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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53화 (152/556)

난 할 수 있어 153화

“이동수가 그 굳은 대가리로 조대찬이를 낚았네.”

보고서에 드러난 대찬의 행적은 이동수 부사장의 함정에 완전히 걸렸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동수 부사장의, 속된 말로 ‘뻘짓’이었지만 이 건이 대찬의 성질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여겼다.

“전략기획실 조대찬 대리 내 방으로 오라고 해.”

김태준 사장의 호출이 대찬에게 떨어졌다.

호출을 받고 대찬은 웃었다.

‘이 중년여우 같으니라고. 벌써부터 쩌렁쩌렁 호통 치는 연습하고 있겠구만.’

기다리던 일이었다.

대찬이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김태준 사장은 심각한 눈초리로 대찬을 쏘아봤다.

그는 한참 침묵했다.

그 침묵의 바닥에는 대찬의 숨을 잔뜩 옥죄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대찬은 김태준 사장의 의도대로 휘둘리지 않았다.

도리어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김태준 사장은 노기 띤 얼굴로 착 깔린 목소리를 발했다.

“자네, 일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쿠바 출장 건에 한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잘못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준 사장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종이 1장을 꺼내보였다.

“이게 뭔 줄 아나?”

“제가 제출한 원산지증명서입니다.”

“그래, 쿠바 상공회의소에서 발급한, GSTP에 의거한 관세혜택을 받으려면 원본 제출이 필수적이지.”

GSTP는 개발도상국에게 관세특혜를 주는 제도였다.

쿠바 역시 이 혜택을 받는 국가 중 하나였다.

수입업자인 필래마트가 이 혜택을 받으려면 원산지증명서 원본을 제출해야만 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쿠바는 사업자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나라라는 걸 한번 갔다와봐서 알 거야.”

“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한 번 발급한 원산지증명서를 다시 발급해주지 않아. 그렇지?”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원산지증명서가 없으면 관세혜택을 받지 못하고, 회사는 막대한 손해를 입어. 자네에게는 원산지증명서 원본을 제출할 의무가 있네.”

“그렇습니다.”

“그걸 이행하지 못하면 단순징계를 넘어 막대한 책임이 뒤따르지.”

“예, 모두 맞는 말씀이십니다.”

대찬은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끝까지 당당한 태도가 김태준 사장은 불쾌했다.

“그런데 자네는 원산지증명서를 제출하지 않았어.”

“사장님 손에 들린 건 뭡니까?”

“원산지증명서 비슷한 위조본이지. 와서 확인해.”

김태준 사장은 당연히 대찬이 당혹하리라 생각했다.

대찬이 출국할 때 가져간, 권혁우 대리에게 책장 사이에 꽂아놨다고 말한 원산지증명서는 가짜였다.

원본은 권혁우 대리가 빼돌렸다.

대신 대찬을 속이기 위해 위조본을 집어넣었다.

그렇기에 대찬이 제출한 원산지증명서는 위조된 것이었다.

그런데 대찬은 김태준 사장의 뜻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씩 웃었다.

김태준 사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웃어?”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헷갈렸군요.”

“헷갈려……? 그게 잘못을 저지른 새끼의 태도야?”

“다시 제출하겠습니다. 원본은 여기 있습니다.”

대찬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걸 김태준 사장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원산지증명서 원본이었다.

그러자 김태준 사장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걸……!”

“왜 놀라십니까? 제가 문서를 헷갈렸습니다. 원본은 항상 제 품에 있었고, 호텔방의 서가에는 제가 만든 위조본을 꽂아놨었습니다.”

“……!”

“그런데 제 위조본은 쿠바 측 인사의 서명이 조작된 건데, 이건 서명은 그대로고 중간의 숫자가 조작되었군요. 누군가 제가 만든 위조본을 빼돌리고 다른 위조본을 꽂아놓은 거 같은데…….”

권혁우 대리가 집요하게 원산지증명서의 보관장소를 물은 직후, 대찬은 김산호에게 위조본을 만들라 지시했다.

