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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50화 (149/556)

난 할 수 있어 150화

그는 그날 저녁, 김산하를 만났다.

사정을 들은 김산하의 눈이 커졌다.

“언제까지 있으래?”

“최소 2주.”

“최대?”

“기약 없음.”

“아…….”

대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실망?”

김산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근데 찜찜해서…….”

“뭐가?”

“나 때문이지?”

김산하는 눈치가 빨랐다.

몇 단계의 논리 대신 직감으로 알았다.

“누나 때문 아니야. 회사 때문이지.”

“뭐가 문제래? 내가 경쟁업체 직원도 아니고, 회장님도 날 모르시는 게 아니잖아?”

대찬은 망설임 없이 진실을 공개했다.

“나를 조카사위로 삼고 싶으셨대.”

“아…….”

김산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표정보다 복잡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대찬은 그런 김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었다.

“금방 갔다 올게. 내가 또 일은 끝내주게 잘하잖아.”

“응…….”

김산하의 표정이 개운치 않았다.

밥을 먹는 내내 그랬다.

그 좋아하는 술도 마다했다.

대찬은 집 앞까지 그를 데려다주었다.

잠깐의 이별을 기약하고 헤어지는 김산하의 걸음에도 머뭇거림이 남아있었다.

대찬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김산하를 불렀다.

“김산하.”

“응?”

“너 안 어울려.”

너라는, 대찬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낯선 호칭에 김산하는 긴장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뭐가……?”

“물 빠진 껌처럼 찌그러져 있는 거. 김산하랑 진짜 안 어울린다구.”

김산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뭘 또 찌그러져 있다고…….”

“자신 있지?”

“응?”

“나랑 손 꼭 붙잡고 있을 자신, 있지?”

김산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 * *

이동수 부사장은 김태준 사장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슬쩍 이 건을 언급했다.

그러자 김태준 사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조대찬이를 쿠바로 보내버렸습니다.”

“뭐 하자는 플레입니까, 지금?”

이동수 부사장은 김태준 사장이 껄껄 웃으며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반응은 정반대였다.

이동수 부사장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자, 잘못됐습니까?”

“똥을 찍어 먹어봐야 무슨 맛인지 알아!”

김태준 사장은 반말로 이동수 부사장에게 벼락같은 호통을 내렸다.

이동수 부사장의 오금이 저렸다.

김태준 사장은 눈을 부라렸다.

“농락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조대찬이 당신 장난감이야? 쿠바 원두 건은 매입부가 전문인데 당연히 매입부에서 처리해야지! 지금 회사에 손해 끼쳐가면서까지 할 일이야, 이게!”

“사, 사장님…….”

“그쪽은 양심도 없어? 조대찬이 덕분에 부사장 자리 꿰찼으면 108배라도 올리는 게 인지상정이지. 이건 은혜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들이박고 있으니, 참 나!”

“죄, 죄송합니다!”

이동수 부사장은 바짝 엎드렸다.

김태준 사장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내 얼굴에 똥 끼얹는 거야! 회장님 얼굴에 똥물 끼얹는 거라고, 알아!”

“아이고……. 그, 그럼 취소하겠습니다.”

“조대찬이 출국이 언젠데.”

“…내일입니다.”

“이런 화상!”

이동수 부사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장 모든 걸 취소하겠습니다.”

“겨우 원두 매입 건으로 조대찬이가 겁이나 먹겠어? 그거 그냥 차려진 밥상 주워만 먹으면 되는 일 아니냐고.”

그 말에 이동수 부사장이 오들오들 떨면서도 할 말은 했다.

“그, 그게… 단순히 매입부 대타로만 보낸 게 아니고 따로 또 손을…….”

“당신이 따로 손 써놓은 게 있다고?”

“…예. 조 대리가 당할 수밖에 없도록.”

김태준 사장은 노기를 누그러뜨리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것 때문에 우리 회사가 입는 피해는?”

“피해는 없습니다. 단순히 조 대리만 곤혹스러워지는 방법이라서요.”

“당신, 믿어도 돼?”

“다, 당연합니다, 사장님!”

김태준 사장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조대찬이가 이걸로 좀 고분고분해지면 아주 나쁘진 않겠는데.”

