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48화
그들은 고급호텔에서의 연찬회 대신 후미진 골목의 고깃집에서 총회를 대신했다.
와인 대신 맥주로 잔을 부딪쳤다.
이에 와닿는 시린 한기에 기분이 좋았다.
대찬은 시원한 맥주를 대번에 들이켜고 잔을 탁 내려놨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했다.
저마다 크으, 가슴에서 올라오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근데 다들 어쩌시려고 대책 없이 저를 따라오셨어요?”
그 물음에 에피니키온 대학생 회장이 말했다.
“대책이 왜 없습니까?”
“무슨 대책이 있는데?”
“저희는 오늘부로 저희만의 동아리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대찬은 씩 웃었다.
“패기 있네.”
“선배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저희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 뭔데?”
“새로운 동아리 이름 지어주세요. 에피니키온, 그 엿같은 그리스어 말고요.”
적나라한 혹평에 좌중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찬도 따라 웃었다.
“그래, 지어줄게.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한긍윤 선배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야.”
“에?”
“로튼 프룻츠(Rotten fruits).”
썩은 과일들.
대찬의 작명에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좋다고 웃었다.
로튼 프룻츠.
그들은 한긍윤의 비난을 정면으로 모욕하면서 새롭게 출발했다.
이날, 이들은 맥주며 소주며 막걸리며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고 모두 뻗어버렸다.
대찬은 가게에 전세를 낸 듯 멋대로 뻗은 사람들을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랑스러웠다.
필래그룹의 자회사인 웜샤인은 로튼 프룻츠가 출범하자마자 모든 사업을 그쪽으로 이관했다.
대학생이 없는 대학동아리는 더 이상 생명력이 없었다.
에피니키온은 그렇게 한순간에 30여 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전히 사회유력가들로 이뤄진 에피니키온이었지만, 이제는 일개 친목단체로 전락했을 따름이었다.
로튼 프룻츠의 사람들은 그런 에피니키온을 두고 불임단체라며 조롱했다.
로튼 프룻츠는 만장일치로 대찬을 총동문회장에 추대했다.
대찬은 부담스러웠지만 명예총동문회장으로 추대된 서청수의 강압적인 명령에 그 뜻을 받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튼 프룻츠 사람들의 반박할 수 없는 논리가 있었다.
“썩은 과일 그 자체이신 분이 회장을 안 하면 누가 회장 합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니 별수 없었다.
졸지에 로튼 프룻츠 총동문회장이 되었다.
AKD테크, 아니 KD테크와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안두홍을 공공의 적으로 둔 덕에 정서적으로도 충분히 교감이 이뤄졌고,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니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은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될 2012년 이후 시장을 선점하기로 결정하고,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대찬은 이를 위해 중장기전략을 마련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2010년의 남은 달들은 산적한 업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다.
16강에 진출한 남아공월드컵도 보는 둥 마는 둥 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교수들은 장두노미(藏頭露尾)를 선택했다.
머리는 감췄지만 꼬리는 그러지 못했다는 뜻.
한자와 친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고리타분한 네 글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대찬에게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안두홍이 머리를 잘 숨기고 뒷구멍으로 곳간에 차곡차곡 돈을 잘 쌓고 있던 터다.
그런데 대뜸 대찬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으니, 대찬에게 2010년은 그야말로 장두노미의 해였다.
감방의 이슬 고이는 찬 바닥에 몸을 누인 안두홍에게도 장두노미의 해일 터다.
맡은 업무에 정신이 없었지만 회사물 좀 먹었다고 대찬은 망중한의 여유를 가졌다.
직접 붓펜으로 감사한 이들에게 연하장을 작성했다.
필래의 서청수 회장, 김태준 사장, 이동수 부사장, 한태윤 과장, 서원웅에게 연하장을 보냈다.
그러고도 그의 붓펜은 멈추지 않았다.
마강국, 허운, 유채경, 김산호, 오다혜, 홍은주.
ONB의 최재한.
수영실업의 오광훈 사장, 오찬식 팀장, 그리고 근로자 진위생.
미네소타에서 인연을 맺은 여승범, 그리고 소식이 닿을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마이크 햇치 주지사와 그의 비서인 유진 깁슨.
