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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54화 (153/556)

난 할 수 있어 154화

직선적인 사과에 대찬은 살짝 당황했다.

“회장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아니야. 내가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남한테 떠벌리고 다녔으니 이 사달이 난 게지. 부디 사과를 받아주길 바라네.”

“제가 받고 안 받고 할 위치가 아닙니다. 회사를 관두지 않는다면요.”

“제발 관두지 말라달라고 비는 거야.”

대찬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정중한 마음으로 회장님 사과를 받겠습니다.”

“고맙군. 자네 앞으로 내가 소유한 필래마트 주식 300주가 증여될 거야. 부디 받아주게.”

“회, 회장님.”

골탕을 먹긴 했지만 피해 없이 끝난 일이었다.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도 돈을 뜯어내겠다는 작정은 없었다.

주식 3천만 원 어치를 주겠다니.

군침은 돌았지만 독이 든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거액이었다.

“받아. 안 받으면 내 마음이 개운하지 않아서 그래.”

“하지만 이건 너무 많은 돈입니다.”

“자네 입장에서 많겠지. 나한테는 껌 두 통 값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이렇게라도 해야 증발했던 애사심의 만분지일이라도 돌아오지 않겠나. 거절은 말아주게.”

서청수 회장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후, 대찬은 필래마트 임직원 중에서는 세 번째로 많은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다.

서원웅이 필래마트의 주인이 되면 네 번째로 밀려나긴 하겠지만.

서청수 회장은 이렇게 일을 매듭지었지만, 이동수 부사장처럼 망동하는 2인자는 필래그룹에도 있었다.

장백주 비서실장이었다.

이동수 부사장이 자기의 영달을 위해 무리수를 두는 사람이라면, 장백주 비서실장은 회장을 위해 그러는 사람이었다.

그는 회장이 일개 대리한테 쩔쩔매는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기가 모이는 주인이 쩔쩔매면, 자기는 납작 엎드리기라도 해야 하느냐는 심정이었다.

장백주 비서실장은 서청수 회장과 함께 있을 땐 2인자였지만, 또 자기 패거리를 거느릴 때는 1인자였다.

가까운 부하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한바탕 대찬을 성토한 그는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수지가 안 맞아.”

“예?”

“그렇잖나. 조대찬이는 얼마나 득의양양하겠어. 회장님 야코를 확 죽여놨으니. 가만두면 무용담처럼 이 얘기를 나불댈 거야.”

“듣자하니 거만해질 만하더군요. 서원웅 씨 끼고 승승장구하니 얼마나 콧대가 높을까. 그래도 눈치란 게 있는데 알아서 자제하지 않겠습니까.”

“사내새끼들은 다 똑같아. 자기 애인에게 이 눈부신 전과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지 않고 배기겠어?”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확 조폭들이나 풀어버릴까보다.”

“시, 실장님!”

“농담이야. 나도 그 정도의 과격파는 아니라고.”

장백주 비서실장은 낄낄 웃다가 천천히 얼굴은 굳혔다.

“그래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망아지가 아무리 잘 달려도 길들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으니.”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대찬이가 유통에서 대관업무 봤다고 했거든.”

“예. 잠깐이긴 하지만요.”

필래유통에 심어놓은 장백주 비서실장의 측근이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오랜만에 옛날 전공 좀 살려보라지.”

“그 말씀은…….”

“예전에 조대찬이한테 흠씬 혼났던 직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예. 양철이라고, 지금은 부장입니다. 국회 쪽이랑 커넥션이 나쁘지 않아서 유통뿐만 아니라 그룹 차원의 대관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응, 그 친구한테 복수할 기회를 한번 줘봐.”

장백주 비서실장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김태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김태준, 많이 바쁜가?”

“괜찮아. 무슨 일이야.”

“그 조대찬이 말이야. 이번에 보니까 쓸 만하던데?”

“쓸 만하지. 그런데 갑자기 웬 조대찬 얘기야? 말단에는 시선도 안 주는 양반이.”

장백주 비서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나한테 잠깐 빌려주면 안 될까?”

“자네가 조대찬이를? 얻다 쓰게?”