“그, 그렇죠…….”

“이미 저지른 일을 물리면 꼴이 또 우스워져. 이번 일은 반드시 당신이 책임지고 무마해야 해. 알았어?”

“넵, 사장님…….”

“그래도 당신은 못 믿겠어. 보고라인은 내 쪽으로 돌려놔.”

“아, 알겠습니다.”

이동수 부사장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김태준 사장은 이동수 부사장의 뒷모습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대찬은 쿠바로 떠났다.

추운 캐나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더운 쿠바로 향했다.

김산호 주임이 그와 동행했다.

그는 졸지에 쿠바행 비행기를 타게 된 걸 도리어 기뻐했다.

김산호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대찬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형님이라고 해도 되죠, 형님?”

“벌써부터 그러고 있으면서.”

대찬도 이역만리 타국에서까지 상사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지 않았다.

“저 해외여행 처음 가보잖아요. 첫 해외여행이 쿠바라니, 낭만적이지 않아요?”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 이건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야.”

“모든 여정은 여행이에요.”

할 말이 궁해진 대찬은 이마에 올린 안대를 다시 내렸다.

“잠이나 자.”

캐나다 토론토에서 4시간 걸려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에 도착했다.

대찬과 김산호는 쿠바에 도착하자마자 두툼한 파카를 벗었다.

30도에 육박하는 날씨였다.

2차 대전 때 생산된 자동차가 거리를 활보하는지라 매캐한 매연 냄새가 공항 밖에서부터 진동했다.

화생방 훈련에 쓰이는 CS탄을 옅게 흩뿌려놓은 듯했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대찬은 업무에 나섰다.

“시차적응이 먼저 아닌가요?”

김산호의 투정에 대찬은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럼 김 주임은 쉬고 있어요. 조 대리는 일하러 갈 테니까.”

“치사해.”

“애처럼 굴지 마.”

호텔 로비로 나가자 누군가 대찬을 맞았다.

한국인이었다.

“조대찬 대리님이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필래 컬처인더스트리 보고타 지사에 있는 권혁우 대리라고 합니다. 본사 측에서 조 대리님 수행하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컬처인더스트리.

지금의 대찬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혁우 대리에게 하자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 대찬은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저 때문에 멀리 콜롬비아에서 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만큼 본사 측에서 대리님을 아끼고 있단 뜻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아바나 바람 좀 쐬어보는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권혁우 대리는 굳이 덕담까지 건넸다.

“역시 촉망받는 기린아라고 하시더니, 직접 뵈니까 실감이 납니다. 외모는 대학생이신데 벌써 굵직한 사업을 다 주무르시고.”

“부끄럽습니다.”

권혁우는 하하, 웃었다.

“자, 그럼 처음 만난 기념으로 모히또나 한잔하실까요? 헤밍웨이가 마시던 그 집으로 모시죠.”

권혁우 대리의 제안에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쿠바엑스포트사를 바로 견학하고 싶은데요.”

쿠바엑스포트는 쿠바산 커피 원두의 수출을 담당하는 국영기업 중 한 곳이었다.

대찬의 말에 권혁우 대리는 난처한 듯 웃었다.

“첫날부터 무리하실 거 없습니다.”

“무리가 아니라 여유가 없습니다. 권 대리님한테는 죄송하지만, 일정은 최대한 업무 위주로 소화하고 싶습니다.”

“…대리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권혁우 대리는 일이 잘 안 풀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모처럼 쿠바로 출장을 온 만큼 즐길 것 즐기고 싶을 터였다.

대찬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 언제 또 쿠바로 올 짬을 내겠는가.

하지만 대찬은 일정을 빡빡하게 진행했다.

“형님, 뭐가 이렇게 바빠요? 모히또 한잔 정돈 괜찮잖아요?”

대찬과 같이 화장실에 온 김산호가 말했다.

대찬은 세수를 하고 손을 털면서 대꾸했다.

“느낌이 안 좋아.”

“네? 무슨 느낌이요?”

“왠지 나태하거나 여유 부리면 안 될 거 같은 느낌. 그냥 느낌이 그래.”

“그냥 모히또가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느낌 어쩌고 하면서 후까시 잡지 마시고.”

