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55화
양철 부장은 대찬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네가 엿같다.”
“…….”
“너도 내가 엿같을 거다. 피차 같이 일하기 싫으니 찢어져서 일하도록 하지.”
“그렇게 하시죠.”
대찬은 양철 부장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단 일분일초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고민도 없이 양철 부장의 제안을 받고 그와 갈라졌다.
그런 대찬의 뒤통수를 보고 양철 부장은 씩 웃었다.
양철 부장은 대찬과 헤어지자마자 익숙하게 의원회관을 누볐다.
그가 몸담았던 의원실을 찾았다.
옛 동료가 그를 맞았다.
“양 보좌관, 아니 양 부장님 오셨습니까.”
“잘들 지냈어?”
양철 부장의 말투는 흥읍시에서와는 다르게 상냥했다.
비굴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저희야 똑같죠. 오늘은 지금까지 딱히 드릴 정보가 없는데요.”
“정보야 차차 주면 되고. 지금은 내 청탁이나 하나 받아줘.”
“정보 말고 저희가 뭘 해드릴 수 있다고요.”
“지금 내 똘마니로 붙은 부하직원이 하나 있는데.”
양철 부장의 말에 그의 옛 동료들은 와,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혼자 쏘다니는 거 모양 빠진다고 그러시더니.”
“그런데 똘마니로 미친 또라이가 붙었어.”
“네?”
“회장님 아들 꼬리 잡고 승승장구하는 놈이야.”
“와우, 부러워라.”
양철 부장은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큼 싸가지가 없지.”
“뭐, 그럴 만도 하네.”
“그래서 그놈 엿 좀 먹이려고.”
그러자 옛 동료들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거 재밌겠는데요?”
그들이 양철 부장과 함께한 세월이 물경 10년이었다.
오래 같이 있었던 만큼 비슷한 부류였다.
대찬은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해야 했다.
대관업무의 시작은 항상 같았다.
명함 뿌리기.
그는 각 의원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자마자 보좌관과 비서들에게 꾸벅 허리를 꺾었다.
“안녕하십니까! 필래 조대찬 대리…….”
…입니다.
대찬이 미처 말을 맺을 새도 없이 의원실 직원들은 쌀쌀맞게 대꾸했다.
“놓고 가세요, 명함.”
“…넵.”
대개가 내쫓지만 않았지, 숫제 잡상인 취급이었다.
예상했던 일이니 딱히 주눅 들지도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런 일을 겪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아쉬운 쪽이 굽힐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보좌관들의 자리마다 살포시 명함을 올려놨다.
개중 9할은 쓰레기통에 처박힐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필래마트 조대찬 대리입니다. 명함 놓고 가겠습니다.”
어느새 그는 명함 놓고 가겠다는 말을 첫 마디에 담기 시작했다.
대찬은 박태술 의원실 앞에 섰다.
그래도 제법 공을 들였던 곳이라 그쪽 직원들하고도 안면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여태 대찬을 기억해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필래마트 조대찬입니다. 일전에 몇 번 뵈었는데 기억하실는지…….”
대찬의 말을 의원실의 그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아무도 대찬을 기억하지 못하는 품이었다.
‘역시 기억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였나.’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누가 대찬 쪽으로 빙글 의자를 돌렸다.
“어? 조대찬 대리? 잠깐만요.”
“네?”
처음으로 의원실 직원이 대찬의 걸음을 붙들었다.
대찬은 밝은 표정으로 뒤돌아봤다.
그 직원이 씩 웃었다.
“우리 방 들른 적 있지 않아요? 그땐 유통이었던 거 같은데?”
“아, 기억하시는군요.”
대찬은 얼른 그의 얼굴을 살폈다.
권영식 보좌관.
‘이 양반이 나를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준다고?’
의아한 일이었다.
권영식은 4급 보좌관이다.
의원실에서 국회의원을 빼면 가장 지위가 높았다.
그런 사람이 대관업무를 보는 일개 대리를 신경 써주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대찬이 기억하는 권영식 보좌관의 인간됨됨이는 친절과 배려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아, 그럼. 그때 초롱초롱하던 눈빛이 잊히지 않는걸.”