“요즘 국회가 좀 짓궂어졌어. 지금 대관팀 풀로 가동하는데도 쉽지가 않아.”

김태준 사장은 미간을 좁혔다.

“대관 쪽에 써먹으려고 빌려달라는 거야?”

“그래. 고 녀석 대관 쪽에서도 잠깐 일했다며? 안테나가 예민한 걸 보니까 괜찮을 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장백주 비서실장은 김태준 사장을 잘 알았다.

그렇긴 하지만, 김태준 사장이 그렇게 말하면 다 넘어왔다는 뜻이었다.

“걔 잠깐 없다고 마트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이게 다 그룹을 위한 일인데, 돕고 살자.”

“자네가 평소 이런 말 하던 사람도 아니고… 많이 급한 거 같으니 알았어. 쓰고 바로 돌려줘야 돼.”

“다음에 술 한번 사지.”

장백주 비서실장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쿠바에서 돌아오고 사흘간 휴가를 냈다.

다시 출근해 사무실에 곱게 앉아 일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 필요했다.

서청수 회장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적지 않은 배상도 해주었지만, 마음이 그리 쉽게 달래지는 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사표를 면전에 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심사가 한번 뒤틀렸다고 멧돼지처럼 좌충우돌할 수는 없었다.

서청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고, 손해는 고스란히 대찬의 몫이었다.

어쨌거나 서청수는 대찬에게 가장 높은 비빌 언덕이었다.

대신 대찬은 보란 듯이 휴가를 온전히 김산하를 위해 썼다.

갓난아기의 몸부림만큼이나 무기력했지만 나름의 반항이었다.

오히려 김산하가 대찬을 걱정했다.

“사흘씩이나 연차 내도 괜찮겠어?”

“이것도 못 참아줄 성미라면 나도 더 볼 일 없어.”

“다혈질이야.”

김산하는 가볍게 쏘아붙였지만 내심 좋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대찬은 천천히 김산하의 머리를 쓸었다.

그는 김산하에게 쿠바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김산하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불안감이 움텄다.

“그런데 괜찮겠어?”

“음? 뭐가?”

“너무 대놓고 반항한 거 아닌가 싶어서.”

“아니었으면 상투 잡히고 좌로 우로 휘둘렸을걸.”

“그건 그렇지만, 긴장은 더 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김산하의 말은 적중했다.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사장실로 호출했다.

대찬은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난 일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부르셨습니까.”

“음, 자네한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고 싶어서.”

“…특별한 임무라뇨?”

특별한 임무라는 말을 듣자마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장 실장이 조 대리를 대관업무에 한 번 더 투입했으면 한다는데.”

“장백주 비서실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가 똘똘하다고 빌려달라던데.”

“CR팀 인력이 모자라진 않은 걸로 아는데…….”

“그렇긴 한데 국회가 요즘 예민하다고, 인력이 달린다더군.”

대찬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김태준 사장 앞에서 물러났다.

저간의 사정을 들은 서원웅은 대찬을 걱정했다.

서원웅은 대찬을 향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번 더 말해볼까? 아버지한테라도.”

대찬은 서원웅을 흘끗 보더니 대답했다.

“최악이에요. 그러면 회장님이 뭐라고 생각하시겠어요? 내 아들내미가 고작 친구 하나한테 휘둘리는구나, 하시겠죠.”

“틀린 말은 아닌데.”

대찬은 웃음으로 서원웅을 안심시키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우정은 눈물 나게 고맙습니다만, 제가 알아서 할게요. 방법이 없어요.”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 차장을 또 어떻게 구워삶으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사장님 말씀은 그게 아니긴 한데, 모르죠. 긴장은 하고 있으렵니다.”

“불안해.”

“일단 부딪쳐볼게요. 걱정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서원웅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냥 못하겠다고 하지. 그럼 그쪽에서도 별 말 없을 텐데.”

“높으신 분들은 고약하거든요.”

“고약하다니?”

“대관업무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마디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순 있을 거예요.”

서원웅은 그 말에 적극 동의했다.

“내 말이.”