그리고 원본 대신 위조본을 서가에 꽂아두었다.

김태준 사장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런……!”

“제가 원산지증명서를 서가에 꽂아둔 걸 아는 사람은 권혁우 대리뿐인데요. 권 대리가 이 일을 꾸민 걸까요?”

“…….”

“아니면 흑막 뒤에 숨은 누군가가 있는 걸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왕장 실장님?”

김왕장 실장이란 말에 김태준 사장은 관자놀이의 핏줄이 곤두섰다.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왜 그러셨습니까?”

대찬은 분노로 일렁이는 눈빛을 김태준 사장을 향해 쐈다.

김태준 사장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할 말이 없었다.

대찬은 속에서 요동치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리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장님, 저는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회사를 위해서요. 그런데 왜 제게 이런 술수를 쓰신 겁니까.”

“…….”

“제가 봐온 사장님은 떳떳하고 당당한 분이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치졸하게만 보입니다.”

김태준 사장은 한참 침묵했다.

수치심인지 당혹감인지 그의 얼굴이 한참 붉었다.

대찬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김태준 사장의 입은 한참 닫혀 있었다.

이제 와서 이동수 부사장이 꾸민 흉계고, 자기는 뒤늦게 알고 어쩔 수 없이 눈감아줬을 뿐이다.

그렇게 변명하기에는 자신을 일컬어 치졸하다고 하는 대찬의 말을 확인해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최종결재자는 김태준 사장 본인이었다.

그는 비겁하게 이동수 부사장을 들먹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잘못했어.”

“사장님, 저는 사과를 부탁드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셨냐고 여쭸습니다.”

자기 눈도 똑바로 못 쳐다보던 대찬이 이제는 도리어 자신을 몰아치고 있었다.

김태준 사장은 굴욕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자네를 길들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조금 거친 방법을 쓰고 말았어.”

“저는 지금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대체 왜 저를 길들이려고 하시는 겁니까.”

“…결혼.”

“진짜 너무하시는군요.”

이미 단호히 의사를 밝혔던 말이 김태준 사장의 입에서 다시 튀어나오자 대찬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김산하와 결혼을 하고 못하고는 후순위의 일이었다.

중요한 건, 인생의 중대사를 회사가 결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회사가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이런 내밀한 일에까지 간섭하는 건 건방지다는 말을 들어도 쌌다.

김태준 사장은 이왕 망가진 것, 속내를 그대로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회장님은 자네를 어떻게든 조카사위로 삼고 싶어 하셨어. 그 마음은 지금도 똑같으시고.”

“저는 분명히 거부의사를 밝혔습니다. 회사에서 이 이상 과격하게 나오는 건 그야말로 월권입니다. 공산당도 이렇게는 안 합니다.”

“그러니 자네를 빠져나올 수 없는 곤경에 빠뜨린 다음 혼인을 강제할 생각이셨다.”

“함정에 빠뜨려놓고는 저를 건져주는 대가로 회장님의 외조카랑 결혼하라고요.”

“…그래.”

“제비 다리 부러뜨렸다 다시 붙여놓은 놀부와 다를 게 뭡니까?”

김태준 사장의 얼굴이 굳었다.

“비아냥거려도 할 말이 없군.”

“왜 그렇게 혼인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서원웅 부실장 하나만으로도, 아니 이미 회장님께 받은 은혜만으로도 회장님께 충성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지금은 충분하지만 미래에는 충분하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그 불확실성 하나 때문에 그런 가혹한 흉계를 꾸민 걸 제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자네에게 이해를 구하는 건 계획에 없었어. 이 일은 성공할 일이었으니까.”

“아, 예, 그러십니까.”

대찬은 노기를 참기 어려웠다.

정제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김태준 사장은 유구무언이었다.

“일단 물러가겠습니다.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찬은 깍듯하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앞에서는 침착했지만 대찬의 속에서는 분노가 미친 개구리처럼 뛰어댔다.

대찬은 사장실로 향하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벽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이를 으드득 갈았다.

“치사한 새끼들…….”

