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52화
“원산지증명서는 발급받으셨습니까?”
“예. 그렇지 않아도 막 발급받고 오는 길입니다.”
“그렇군요. 어디에 보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걸 왜 물어보시는 거죠?
대찬은 예민하게 받아치려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프론트에는 맡기지 않을 생각입니다. 일처리가 그다지 세련된 편이 아니라 신뢰가 잘 안 가거든요.”
“그럼 어디에……? 객실?”
권혁우 대리는 집요하게 물어봤다.
대찬은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객실 내 금고도 호텔직원에 의해 도난당할 염려가 있습니다. 어차피 서류 1장입니다. 저기 장식용으로 비치된 책들 사이에 끼워놓으려고요.”
“그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죠. 척 봐도 저거 들여놓은 다음으로는 한 번도 손 안 댄 거 같지 않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권혁우 대리는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에게 그렇게 일러둔 대찬은 김산호를 불렀다.
그러고는 한참을 무어라 속닥거렸다.
대찬의 귓속말을 듣는 김산호의 울대가 계속 일렁였다.
계약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짧은 시간 정들었던 쿠바를 떠나는 날도 가까워졌다.
권혁우 대리가 대찬에게 말했다.
“사흘 후면 출국이군요.”
“네, 시간이 금방 갔습니다.”
대찬의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낮에는 계약에 매달렸고, 밤에는 또 다른 일에 매달렸으니 시간이 금방 갈 수밖에 없었다.
“내일 도장 찍으면 공식적인 업무는 모두 끝납니다. 조 대리님, 이제는 제 소원 좀 들어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소원이라뇨?”
“술 한잔하잔 말입니다. 모처럼 돈독한 관계를 맺어두고 싶었는데, 대리님이 계속 물리치는 바람에 좀 섭섭했습니다.”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제가 좀 냉랭하게 굴었죠. 해외계약은 처음이라 긴장해서 그랬습니다.”
“자, 일도 끝났겠다, 이제는 거절하시면 진짜 미워할 겁니다.”
“오히려 제가 급해요. 지금까지 꼿꼿하게 굴면서도 얼마나 술이 당겼는지 아십니까?”
권혁우 대리는 호탕하게 웃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자고요.”
“저를 많이 도와주셨으니 제가 거하게 사겠습니다. 술맛 좋은 곳으로 물색만 해주세요.”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권혁우 대리의 표정은 지금껏 보던 것 중 가장 밝았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자 권혁우 대리는 대찬과 김산호를 한 식당으로 이끌었다.
쿠바의 모든 건물이 그렇듯 파스텔톤의 페인트가 발라진 오래된 건물이었다.
건물 밖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바깥공기를 쐬며 술을 마셨다.
권혁우 대리와 함께 있는 탓에 불편했던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풀어질 정도였다.
‘이러면 안 되지.’
대찬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권혁우 대리는 대찬의 잔에 아바나클럽 럼주를 가득 따라주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쿠바는 애주가에게 참 사랑스러운 나라죠.”
“동감입니다.”
대찬, 김산호, 권혁우 대리는 잔을 부딪쳤다.
김산호도 바로 길 건너 카리브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넘어오는 파도 때문에 항상 젖어있는 도로, 그리고 그 도로 따라 만들어진 방파제, 2차 대전 때 만들어진 자동차가 여전히 현역이고, 마음을 흔드는 라이브 재즈, 새벽까지 안전한 치안. 좋은 나라예요.”
권혁우 대리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리고 가슴 큰 미녀들까지요.”
“술도 맛있고요.”
대찬은 웃으면서 다시 건배를 제의했다.
셋은 원없이 술을 마셨다.
점점 취기가 올랐다.
“쿠바에 와서 랑고스타를 먹지 않으면 안 되죠.”
“랑고스타? 랍스터 말입니까?”
“예. 근해에서 잡아 올린 랍스터는 한국에서 먹는 것과는 사뭇 다르죠.”
권혁우의 말에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배나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 스트레스 받아서 살수율이 떨어지니까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그러고 보면 쿠바에서는 랍스터도 낙천적이겠군요. 스트레스 없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으니까.”
“랍스터가 들으면 퍽 소름끼칠 말씀이네요.”
셋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술을 마셨다.
모두 얼굴이 붉어졌다.
