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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51화 (150/556)

난 할 수 있어 151화

대찬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역시 노동자의 낭만이 살아있군요, 쿠바는.”

권혁우 대리는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곧장 통역하지 않고 대찬에게 물었다.

“그 말씀은 별로 적절하지 않은데요.”

그러자 대찬은 권혁우 대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스페인어로 말했다.

“Cuba tiene romance de trabajadores.”

김산호가 대찬을 보며 물었다.

“스페인어도 공부하셨어요?”

“미국에 있을 때 라티노 친구한테 귀동냥한 거야. 방금도 제대로 된 번역 아니야.”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는 권혁우 대리에게 덧붙였다.

“낭만도 있고 착취도 있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파트너한테 덕담 좀 한 건데 예민하시네요.”

대찬이 스페인어로 칭찬을 해주자 쿠바엑스포트의 직원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나라 커피는 대개 유럽이나 일본으로 수출되는데, 한국 친구들에게도 우리 커피를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영광입니다.”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대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김산호를 보고 툴툴거렸다.

“일본 놈들, 맛있는 건 꼭 우리보다 한 템포 빠르다니까.”

대찬 일행은 한 커피농장을 둘러봤다.

직원의 말대로 3대 가족이 단란하게 농사를 짓고 있었다.

대찬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올라(Hola).”

“올라.”

일하던 가족들은 따뜻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커피를 만드는 과정을 손수 보여주었다.

농장 옆의 허름한 통나무집에서 모든 과정이 이뤄졌다.

커피를 볶고, 식히고, 빻아서 뜨거운 물에 섞는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가족 중 가장 어른인 할머니가 이가 몇 개 빠진 치열을 환히 드러내며 물었다.

“꼰 레체?”

“노노, 쏠로.”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김산호가 불쑥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라떼로 마실 거냐고 물어보셔서 에스프레소로 마신다고 했어.”

그러자 김산호도 할머니에게 정직한 발음으로 말했다.

“저도, 저도 쏠로!”

할머니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씨.”

“뭐라세요? 뭐라세요?”

“알았다셔.”

“와, 나 쿠바 사람이랑 스페인어로 대화했다!”

아이처럼 기뻐하는 김산호를 보고 대찬은 피식 웃었다.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커피를 만들어 대접했다.

그윽한 향기에 대찬의 눈이 절로 감겼다.

“아, 좋다. 한국에서도 이 맛이 그대로였으면 좋겠는데.”

“맛이 좋습니까?”

쿠바엑스포트사의 직원이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대찬에게 물었다.

대찬은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아주 좋습니다.”

딱딱한 비즈니스의 목적으로 왔지만, 대찬은 커피에 그만 마음이 풀어졌다.

대찬은 김산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김 주임 누나한테 자랑해야겠다. 좋은 공기, 맛있는 커피 한꺼번에 마시고 있다고.”

“형님 핸드폰 로밍 안 하셨잖아요?”

“아, 맞다. 너는 했어?”

“안 했죠, 당연히. 돈 아깝게요. 저번에도 물어봐 놓으시고는.”

“그랬지, 참.”

“기억력도 좋으신 양반이.”

김산호는 그렇게 툴툴댔지만 대찬은 웃기만 했다.

그는 권혁우 대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권 대리님, 죄송하지만 전화 한 통 써도 되겠습니까? 통화료는 저녁으로 갚겠습니다.”

“예, 그러시죠.”

권혁우 대리는 순순히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휴대폰을 받아든 대찬은 곧장 다이얼을 누르지 않았다.

슬쩍 액정을 자기만 보이는 쪽으로 돌리며 최근통화목록을 엿봤다.

→김왕장실장님 010-5567-1*** 1월 12일 00:57

→김왕장실장님 010-5567-1*** 1월 12일 09:22

→김왕장실장님 010-5567-1*** 1월 12일 12:42

→김왕장실장님 010-5567-1*** 1월 12일 17:58

→김왕장실장님 010-5567-1*** 1월 13일 00:11

→김왕장실장님 010-5567-1*** 1월 13일 08:45

→김왕장실장님 010-5567-1*** 1월 13일 12:44

권혁우 대리는 대찬이 도착한 날부터 하루에 몇 차례씩이나 김왕장 실장과 통화를 했다.

대찬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대찬이 주관하는 사업이고, 권혁우 대리는 보조일 뿐이었다.