“그런데 그렇게 홀라당 포기해버리면 도리어 실망하실 겁니다. 이 정도 압박도 못 견디고, 나약하다고. 장백주 실장이 회장님께 그렇게 고해 바치겠죠.”

“정말 그럴까?”

대찬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술수가 있다 해도 극복해내는 편이 제게도, 부실장님께도 좋을 겁니다.”

서원웅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으음…….”

서원웅은 여전히 불안했다.

계속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면 더 심한 보복이 따를까 염려했다.

대찬은 자신보다 더 걱정 가득한 서원웅을 보고 풋 웃었다.

그는 팔꿈치로 서원웅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서원웅.”

“응?”

“지금 나는 델리만쥬야. 지하철에서 파는 델리만쥬.”

“…뭐?”

대찬의 괴상망측한 말에 서원웅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퇴근길에 개찰구 나오면서 델리만쥬 냄새 맡은 적 있잖아.”

“냄새는 기가 막히지.”

“그런데 사 먹으면?”

“기대만 못하지.”

“그거랑 비슷해.”

“당최 무슨 말인지.”

대찬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고개 푹 숙이고 가랑이 사이를 기는 건 기대를 저버리는 셈이야. 입에 들어간 델리만쥬 꼴이 되는 거야.”

“그럼 술수가 있어도 네가 극복해내는 건?”

“입안에 안 들어가고 맛있는 냄새만 폴폴 풍기는 거지.”

“별…….”

서원웅은 허무하게 웃었다.

“델리만쥬 냄새 한번 맡아볼래?”

대찬이 그렇게 말하며 겨드랑이를 들이대자 서원웅은 질겁하며 대찬의 곁에서 후다닥 멀어졌다.

오랜만에 다시 국회로 왔다.

대찬은 업무에 익숙했지만, 회사는 굳이 사수를 붙여줬다.

‘아무렴 어때, 양철 차장만 아니면 되지.’

대찬의 물렁한 생각은 즉시 응징되었다.

양철 차장, 아니 이제는 부장이었다.

장백주 실장은 하고 많은 대관팀 자원 중에 양철 부장을 붙였다.

이쯤 되면 숨은 속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대찬의 앞에 나타나 음흉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지?”

“…….”

대찬은 쉽게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 곤란한 표정을 양철 부장은 웃으면서 즐겼다.

국회는 양철 부장의 홈그라운드였다.

그 오만한 기운이 절정에 달했다.

“지난번처럼 물렁하게 생각하고 들어갔다간 큰코다칠 거다.”

“…….”

대찬은 양철 부장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양철 부장은 그런 대찬을 못마땅하게 아래위로 훑었다.

“새끼가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싸가지 없는 새끼.”

“…….”

대찬은 상대하지 않았다.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만만한가 보자. 이번에야말로 엿 되게 해줄게.’

양철 부장은 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았다.

국회의 연녹색 돔이 대찬과 양철 부장을 반겼다.

한국 정치의 중심.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과 그들의 떡고물을 얻으려는 자들이 몰리는 복마전.

대찬도 그런 자들의 일원으로서 국회에 입성했다.

-정보는 국력이다.

국가정보원의 지나간 슬로건이다.

비단 국가정보원에게만 해당되는 외침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정보는 힘이다.

어느 슈퍼에서 주민등록증 검사 없이 담배를 팔더라는 정보는 비행청소년의 힘이다.

어느 고물상에서 종이를 킬로그램당 20원을 더 쳐주더라는 정보는 폐지 줍는 노인의 힘이다.

국회 앞에 양복을 잘 차려입고 서류가방을 든 채 대기하는 자들도 정보를 갈구했다.

대찬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대관업무를 처리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정보를 취급한다.

보고 듣는 모든 걸 갈퀴로 끌어 모은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정보가 될 수는 없다.

정보와 소문을 분류한다.

천일염처럼 걸러진 순수한 정보들을 다시 조합한다.

그리함으로써 은폐된 진실에 접근한다.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대찬과 양철 부장은 국회 의원회관으로 우르르 들어가는 틈바구니에 섞였다.

바다로 뛰어드는 펭귄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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