럼주는 도수가 높은 만큼 빨리 취했다.
그때 그들의 옆으로 한 쌍의 남녀가 지나갔다.
늙은 백인 남자와 젊은 메스티소 여자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권혁우 대리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킬킬 웃었다.
“아바나에는 저런 남녀가 많지요.”
“별로 유쾌해 보이진 않네요.”
대찬은 그쪽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권혁우 대리는 계속 그걸 화두로 삼았다.
“가슴 처지고 배 나온 할아버지들이 가진 건 돈밖에 없으니 쿠바로 원정을 오는 겁니다.”
“뭐, 우리한테도 낯선 모습은 아니잖습니까. 동남아에서 쉽게 볼 수 있죠.”
“조 대리님도 관심 좀 있으십니까?”
대찬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뇨.”
“쿠바가 노동자의 낭만이 있는 나라라고 하셨죠.”
“그랬죠.”
“저는 쿠바에 노동자의 낭만은 없지만, 남녀의 낭만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낭만, 로맨스죠.”
“권 대리님은 저게 로맨스로 보입니까? 나는 비즈니스로 보이는데.”
권혁우는 씩 웃으면서 대찬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아뇨, 저건 비즈니스고, 아직 탱탱한 우리들은 로맨스가 가능하죠.”
“무슨 뜻입니까?”
“쿠바의 여성들은 개방적이에요. 돈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를 즐기죠. 관계하려면 맥주 한 병만 사달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비즈니스가 아니라 로맨스의 가벼운 정표 같은 거죠.”
“그래서, 로맨스를 하고 싶으시다?”
권혁우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엄지와 나머지 네 손가락을 경망스럽게 부딪쳤다.
캐스터네츠를 치듯이.
“포키포키.”
“뭡니까, 그게?”
“뭐긴요, 그거죠.”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스페인어를 가르쳐주시네요.”
권혁우 대리는 풋 웃었다.
“스페인어가 아니라 이 나라 은어예요. 여긴 동양인이 흔치 않아요. 아마 관심 보일걸요? 동양인과 잤다는 건 저들에게 훈장 비슷한 거예요.”
“권 대리님이나 실컷 하시죠, 그 로맨스. 저는 관심 없습니다.”
대찬은 냉랭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권혁우 대리는 집요하게 대찬에게 요구했다.
“에이, 왜 이러실까. 저랑 같이 쁘라도 거리로 나가시죠. 좌우로 늘어선 벤치에 앉아있는 여자들은 모두 준비를 마친 여자들입니다.”
그러자 김산호가 권혁우 대리의 역성을 들었다.
“그래요, 형님! 로맨스라잖아요, 로맨스.”
“너는 산하 누나 동생이 돼서 그게 할 소리냐?”
“에이, 눈감아줄게요. 남자끼리 알면서.”
대찬이 침묵하자 권혁우 대리가 그의 손을 이끌었다.
대찬은 못 이기는 척 끌려 나갔다.
권혁우 대리는 그런 대찬에게 눈을 흘기면서 묘한 웃음을 지었다.
권혁우 대리는 유창한 스페인어로 벤치에 나란히 앉은 3명의 여자들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대찬 일행을 위아래로 훑더니 끈적끈적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권혁우 대리는 그들과 요란하게 떠들며 근방의 호텔로 갔다.
“술 잘 얻어먹었으니 호텔비는 제가 내죠.”
“묵고 있는 호텔이 있는데 굳이 또 잡습니까?”
“에이, 자는 곳과 하는 곳은 구분해야죠.”
권혁우는 그렇게 둘러대고 기어코 호텔비를 지불했다.
방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다.
이미 묵고 있는 호텔이 있기 때문에 회사 경비처리도 불가능했다.
순수하게 권혁우 대리의 사비여야 했다.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그렇지, 대리 월급으로 턱 낼 만한 돈은 아니었다.
대찬은 감을 잡았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권혁우 대리는 자신과 눈이 맞은 여자의 허리를 감고 먼저 사라졌다.
술이 될 대로 됐겠다, 김산호는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전투불능이었다.
대찬은 혀를 끌끌 차고 자신의 짝꿍을 불렀다.
“세뇨리따.”
“음?”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다른 급한 일이 생겼거든.”