그는 넥타이를 확 풀어헤쳤다.

김태준 사장은 대찬이 앉아있던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허공에 탄식을 뿜었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이동수 부사장에 대한 원망의 마음은 뒤로 밀어두었다.

그에게 대찬은 그야말로 신기한 놈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대찬의 두개골을 따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권혁우 대리를 의심한 점.

원산지증명서를 노리고 있다는 걸 간파한 점.

위조본까지 만들어 역공을 펼친 점.

김태준 사장 자신이 김왕장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점.

그 와중에 맡은 업무는 완벽하게 처리한 점.

아무리 이동수 부사장이 아둔하다지만 아등바등 마련한 함정을 단기필마로 돌파한 점.

그것들을 모두 홀로 해낸 대찬에 김태준 사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장백주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와 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장백주 비서실장은 이를 서청수 회장에게 가감 없이 전달했다.

서청수 회장은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거야.”

“…예, 회장님.”

“이게 무슨 꼴이야. 천하의 김태준이가 고작 대리 하나한테 잡아먹혀?”

“면목 없습니다.”

“이 사람아, 조대찬이를 혼맥으로 끌어오고 싶은 마음은 여전해. 그래도 이런 방식은 좀 아니지 않나?”

“…예, 경솔했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잘못을 보였으면 배상은 확실히 해야 해. 잘한 일에 대한 보상은 확실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확실히 해야 하는 게 우리 잘못에 대한 배상이야.”

“옳으신 말씀입니다.”

“조대찬이한테 내가 직접 사과하지.”

김태준 사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응, 면목이 없어야지. 그리고 말로만 해치울 수는 없으니까. 어이, 백주.”

서청수 회장은 장백주 비서실장을 불렀다.

“네, 회장님.”

“내 몫으로 된 필래마트 주식 있지.”

“…예, 회장님.”

“그거 300주 떼서 조대찬이한테 증여해.”

그 말에 장백주 비서실장은 미적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트 주식 한 주에 10만 원입니다. 300주면 3천만 원입니다, 회장님.”

“알아. 나는 산수도 못하는 줄 알아?”

“김태준 사장이 가진 게 500주고, 이동수 부사장은 200주밖에 안 됩니다.”

“안다고.”

“300주면 조대찬이 일개 대리 주제로 부사장보다 많은 주식을 보유하게 되는 겁니다. 금액 문제를 떠나 위신 문젭니다.”

서청수 회장은 피식 웃었다.

“이번 일로 이동수 그 새끼가 조대찬보다도 못하다는 게 여실히 증명됐잖나?”

“하지만…….”

“백주야, 말이 너무 많다. 나 늙었어. 오래 말하면 기운이 빠져. 기운이 빠지면 성질난다고.”

경고였다.

장백주 실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서청수 회장은 이번 일로 대찬을 향한 더 강한 욕구를 느꼈다.

“…놈을 꼭 내 옆에 두고 싶군.”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김산하 양을 청부살인 할 수도 없고 말이야, 그렇지?”

“그, 그건…….”

그 말에 장백주 비서실장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서청수 회장은 푸 웃었다.

“농담일세. 자네답지 않게 왜 쓸데없이 심각해지나.”

“일단 기다려보시죠. 그 무렵의 남녀는 변덕이 심하잖습니까.”

“조대찬, 김산하 그 둘은 대학 때부터 붙어먹었어. 변덕을 부리려면 진작 부렸지. 또 이렇게 된 이상 김산하가 아니더라도 내 뜻대로 결혼을 할 것 같진 않아.”

“당장은 도리가 없습니다. 이 일은 불문에 부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서청수 회장은 장백주 비서실장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누구한테 불문에 부친다는 건가? 그럴 권리는 조대찬이에게 있지.”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거야 원, 단단히 큰코다쳤어.”

그걸로 서청수 회장은 논의를 종결시켰다.

그리고 그는 본인이 말한 대로,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전화 괜찮나?”

“예, 회장님. 괜찮습니다.”

“미안해.”

서청수 회장은 에두르지 않고 솔직하게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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