때문에 그가 어딘가에 따로 보고할 일도 없었다.

보고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전자메일로 하면 될 일이다.

굳이 유선으로 할 만큼 급하지 않았다.

이 상황은 2가지 가설만 가능했다.

첫째, 권혁우 대리와 김왕장 실장이 은밀한 내연관계에 있다.

둘째, 김왕장 실장으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았다.

전자보다는 후자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찬은 김왕장이라는 이름과 그의 휴대폰 번호를 기억했다.

“산하 누나 번호가 뭐더라…….”

김산하의 번호쯤이야 외우고 있었다.

대찬은 자신의 휴대폰을 보면서 김산하의 번호를 찾는 대신, 김왕장의 번호를 메모장에 입력해두었다.

그리고 권혁우 대리의 전화 거는 패턴을 파악했다.

자정, 아침 9시, 정오.

대찬은 그걸 머리에 인식하며 김산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어, 나 대찬이. 여기 좋다. 물 맑고 공기 좋고 커피 맛있고. 동생 대신 누나가 왔어야 하는 건데. 잘 지내고 있어. 왠지 수확이 있을 거 같아.”

대찬은 단란한 통화를 끝내고 권혁우 대리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잘 썼어요.”

“별말씀을요.”

권혁우 대리는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날, 커피 농장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대찬은 호텔에서처럼 김산호와 같은 방을 썼다.

그러나 호텔 같은 방음시설은 없었다.

통나무 사이는 모기도 드나들 만큼 삐뚤빼뚤했다.

말소리 정도야 쉽게 새어나갔다.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권 대리 수상해.”

“네?”

대찬은 김왕장 실장과의 통화내역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김산호도 수상하게 여겼다.

“패턴대로라면 6시쯤 전화하러 나갈 거야. 그때 슬쩍 뒤를 밟아봐. 들키지 않게.”

“이야, 이거 첩보영화 찍는 거 같은데요? 제가 또 통신병 출신이거든요. 자신 있습니다.”

통신병 출신인 것과 들키지 않게 뒤를 밟는 게 무슨 관계가 있나 싶었지만, 여독이 쌓인 대찬은 구태여 말꼬리를 잡지 않았다.

저녁 시간, 간단히 식사를 마친 권혁우 대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천천히 식사하십시오.”

“식사를 빨리하시는 편이네요.”

“그런 소리 좀 듣습니다.”

권혁우 대리는 그렇게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

대찬은 김산호에게 눈짓을 보냈다.

김산호는 대찬과 비슷한 눈빛으로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대찬은 같이 식탁에 둘러앉은 농장 가족들을 보며 웃었다.

“께 사브로소!(맛있습니다.)”

그러자 가족들은 순박한 웃음으로 기뻐했다.

대찬은 느긋이 주어진 음식을 다 먹었다.

그가 여유롭게 식사를 하던 그때, 김산호는 홀로 잔뜩 긴장한 얼굴로 권혁우 대리의 뒤를 밟았다.

들킬 염려가 있어 근접하지는 못했지만, 권혁우 대리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습니다. 예, 워낙 목석같아서 어렵지만… 잘 구슬려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권혁우 대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김산호는 후다닥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러 방에 돌아왔을 때 들은 그대로를 대찬에게 전달했다.

불분명한 내용이었지만 행간을 짚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대찬의 표정이 심각했다.

“잘 구슬려본다고……?”

이제 대찬의 주된 관심사는 커피에서 권혁우 대리로 옮겨갔다.

정확히는 권혁우 대리 뒤에 똬리를 튼 독사 같은 누군가에게로.

대찬은 내색하지 않았다.

서너 군데의 농장을 더 돌아보고 쿠바엑스포트사, 그리고 쿠바 정부를 상대하면서 업무에만 집중했다.

그건 낮의 일이었다.

밤에는 다른 일을 했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웅아, 계열사 직원 중에 김왕장 실장이라고 들어봤어?”

“아니, 난 잘 모르겠는데……. 한번 알아볼게.”

“가급적 남에게 알리지 말고 비밀리에 알아봐줘. 부탁한다.”

“알았어.”

대찬은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다가 다급히 다시 서원웅을 불렀다.

“원웅아.”

“어? 왜.”

“안 알아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서원웅은 김빠진 웃음을 지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네.”

“이 일은 최대한 물밑에서 캐야 할 거 같아.”

