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49화
기어코 운전대를 잡은 김산하가 강릉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이정표를 보자 대찬에게 물었다.
“강릉에도 필래마트 있나?”
“그럼, 당연히 있지. 인수할 때 17개 지점에서 지금은 29개로 늘어났고, 강원도에 세 곳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강릉점이야.”
“필래마트 직원 아니랄까봐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술술 말하네.”
“그냥 그렇다구.”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럼 한번 가볼래?”
“연초 휴일부터 회사 분위기 팍팍 느끼라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회사에서 네가 이것저것 많이 했으니까 네 흔적 좀 구경할까 하고.”
“그러고 싶다면야 말리진 않을게.”
대찬의 허락을 받은 김산하는 운전대를 필래마트 강릉점 쪽으로 틀었다.
김산하는 대찬이 궁금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싶었다.
김산하는 대찬을 속속들이 알았지만 회사에서의 모습을 알지는 못했다.
입사한 지 고작 2년.
남들은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 때 별 걸 다 해내는 대찬이 김산하는 신기했다.
하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굳이 연초에 강릉엘 들러 마트를 구경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김산하는 필래마트 강릉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대찬의 팔에 꼭 매달린 채로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단정한 옷차림의 직원들이 명랑한 목소리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필래마트입니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대찬과 김산하는 깜짝 놀랐다.
김산하가 대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야, 지금 너 왔다고 이러는 거야?”
“그럴 리가……. 내가 누군 줄 알고 특별대우를 하겠어.”
그들의 뒤를 이어 들어오는 손님들을 향해서도 우렁차게 환영하는 걸 보니 대찬에게 특별대우를 하는 건 아니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저렇게 반긴다고? 서비스정신이 비정상적으로 투철한데…….”
“내가 봐도 좀 이상하긴 해.”
대찬의 말에 김산하도 동감했다.
대찬은 입구에 서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기…….”
“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렇게 대답하는 말투도 지나치게 명랑했다.
대찬의 의구심이 더 깊어져 갔다.
그는 직원에게 명함을 건넸다.
“본사 전략기획실 조대찬 대리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강릉점에 오늘 무슨 행사라도 있나요?”
대찬의 질문에 직원은 도리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리님도 회장님 수행하러 오신 거 아니셨어요?”
“네?”
“그러기엔 복장이 너무 프리하시긴 한데…….”
대찬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회장님이 여기 계십니까?”
“아, 모르셨어요? 예, 지금 여기 와계세요.”
대찬은 그제야 왜 직원들이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어째서 연초부터…….”
“회장님은 꼭 새해 첫날 강릉 들르시거든요. 계열사 강릉지점에 들르신다고 하더라고요. 작년에는 소주공장이었고, 올해는 여기예요.”
“…그렇습니까?”
“네! 새해 첫날 방문하는 계열사가 그 해의 그룹차원 주력사업을 꿰찬다고 하더라고요.”
직원은 묻지도 않은 말을 미주알고주알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올해의 주력 계열사는 필래마트가 될 거란 뜻이었다.
서원웅에게 더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 터였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대찬은 직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김산하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가려고 했다.
김산하의 눈이 커졌다.
“뭐야, 왜 나가?”
“회장님 눈에 띄어서 별로 좋을 거 없잖아.”
“애인이랑 해돋이 보러 왔다고 해코지야 하겠어? 오히려 휴일에도 현장 돌아본다면서 기특하게 여기실 텐데. 게다가 회장님이 내 얼굴 모르시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찝찝해.”
그렇게 마트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조 대리 아닌가?”
서청수 회장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대찬은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웃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어, 자네도. 그런데 여긴 웬일이야?”
서청수 회장은 대찬에게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해돋이 보려고 왔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그의 등 뒤에는 무수한 수행원들이 있었다.
수행원 중에는 대찬도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비서실장과 김태준 사장, 이동수 부사장이 바로 보였다.
바깥에서 아는 얼굴을 보자니 새삼 오금이 저려왔다.
“훌륭하구먼. 근데 산하 양은 왜 같이?”
“아, 네, 그냥…….”
놀러왔습니다.
그렇게 둘러대려다가 대찬은 정정했다.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다시 대답했다.
“애인입니다.”
“…애인?”
대찬의 대답에 서청수 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김태준 사장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네, 애인.”
김산하는 최대한 공손하게 서청수를 향해 인사했다.
서청수는 김산하를 한참 빤히 바라봤다.
우호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배짱 좋은 김산하도 그의 눈빛에 어깨를 움츠렸다.
서청수는 어흠, 헛기침을 했다.
그의 불쾌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그대로 대찬과 김산하를 스쳐 지나갔다.
“쉬다 가게.”
“…예. 살펴 가십시오.”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를 스쳐 지나가면서 김태준 사장이 대찬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대찬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김산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갑자기 왜 찬바람이 쌩쌩 불어? 직원 연애하는 거까지 간섭하는 그런 회사 아니잖아?”
대찬은 서청수와 김태준의 그 싸늘한 태도의 의미를 곧 알게 되었다.
2011년도 시무식이 끝나고, 이동수 부사장이 대찬을 불렀다.
“조 대리, 나랑 점심이나 같이할까?”
“예, 그러시죠.”
이동수 부사장은 대찬을 국밥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말없이 밥술을 몇 번 뜨다가 말했다.
“자네, 그때 강릉에서 말이야.”
“예.”
“애인이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어.”
“…예?”
“어떻게든 둘러댔어야지.”
대찬은 이동수 부사장의 말뜻을 간파하지 못했다.
김산하의 말마따나 필래는 직원 연애하는 것까지 간섭하는 뒤떨어지고 덜떨어진 회사가 아니었다.
“왜 그랬어야 했습니까?”
