 해사행위에 해당합니다.”
“사실이라면 그렇겠지…….”
양철이 단독으로 움직였을 리는 없다.
김태준 사장은 장백주 비서실장의 멍청한 선택을 속으로 신랄하게 욕했다.
대찬은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양 부장의 해사행위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음? 또 뭔가?”
김태준 사장이 아는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지인을 이용해 대찬을 곤경에 빠뜨리겠다.
이다음의 얘기는 김태준 사장이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 PB상품의 포장을 이 보좌관의 사촌이 운영하는 업체에 위탁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뭐?”
금시초문이었다.
내내 평탄하던 김태준 사장의 목소리가 튀었다.
“보좌관은 사촌으로부터 커미션을 받기로 했고, 양 부장 역시 백마진을 얻기로 했다는군요.”
“그럴 수가!”
“이 일은 가벼운 징계로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하지! 이 미친놈이……!”
김태준 사장은 불처럼 분노했다.
이건 대찬의 문제와 별개였다.
김태준 사장의 철학상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윤리경영팀에 지시해서 이 일을 발본색원해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이런, 이런 얼빠진 놈을 봤나!”
김태준 사장은 그 자리에서 윤리경영팀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PB상품 포장업체 사장, 당장 회사로 오라고 해! 양철 부장 그 개새끼는 1분 안에 안 오면 멱을 따버린다고 해!”
김태준 사장의 불호령에 양철 부장이 후다닥 사장실로 뛰어왔다.
그는 김태준 사장의 일그러진 얼굴과, 그 뒤에서 웃는 대찬을 보고 상황을 직감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김태준 사장이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 개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사, 사장님……!”
“장백주의 더러운 장단에 놀아나는 것도 모자라서 뒷구멍으로 해쳐먹으려고 들어? 네놈 새끼가 그러고도 멀쩡할 줄 알았어!”
국회에서 눈칫밥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먹은 양철 부장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네놈이, 네놈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태준 사장은 멱살을 쥔 채로 양철 부장을 뒤로 확 떠밀었다.
그는 우당탕 보기 좋게 내동댕이쳐졌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김태준 사장은 좌우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골프채를 집어 냅다 그에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죽어, 이 개새끼야!”
“사, 살려주세요!”
생명의 위협마저 느낀 양철 부장은 네 발로 기다가 질겁하며 일어나 도망쳤다.
“죽어!”
휘둘러지는 골프채에 유리로 된 테이블이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양철 부장은 완전히 혼비백산했다.
와장창! 쨍그랑!
도자기며 꽃병이며 유리찬장이며 마구잡이로 부서졌다.
사기와 유리 파편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사장실은 금세 폭격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었다.
양철 부장의 운명이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양철 부장의 사직서는 반려되었다.
회사는 그에게 사직도 용납하지 않았다.
해고 처분이 내려졌다.
덩달아 권영식 보좌관 사촌 회사를 고려 명단에서 제외했다.
안팎으로 떠들썩한 걸 좋아하지 않는 김태준 사장은 법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양철 부장의 해고 소식이 알려지자 대찬과 같은 사무실을 쓰는 허운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상사 믹서기.”
“이걸로 몇 사람째죠?”
한태윤 과장 역시 웃으면서 대찬을 놀리는 데 일조했다.
이런 조롱에 익숙해진 대찬은 피식 웃기만 했다.
졸지에 자기 팀의 수장을 잃은 CR팀 사람들도 당황했다.
그래도 추악한 비리 때문에 쫓겨났으니 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양철 부장의 일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대찬의 일은 일단락되지 않았다.
그는 김태준 사장을 찾아갔다.
김태준 사장도 대찬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덤덤히 그를 맞았다.
“사장님, 계속 저를 대관업무에 투입하실 계획이십니까?”
“아니. 그럴 이유가 없어졌지.”
김태준 사장의 답변은 솔직했다.
대찬을 전담으로 괴롭히던 양철 부장이 날아갔으니 더 이상 대찬에게 대관업무를 맡길 필요가 없어졌다.
차라리 솔직한 편이 좋았다.
눈 가리고 아웅 하면서 트집이나 잡고 말을 빙빙 돌리는 태도였다면 면전에 침을 뱉었을지도 모른다.
대찬도 솔직하게 말했다.
“사장님, 힘듭니다. 이제는 더 못 버팁니다.”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빤히 바라보다가 탄식하듯 숨을 뱉었다.
“이 건은 장백주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야.”