서원웅은 아무래도 이런 일에 요령이 없었다.

요령이 있다 해도, 남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회장님의 핏줄이 누군가의 뒤를 캐고 다닌다는 소문은 금세 퍼질 법했다.

대찬은 서원웅 대신 물밑전문가에게 의뢰했다.

바로 만몽거사였다.

“푸하하하!”

대찬의 말을 들은 만몽거사는 포복절도했다.

“뭐야, 왜 웃어요? 남은 심각한데.”

“이 밥통 새끼야, 안 웃게 생겼냐?”

“뭔데 그래요?”

심기가 뒤틀린 대찬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무심한 에미 애비가 자식새끼 이름을 김왕장으로 짓냐?”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정말 그런 사람이 필래그룹에 속해 있다면 이런 이름도 다 있다고 풍문으로라도 들을 법했다.

“그놈, 아니 그놈들이라면 내가 잘 알지.”

“네? 그놈들이요?”

만몽거사는 김왕장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그의 입에서 3명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김태준, 왕윤수, 장백주.”

“…어?”

셋 중 둘은 대찬이 아는 이름이었다.

김태준 필래마트 사장.

장백주는 서청수 회장의 비서실장이었다.

둘 다 서청수 회장의 복심이었다.

나머지 왕윤수의 정체는 만몽이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왕윤수 필래제과 상임고문.”

“김태준 사장, 장백주 실장은 회장님 왼팔, 오른팔이잖아요? 그런데 왕윤수 고문이라… 처음 듣습니다.”

“상임고문이 뭐 하는 자리인 줄 알아?”

“한직 아닌가요? 적당히 대접은 받지만 실권은 없는.”

“보통은 그렇지.”

“보통이 아니면요?”

“업무에서 매우 자유로우면서 위치는 높다는 장점을 활용하면 제법 파괴력 있는 자리가 되기도 하지.”

“그럼 왕윤수 고문은 보통이 아닌가요?”

“상임고문 자리는 껍데기야. 김태준, 장백주가 왼팔, 오른팔이라면 왕윤수는 눈깔이야. 서청규 사장의 동향을 나한테 물으러 올 때 김태준, 장백주도 있지만, 주로 오는 건 왕윤수지.”

“그럼 왕 고문이야말로 회장님의 진짜 심복이군요.”

“그렇지. 문자 그대로 왕고문이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돌아올 때 럼주 한 병이라도 업어오니라.”

만몽거사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때 대찬이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혹시 장백주 실장, 왕윤수 고문도 회장님과 인척관계인가요?”

“장백주 실장은 서청수 회장의 외가 쪽 사람이고, 왕윤수 고문은 서청수 회장의 여동생과 결혼했지. 여동생은 죽은 지 오래됐지만.”

“…감사합니다.”

그의 정보는 큰 단서가 되었다.

권혁우 대리의 전화를 받은 이가 셋 중 누군들 관계없었다.

중요한 건 이 일이 서청수 회장 쪽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러한 대찬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계약은 순조로웠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거칠 것이 없었다.

급감했던 쿠바의 커피생산은 교역수지를 높이기 위해 장려되는 추세였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건 쿠바 정부로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코트라의 무역관도 발 벗고 협력했다.

쿠바는 한국과의 교역이 미진했다.

건수가 적은 만큼 집중적인 역량지원이 가능했다.

코트라 아바나 무역관의 직원은 대찬에게 준수해야 할 사항을 상기시켜주었다.

“C/O는 보통 수입국의 영사관에서 발급하지만, 쿠바에는 대한민국 영사관이 없기 때문에 쿠바 상공회의소에서 발급받으셔야 합니다.”

C/O는 Certificate of Origin, 즉 원산지증명서의 약자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1회 발급만 가능하고, 정부에 원본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잘 보관해야 한다는 사실도 숙지하고 있습니다.”

대찬은 코트라의 직원이 재차 장광설을 읊기 전에 선수를 쳤다.

그러자 코트라 직원은 미소를 머금었다.

“잘 알고 계시군요.”

“좋은 과외 선생님이 계신 덕분에요.”

“도움이 됐다면 기쁩니다.”

대찬은 거듭된 코트라 직원의 말을 유념하며 쿠바 상공회의소에서 원산지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그런데 호텔에서 다시 만난 권혁우 대리가 그 원산지증명서에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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