에피니키온, 아니 이제 로튼 프룻츠의 민승기와 후배들.
만몽철학원의 만몽거사와 왕말숙 여사.
한마음양파영농조합의 도진애 조합장, 그리고 조합원인 노인들과 한마음학교의 아이들.
가족들, 그리고 가족들이 자신의 가족이 되기를 바라는 김산하.
그들에게도 대찬의 친필 연하장이 날아갔다.
겨울다운 찬바람이 부는 날, 김산하는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연하장 잘 받았다? 친필로 아주 정성이던데.”
“보답 없어?”
“보답은 무슨. 야, 연말인데 어디 여행이나 갈까?”
“여행? 해외로?”
대찬의 물음에 김산하는 손사래를 쳤다.
“피차 바쁜 입장에 해외는 무슨. 죽변항에 곰치국 맛있게 하는 집 있어. 먹고 오자.”
“그거 한 그릇 먹으러 죽변까지 가자고?”
김산하는 눈을 흘겼다.
“왜, 싫어?”
“아니, 뭐 싫은 건 아닌데…….”
“곰치국은 그냥 명분이고,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래. 해돋이도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하긴. 간절곶이나 정동진은 사람에 치이니까. 차라리 죽변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참에 차나 한 대 뽑아라. 자차도 없어, 쪼잔하게.”
“놀러가라고 차까지 뽑으라는 건 너무 가혹한 거 아냐?”
“그러니까 ‘이참에’라고 하잖아, ‘이참에’.”
투정 부리듯 하는 김산하의 말에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알았어. 알아볼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도 너그럽게 받아주는 대찬에게 김산하는 눈을 한번 흘기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나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말해봐.”
“그 연하장,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보냈어?”
김산하의 물음에 대찬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선 솔직함은 멍청함과 동의어였다.
“응, 회장님부터 저기 양파농장 하시는 분들한테까지 다 보냈는데?”
“…….”
“왜, 뭐 문제 있어?”
김산하는 잔뜩 토라진 얼굴로 쏘았다.
“그냥 가지 말자, 여행.”
“뭐야, 결론이 왜 그래?”
“아, 가지 말자고, 그냥!”
그 후, 대찬은 김산하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김산하는 못 이기는 척 대찬의 뜻을 들어주었다.
“네가 정 그렇게 나랑 가고 싶으면 가줄게!”
“…그래. 눈물 나게 고맙네.”
대찬더러 차를 사라고 박박 우기던 김산하는 정작 여행 당일에는 제 자동차를 내줬다.
“기름 만땅으로 채워왔으니까 운전은 네가 해라?”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2010년 12월 31일.
종무식을 마친 대찬은 부서 송년회를 제치고 김산하와 만났다.
서원웅이 부실장으로 있었으니 압박이나 강제는 없었다.
다만, 형편이 그렇지 못한 김산하가 걱정되었다.
“회사에서 뭐라고 안 해?”
“그게 외국계 기업의 가장 큰 장점이지. 퇴근시간 지나면 노터치.”
“누나 직속상사는 한국 사람이잖아?”
“우리 부서장이 핀란드 사람이야. 이런 쪽엔 칼 같거든.”
대찬과 김산하는 저녁으로 수제비를 훌훌 먹고 차에 올랐다.
강원도 쪽으로 나가는 길이 평소보다 막혔다.
새해 일출을 보려는 차들이었다.
대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차라리 좀 쉬다가 새벽에 출발할걸 그랬어. 이래서는 시간 다 버리겠는데.”
“싫어?”
김산하의 말에 대찬은 당연한 걸 묻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차 막히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나도 싫어.”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거봐.”
“그런데 좋은 점 하나는 있지.”
대찬은 김산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뭔데?”
김산하는 대찬을 빤히 보면서 웃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대찬은 눈을 크게 떴다.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릴 때까지 둘의 입술은 붙어있었다.
김산하는 입술을 떼며 씩 웃었다.
“운전 중 안전한 키스가 가능하다는 거.”
“뭐, 뭐야, 그게…….”
대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볼 것 못 볼 것, 할 것 못 할 것 다 치른 사이였지만 어쩐지 부끄러웠다.
김산하는 빙긋 웃으면서 카시트를 뒤로 눕혔다.