“일만 하고 싶습니다.”
“자네를 똑바로 볼 면목이 없군. 미안해, 미안하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다면, 저는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다시는 이런 멍청한 수작을 그 누구도 벌이지 못하도록 내 이름을 걸고 막겠어. 약속하네. 그게 설령 회장님이라도 온몸을 던져 막을 거야.”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말뿐만이 아니야. 한 번은 실수고 두 번은 심통이라고 용서할 수 있어도, 세 번째는 돌이킬 수 없어. 나도 그런 회사 더 다니고 싶지 않아.”
“…….”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주었네. 그리고 인내심에 버금가는 실력도 발휘해주었어. 나는 자네에게 전적인 신임을 보내겠네. 솔직히, 자네는 서원웅에게 과분한 사람이야.”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치사는 그만 하면 되었습니다.”
“아무튼 미안하네. 내 도움은 한정적이지만, 앞으로 자네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겠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대찬이 그의 앞에서 물러난 후, 김태준 사장은 전화를 걸었다.
장백주 비서실장에게 항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수신인은 서청수 회장이었다.
내막을 들은 서청수 회장은 길길이 분노했다.
장백주 비서실장을 불러다 뺨을 때렸다.
서청수 회장은 그를 당장에라도 해고할 기세였지만, 장백주 비서실장은 자기 목숨은 지킬 정도의 정보를 쥐고 있었다.
그걸 아는 서청수 회장도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그를 내치지는 못했다.
사흘 후, 대찬에게 그룹 본사로부터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서청수 회장의 부름이었다.
대찬은 회장실 안으로 들어와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어, 그래.”
서청수 회장은 대찬에게 자리를 권했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청수 회장은 눈을 감고 입도 다물고 있었다.
대찬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 아닌가.”
“…짐작은 합니다만.”
서청수 회장은 눈을 떴다.
“나는 사과에 능한 사람은 아니야. 내가 자네한테 두 번째 사과를 하게 될 줄은 몰랐군. 정말 미안하네.”
“충성심 넘치는 가신을 두신 반대급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비아냥거려도 할 말이 없군.”
“어떤 말도, 어떤 보상도 필요 없습니다. 일하게 해주십시오. 그 약속만 해주시면 됩니다.”
“약속하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되었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침묵하다가 한숨을 뿜으며 말했다.
“그래도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예.”
“그렇게 내 인척이 되는 게 싫은가?”
“그게 싫은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을 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그 마음은 변치 않는다?”
대찬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절대로 그렇습니다.”
“로맨티스트 나셨군.”
“제 짝을 위한 열렬한 사랑 때문만이 아닙니다.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합니다. 저는 회장님이 멋대로 부리는 강아지가 아닙니다.”
서청수 회장은 이마를 짚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인정하네.”
“혼맥이 아니어도 회장님이 베풀어주신 은혜, 그리고 서원웅 부실장이 보여준 우정, 그것만으로도 저는 헌신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은혜, 우정, 그런 시시한 가치를 나는 신뢰하지 않아.”
대찬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뿜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회장님의 신뢰를 얻겠습니까?”
“역시 핏줄로 튼튼히 얽고 묶어야지.”
“하지만 그건…….”
“알아. 자네랑 산하 양, 잘 어울리는 한 쌍을 찢어놓는 일은 포기했어.”
대찬은 서청수 회장을 올려다봤다.
“그럼 어떻게…….”
“자네, 손윗누이가 있지?”
서청수 회장이 갑자기 누나인 조수진을 들먹이자 대찬은 어리둥절했다.
“예? 예.”
“미혼이지?”
“…예.”
“서청운 컬처 사장한테 아직 장가 안 간 아들 있어. 그쪽이랑 엮으면 어떨까?”
대찬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은 피붙이를 장기 말처럼 쓸 수 있을지 몰라도 대찬은 아니었다.
누나인 조수진의 인생은 조수진의 것이었다.
대찬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저희 누나의 의견을 들어봐야 합니다.”
“그렇지. 한번 의향을 여쭤봐. 남자가 괜찮으니 자네 부모님도 기껍게 여기실 거야.”
대찬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은 허구한 날 조수진을 노처녀라고 서슴없이 불렀다.
그러면서 집에서 쫓아내는 날만을 벼르고 있었다.
굴지의 재벌가 며느리로 보낼 수 있다면 양잿물이라도 들이킬 게 분명했다.
다만, 걸리는 건 조수진 본인의 의향이었다.
마침 교제하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