그러자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
“한국에 애인이 있어.”
그러자 여자는 피식 웃었다.
“동양인들은 이중적이라더니,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해.”
“로 시엔토(미안해.).”
“이럴 거면 왜 호텔까지 왔는데?”
여자는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그럴 일이 있었어.”
“좋아. 그럼 돈 줘.”
“응?”
“우리 시간을 뺏었잖아. 그 대가는 지불해야지.”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적지 않은 돈을 지불했다.
여자는 그 돈을 챙겼다.
“호텔 방은 마음대로 이용해. 모쪼록 제대로 사과가 됐으면 좋겠군.”
“이 정도면 충분해. 더 이상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좋아.”
여자는 빙긋 웃고는 친구와 함께 호텔방으로 올라갔다.
김산호는 딸꾹질을 하며 대찬에게 말했다.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긴 했지만, 미인을 눈앞에서 놓치려니 아쉽긴 하네요.”
그러자 대찬은 김산호의 뒤통수를 후렸다.
“여기서 실수하면 오다혜 씨한테 떳떳할 수 있을 거 같아?”
꼬집어 말한 대찬은 김산호를 다른 호텔방으로 올려 보냈다.
김산호는 고주망태가 되지는 않았지만 민첩하게 움직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당장 똑바로 서있지도 못해 비틀비틀하던 참이었다.
혹을 달고 뛰느니 혼자 뛰는 게 나았다.
“올라가서 쉬고 있어.”
대찬은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는 말도 안 되는 바가지요금을 불렀지만 대찬은 흥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제안을 했다.
“빨리 가면 돈을 더 주지.”
“좋아!”
기사는 작정하고 액셀을 밟았다.
눈 깜짝할 새 원래 묵던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내린 대찬은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로비에서 대기했다.
10분가량 경과되었다.
급한 시선의 권혁우 대리가 로비를 지나쳐 들어갔다.
대찬과 김산호가 묵는 방과 권혁우가 묵는 방은 접이식 칸막이로 연결돼 있었다.
그렇기에 열쇠가 없어도 드나들 수 있었다.
권혁우 대리가 안으로 들어간 지 다시 10분.
그는 주위의 눈치를 보며 호텔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의 손에는 종이 1장이 들려 있었다.
낡은 서가 사이에 대찬이 꽂아놓은 원산지증명서였다.
권혁우 대리는 누가 볼까 얼른 종이를 접어 제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대찬은 그걸 수수방관했다.
권혁우 대리가 호텔을 완전히 빠져나가고 나서야 유유히 자신의 호텔방을 찾아 들어갔다.
권혁우는 한참 후에 대찬의 방을 찾아왔다.
완전히 넋이 나간 김산호를 대동한 채였다.
대찬은 침대에 누운 채로 부스스 눈을 떴다.
권혁우 대리가 김산호를 옆 침대에 눕히고는 물었다.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아, 술이 좀 취해서…….”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그렇지……. 즐기긴 하셨습니까?”
“아뇨. 도저히 뭘 할 여건이 안 되더군요. 권 대리님이 기껏 거금을 썼는데 죄송합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취해서 몸을 가누기 어렵군요. 오늘은 일단 자야겠습니다.”
대찬은 힘겹게 돌아누웠다.
권혁우는 완전히 술에 찌든 대찬의 뒷모습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출국일이 다가왔다.
대찬은 권혁우 대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다음에 한국 들어오시거든 연락 주세요.”
“저야말로 대리님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함께해서 좋았습니다.”
둘은 맞잡은 손을 두 차례 흔들고 손을 뗐다.
그리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둘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대찬은 굳은 표정으로 캐리어를 끌고 쿠바 호세 마르티 공항의 출국장을 빠져나갔다.
김산호가 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잘되겠죠?”
“잘돼야지. 내 소관이 아니야. 회장님의 도량이 얼마나 넓은지의 문제야.”
“하…….”
쿠바를 떠난 비행기는 캐나다를 경유해 다시 인천에 착륙했다.
시차적응이 되지 않은 몸을 비틀비틀 이끌고 대찬은 집으로 돌아왔다.
대찬의 업무는 완벽했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대찬은 결재라인대로 보고서를 올렸다.
김태준 사장은 그 보고서를 받았다.
보고서를 읽고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