“자네가 그저 그런 직원이면 연애를 하든, 심지어 매춘부를 사든 회장님이 신경 쓸 이유가 하나도 없었을 거야.”
“그저 그런 직원이 아니라도 회장님이 제 사생활에까지 관심 가지실 이유는 없습니다.”
“왜 없겠나, 회장님은 자네를 조카사위로 생각하고 있는데.”
“조카사위요……?”
이동수 부사장의 말에 대찬은 밥맛이 뚝 떨어졌다.
“서청운 필래 컬처인더스트리 사장. 그쪽 딸내미가 자네랑 동갑이야. 줄리아드 음대 나오고 참해. 내심 그쪽이랑 엮어줄 생각을 하고 계셨던 참이라고.”
서청운 필래컬처 사장은 서청수, 서청규의 동생이면서 서청수의 측근이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당연히 몰랐겠지. 회장님 깊으신 뜻을 자네가 짐작이나 했겠어.”
“하지만 저는 집안배경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고 내세울 거 하나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을 갖고 계셨는지…….”
대찬의 말에 이동수 부사장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자네, 김태준 사장님이 회장님 인척인 건 알아?”
“예? 전혀 몰랐습니다.”
“회장님 5촌 조카랑 사장님 따님이랑 결혼을 했어. 그러니까 김태준 사장님 따님이 회장님의 당질부가 된다, 이 말이야.”
“5촌 조카요……?”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회장님이 아끼는 조카님이야. 필래제지 사장으로 키울 생각을 갖고 계시니.”
“…그렇군요.”
대찬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은 우리 회사가 집안사업이라는 마인드가 확고하신 분이야. 아무리 아끼는 사람이라도 혼맥이 안 닿아있으면 의심부터 한다고.”
이동수 부사장의 말을 들을수록 한숨이 나왔다.
그럼에도 대찬은 내색하지 않았다.
“저를 집안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실 정도로 아껴주시니 감사한 마음이야 말로 다 못합니다만.”
“못합니다, 만?”
“회사 밖의 일까지 회장님께서 간섭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이동수 부사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네, 호의를 물리치면 악의로 돌아오는 법이야.”
“받는 쪽 형편도 생각하지 않는 호의가 어떻게 호의겠습니까.”
“연애는 연애일 뿐이잖나. 적당히 즐기다 헤어지고 결혼은 이쪽이랑 해. 그러면 간단할 것을.”
대찬은 모욕감을 느꼈다.
“부사장님, 외람되지만 제 사생활에 대해 누구한테도 간섭받고 싶지 않습니다.”
“뭐야? 나는 기껏 자네 생각해서 귀띔해줬더니 본새가 왜 그러나? 요즘 좀 잘나간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이동수 부사장의 목소리도 커졌다.
“곡해하지 마십시오.”
“어허, 이 사람 정말……!”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제 형편을 생각해주십시오.”
대찬은 일어나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이동수 부사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허, 건방진 자식……!”
이동수 부사장은 쪼르르 김태준 사장에게 달려가 일러바쳤다.
김태준 사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녀석이 그러더란 말이지.”
“예, 아주 건방이 하늘을 찌릅니다!”
“허, 고놈.”
김태준 사장은 피식 웃었다.
“너무 오냐오냐 해주지 마십시오. 버릇이 더럽게 들었어요.”
“패기야 높게 살 만하네.”
“패기와 오만은 다릅니다, 사장님.”
“그 녀석 비빌 언덕이 회장님 하나뿐인데 거기에 대고 고개를 불쑥 쳐들었어. 위세에 기대지 않은 기운은 오만이 아니라 패기예요.”
“저는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요.”
“그건 부사장이 패기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그, 그렇습니까…….”
갑자기 공격을 받은 이동수 부사장은 찔끔했다.
“하지만 녀석의 태도가 문제가 있기는 하군. 너무 억세면 곤란하지.”
“역시 그렇죠?”
“쩝, 고놈을 불러다 야단치자니 이유도 궁색하고… 알았습니다. 나가보세요.”
“네, 사장님.”
이동수 부사장은 김태준 사장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런 사람이 있다.
2인자까지는 어찌저찌 올라가는데 죽어도 1인자는 못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결여된 것은 절제.
꼭 한 발짝 더 나가려다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이동수 부사장이 그런 사람이었다.
대찬에게 서청수 회장이나 김태준 사장의 불편한 감정을 전한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가려운 곳을 잘 긁었다며 높으신 분들이 기특히 여길 만했다.
하지만 이동수 부사장은 불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매입부 박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 이번에 쿠바산 원두 수입하는 건 있죠?”
“네, 저희 부서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단호한 투로 지시했다.
“그 업무 조 대리한테 위임해요.”
“…예? 조 대리요? 어느 조 대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설명 없이 그냥 조 대리라면 우리 회사에 딱 한 명뿐이지.”
“전략기획실 조대찬 대리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이건 전략기획실에서 처리하기엔 업무 성격이…….”
이동수 부사장은 퉁명스레 말했다.
“잔말이 많아.”
“아, 예, 알겠습니다.”
이동수 부사장의 오버액션은 즉시 대찬에게 전달됐다.
임원회의에 다녀온 서원웅이 난감한 얼굴로 그 사실을 전했다.
대찬은 어안이 벙벙했다.
“네? 쿠바요……?”
“응, 커피원두 수입 건을 전략기획실로 이관한대. 조 대리를 콕 집어서 담당자로 하라고 하시더라. 내일모레 쿠바로 출국하래.”
“허…….”
대찬도 매입부에서 주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에게 넘겨버린 건 숨은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동수 부사장은 대찬이 그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길 바랄 것이었다.
그 숨은 의도란, 김산하였다.
대찬은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