그러자 대찬이 김산호를 노려보더니 물 묻은 손을 그쪽을 향해 털었다.

김산호는 기겁을 하며 피했다.

“상사한테 말버릇하고는.”

“쿠바에서는 형님 하기로 했잖아요!”

“그럼 매형한테는 그렇게 막해도 되는 거냐?”

“앗, 그건 또 안 되죠. 그래도 형님이 너무 예민하신 건 사실이에요.”

“난 내 직감을 믿어.”

대찬은 한사코 모히또를 마다하고 쿠바엑스포트사로 향했다.

권혁우 대리에게 통역을 맡기고, 대찬은 쿠바엑스포트사와 대강의 의사를 교환했다.

“중부 산간지대에서 생산되는 크리스탈마운틴 제품이 가장 질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저희는 소비자에게 쿠바산 커피를 프리미엄 고급제품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크리스탈마운틴 같은 가장 양질의 제품을 수입하고 싶습니다.”

“좋은 선택이십니다. 그럼 내일 바로 산지 농장으로 가보시겠습니까? 한국 격언에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손님이 온다고 벼락치기 공부를 한 모양이었다.

대찬은 그의 성의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그러시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게 다 성공적인 거래를 위한 건데요.”

쿠바엑스포트사 측과 만남을 마친 필래 일행은 호텔로 돌아왔다.

권혁우 대리가 다시 대찬을 유혹했다.

“조 대리님, 지금이야말로 술 한잔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대찬은 역시나 단호하게 사양했다.

그럼에도 권혁우 대리는 끈질겼다.

“어차피 내일 농장으로 가려면 6시간 이상 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아예 진탕 취하는 게 편할지도 모릅니다.”

“가는 동안에는 보고서들을 검토해야 합니다. 여기 김산호 주임이랑 같이 드시죠. 두 분 다 차 안에서 쉬시면 되니까.”

“…아닙니다. 됐습니다.”

“김 주임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습니다. 왜 꼭 저랑 드시려고 하십니까?”

권혁우 대리에게도 나름의 논리는 있었다.

“김산호 주임에게 못할 짓이지요. 상사 없이 혼자 술판을 벌이면 조 대리님이 또 얼마나 구박하시겠습니까?”

“저는 그 정도로 악덕보스는 아닙니다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찬이 거푸 권하는데도 권혁우는 말을 듣지 않았다.

같은 방을 쓰는 김산호는 이 말을 전해 듣고 퍽 섭섭해했다.

“권 대리님은 제가 싫은 걸까요……? 아니면 급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술 좋아하는 사람이 대작하는 사람 가리는 거 봤어?”

“그럼 대리님한테 알랑방귀 뀌려고 그러는 걸까요?”

“그런 1차원적인 이유는 아닐 거 같은데.”

대찬은 권혁우 대리의 꿍꿍이가 궁금했다.

대찬이 거듭 의심을 하니 김산호도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하긴 이상하긴 하네요. 생각해보니 컬처인더스트리에서 수행원을 굳이 파견할 이유도 없네요.”

“차라리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현지 무역관 측의 도움을 받는 게 여러모로 훨씬 좋지.”

“맞아요. 그쪽이 더 현지 사정에 밝고 전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권 대리는 통역 말고는 도움 될 게 없어.”

“회사에서 대리 통역 붙여주자고 굳이 콜롬비아에서부터 인력을 차출할 이유가 없어요. 비합리적이에요.”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대찬은 이제 제법 쿵짝을 맞출 줄 아는 김산호를 미덥게 바라봤다.

다음 날, 대찬 일행과 쿠바엑스포트사의 직원들은 쿠바 중부지방의 커피농장으로 향했다.

쿠바엑스포트사의 직원은 차 안에서도 대찬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쿠바의 모든 작물은 유기농입니다. 커피도 예외가 아니죠.”

“예, 그 부분은 숙지했습니다. 한국의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점입니다.”

“또 쿠바의 커피는 자본주의에 입각해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건 영혼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정 단위의 작은 농가들이 정성껏 가꾸죠.”

누가 세계 최후의 공산주의국가 아니랄까봐.

쿠바엑스포트의 직원은 은근히 자본주의를 비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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