‘거짓말’
대찬은 겉으로는 겸연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다시 보니까 반갑네요.”
“알아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잠깐 앉으시죠. 커피나 한잔하세요.”
권영식 보좌관은 대찬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는 커피 두 잔을 타와 대찬과 자신의 앞에 내려놨다.
“잘 마시겠습니다.”
“믹스커피 한 잔에 인사까지야. 종종 놀러 와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권영식 보좌관은 빙긋 웃었다.
“대관업무 팍팍하죠?”
“네. 쉽지 않네요, 역시.”
“갑을이 딱 나뉘는 세계라 어쩌겠어요. 이런 저희도 조 대리님 같은 분들 앞에서는 거드름피우다가도 의원님 납시면 쇤네, 쇤네 한다니까요.”
“저희라고 뭐 다른가요. 세상 사는 생리가 다 그렇죠.”
“성격이 시원시원하시군요.”
“그런 체하는 거죠.”
의원실 직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아직 제 소개도 안 했네요. 박태술 의원님 보좌관 권영식입니다.”
“아, 예. 잘 부탁드립니다.”
대찬은 공손하게 명함을 받았다.
“저도 잘 부탁해요. 오늘 저녁 어때요? 간단히 소주나 한잔합시다.”
“저야 감사할 뿐입니다.”
“저한테 얻어 드시기엔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실 테고, 그렇다고 큰돈 쓰기도 뭣하니까 요 앞에서 순댓국이나 한 그릇 하시죠.”
대관업무 담당 직원을 많이 대해본 듯, 권영식 보좌관은 거짓 배려에도 능숙했다.
어느덧 퇴근시간이 되고, 대찬은 권영식 보좌관과 마주앉았다.
대찬은 권영식 보좌관의 잔에 공손히 술을 따랐다.
그러면서 생각은 불순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뭘 노리고 나한테 친절한 거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둘 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올랐다.
권영식 보좌관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조 대리 맘에 드니까 내가 떡 하나 줄게요.”
“떡이요?”
“응, 고급 정보 하나 드릴게.”
그러자 대찬의 눈이 빛났다.
“그게 뭡니까?”
“딱 자기 회사에만 보고하고 여기저기 흘리면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권영식 보좌관은 좌우를 살피더니 대찬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대찬은 상체를 기울였다.
권영식 보좌관은 대찬의 귀에 입술을 가져갔다.
무슨 대단한 정보를 알려줄까.
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권영식 보좌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권영식 보좌관은 잔뜩 긴장한 대찬을 보고 그만 웃음이 터졌다.
“푸흡.”
“…음?”
대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권영식 보좌관도 웃음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로 속닥거렸다.
“니미뽕이다.”
“…네?”
“크하하하하!”
권영식 보좌관은 혼자 숨넘어갈 듯 웃었다.
잔뜩 김빠진 대찬의 얼굴은 허탈했다.
“에이, 뭡니까.”
한참 웃던 권영식 보좌관은 눈물을 닦더니 말했다.
“미안, 미안. 너무 긴장하니까 장난치고 싶어지잖아.”
“진짜 기대했습니다.”
“방금 건 농담이고, 진짜 알려줄게요.”
“두 번 그러시면 진짜 재미없으신 겁니다.”
“알았다니까 그러시네.”
대찬은 다시 기대감을 품었다.
권영식 보좌관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내가 모시는 박태술 의원님이 산자위에 있는 건 알죠?”
“네, 알고 있습니다.”
산자위는 산업통상자원위원회의 준말이다.
국회에서 설치된 상임위원회 중에서 산업에 관한 법률을 다뤘다.
때문에 기업들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위원회였다.
“이번에 대형마트를 한번 세게 죌 모양이에요.”
“세게 죄다뇨?”
“어디 가서 말하면 진짜 안 됩니다?”
권영식 보좌관은 신신당부했다.
대찬은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권영식 보좌관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번에 대형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최고임금제를 시행한다는 모양입니다.”