“나 눈 좀 붙일게. 피곤해지면 말해. 교대해줄 테니까.”
대찬은 금세 죽은 듯이 잠든 그녀를 보고 툴툴거렸다.
“남의 마음 벌렁거리게 해놓고 잠 한번 얄밉게 잘 자네.”
7번 국도를 타고 죽변에 도착할 때까지 김산하는 깨지 않았다.
새해를 맞는 자정 너머의 죽변은 한적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정동진이나 간절곶과는 달랐다.
대찬은 해변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외투를 벗어 김산하를 덮어줬다.
대찬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건, 저 동해바다 수평선 위로 2011년의 첫 태양이 고개를 내밀 때였다.
대찬은 부스스 일어나 여전히 깊은 잠에 빠진 김산하를 깨웠다.
그는 눈을 뜨고 다급하게 물었다.
“아직 다 안 떴지?”
“아직.”
그러자 김산하는 부랴부랴 핸드백에서 구강청결제를 꺼냈다.
대찬은 그의 행동을 대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김산하는 먼저 구강청결제를 한 모금 머금더니 대찬에게도 내밀었다.
대찬이 엉겁결에 받아들자 얼른 머금으라는 제스처를 했다.
대찬은 영문도 모른 채 하라는 대로 했다.
김산하는 차창을 열고 머금었던 구강청결제를 뱉었다.
구강청결제의 효과에 차가운 겨울공기까지 입안에 더해져 오싹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대찬도 이 역시 따라했다.
그 순간 김산하가 기습적으로 입을 맞춰왔다.
상습적인 행동에 대찬은 처음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응수했다.
대찬의 혓바닥이 김산하의 입술 담장을 껑충 넘어갔다.
김산하의 몸이 움찔 놀랐다.
그 진동이 김산하를 껴안고 있던 대찬에게도 전해졌다.
그들은 해돋이를 보러 와놓고는 해돋이를 보지 않았다.
슬슬 호흡이 달려올 즘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
서로를 빤히 바라보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대찬이 김산하에게 물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입술에 달려드는 못된 버릇은 언제 들인 거야?”
“내 버킷리스트였거든.”
“다짜고짜 키스하기?”
“아니, 12월 31일 키스하고, 같은 남자랑 1월 1일 일출 보면서 키스하기.”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암튼 별나.”
“연말에 키스하고 새해에 키스하는 건 이미 엘에이에서 해봤는데, 한 가지가 어긋나서.”
“한 가지 뭐?”
“연말 남자랑 새해 남자가 달랐거든. 같은 남자라는 조건이 어긋났어.”
김산하의 말에 대찬은 정색했다.
“뭐? 진짜야?”
“농담.”
“진짜 농담이야?”
대찬의 거듭된 물음에 김산하는 대꾸하지 않고 차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찌뿌듯한 몸을 쭉 펴며 새해의 공기를 입으로 코로 마셨다.
“아! 상쾌하다.”
“농담이냐고!”
대찬이 부랴부랴 따라 나오자, 김산하가 대찬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농담이라니까.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너 나 좋아하니?”
“좋아한다. 어쩔래?”
“어……?”
대찬의 외침에 김산하의 눈이 잠깐 커졌다.
김산하는 그대로 대찬의 품에 폭 안겼다.
대찬도 김산하를 끌어안았다.
둘은 조각처럼 한참을 그 자세 그대로 서있었다.
올해는 꼭 취업하자, 각오를 다지러 혼자 일출을 보러온 백수와 기러기아빠 생활을 청산하고 싱글로 돌아온 아저씨의 눈에는 꼴불견인 풍경이었다.
대찬은 김산하에게서 살짝 몸을 떼며 말했다.
“배고프다. 곰치국 먹으러 가자.”
“밤새 운전하느라 피곤할 텐데 곰치국에 소주 한잔하고 좀 쉬어. 운전은 내가 할 테니까.”
대찬은 김산하의 호의가 고마웠지만 사양했다.
“혼자 마시면 재미없어. 서울 올라가서 마시지, 뭐.”
“암튼 운전은 내가 할 거야.”
둘은 죽변에서 곰치국을 먹고 7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쭉 올라갔다.
바로 돌아오기는 아쉬우니 강릉까지 올라갔다.
바다 보며 커피 한잔하고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