“예? 최고임금제요?”
최고임금제는, 임원 등 고액연봉자의 임금을 업체에서 가장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연동하는 제도였다.
이를 테면, 가장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하루 1천 원을 받으면 최고액연봉자의 임금을 3천 원으로 제한하는 식이었다.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하필 유통업계로 제한합니까?”
“최근 SSM 건을 비롯해서 이래저래 미운털이 박혔으니, 이참에 한번 손을 보겠다는 거죠. 캐셔를 비롯한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한다고 하면 지지를 받을 수 있으니까.”
“산자위에서 통과된다고 해도 법사위에서 가만둘까요?”
법사위는 법제사법위원회로, 국회의 각 상임위원회에서 올라온 법안이 기존의 다른 법안과 충돌하지는 않는지, 법률적 오류는 없는지를 검토하는 위원회였다.
법사위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국회 본회의에 법안을 상정할 수 있는 터, 법사위는 사실상 모든 법안을 심사할 권한을 지닌 위원회였다.
“야당이야 이런 쪽 이슈에는 반대하지 않을 테니까. 아마 손쉽게 통과될 겁니다.”
“지금 우리 대통령이 저임금노동자의 처우개선에 이렇게 노력하시는 분인지는 미처 몰랐네요.”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 들으며 눈물 흘리는 분이 바로 우리 대통령이신걸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제법 파문이 일겠네요.”
대찬의 말에 권영식 보좌관은 피식 웃었다.
“당장 조 대리 먹고사는 문제와도 직결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권영식 보좌관의 귀띔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찬은 일부러 한 정거장을 더 남기고 전철역에서 내렸다.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최고임금제를 적용한다고? 그것도 대형마트에만?”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었다.
게다가 대찬에겐 2018년까지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
대형마트 직원들에게 최고임금제를 적용한다는 법안은 세간을 들썩일 만한 파급력을 지녔다.
정말로 이게 통과되었다면, 아무리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라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대찬에겐 이런 기억이 없었다.
이치에도 맞지 않고, 미래를 미리 경험한 대찬의 기억에도 없는 일이다.
즉, 권영식 보좌관의 말은 거짓이었다.
이것이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졌다.
“나한테 친절하게 접근한 것부터 거짓정보를 흘린 것까지, 모든 게 이상해.”
느릿하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퍼즐은 쉽게 풀렸다.
전화 한 통이면 충분했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부탁했다.
서원웅이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받는 쪽은 인사팀이었다.
“어, 나 전략기획실 서원웅 부실장이에요.”
“아, 옙! 부실장님.”
회사 내에서 서원웅의 힘은 이동수 부사장보다 크고, 어쩌면 김태준 사장과도 맞먹을 정도였다.
인사팀 직원의 목소리에 자연히 군기가 들어갔다.
“인사기록카드 좀 열람하고 싶은데.”
“아, 옙!”
사장이든 부사장이든 회장 아들이든 제3자가 인사기록카드를 함부로 열람할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원칙은 현실적인 힘 앞에서 무기력했다.
“CR팀 양철 부장 기록 복사본 좀 부탁해요. 사람 보낼 테니까 그쪽에 건네주면 돼요.”
“알겠습니다, 부실장님!”
서원웅은 전화를 끊고 대찬을 바라봤다.
“이렇게 하면 돼?”
“이제는 목소리에 카리스마 장난 아닌데?”
서원웅은 싱겁게 웃었다.
“놀리지 마.”
“진짜야. 누가 회장님 핏줄 아니랄까봐.”
“인사기록카드나 가지러 가.”
“옙, 부실장님. 감사합니다.”
능글맞게 웃은 대찬은 서원웅의 볼을 검지로 쿡 누르고는 도망치듯 인사팀으로 향했다.
“서원웅 부실장님이 보내서 왔는데요.”
“아, 여기 있습니다. 확인 후에는 꼭 파기 부탁드립니다.”
“예, 걱정 마세요.”
대찬은 웃으면서 양철 부장의 인사기록카드를 넘겨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