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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44화 (143/556)

난 할 수 있어 144화

저녁 8시 20분.

아직 식전이라 집 앞 단골식당에서 모처럼 여유 있는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대찬은 그 계획을 접는 수밖에 없었다.

“문자로 장소 보내주시면 찾아가겠습니다.”

“예. 그럼…….”

박광규 과장은 전화를 끊고 대찬을 한 일식집으로 초대했다.

제법 가격대가 있는 고급식당이었다.

대찬이 도착했을 때는 먹음직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박광규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대찬을 맞았다.

“퇴근하고 얼마 안 되는 자유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만한 용건이 있으신 거겠죠.”

박광규 과장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술 한 잔 따르겠습니다.”

“그러시죠. 급할 거 없으니.”

둘은 술로 목을 축이고 회를 한 점씩 집어먹었다.

회를 오물거리면서도 박광규 과장은 대찬의 얼굴을 슬금슬금 살폈다.

대찬은 그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리 법인카드라지만 일개 과장급이 미팅할 상대에게는 과분한 고급식당이었다.

박광규 과장은 그런 곳에서 술을 마시면서도 대찬의 눈치를 살폈다.

그걸 본 대찬은 박광규 과장이 자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려 한다는 걸 인지했다.

박광규 과장이 먼저 용건을 꺼낼 때까지 술과 회만 축냈다.

“저…….”

박광규 과장이 입술을 열자 대찬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말씀하십시오.”

“그 건 있지 않습니까.”

“그 건……?”

“ADH 건이요.”

대찬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네.”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그걸 과장님께 설명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첫 번째 삶, 두 번째 삶 어쩌고저쩌고 곧이곧대로 설명해봤자 박광규 과장은 실소만 지을 것이다.

박광규 과장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아쉬운 소리를 했다.

“그럴 의무가 없으신데도 부탁을 드리려고 굳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 아니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 정보를 조 대리님만 알고 계신지, 아니면 다른 분들도 알고 계신지, 그것만이라도 답변해주시죠.”

대찬은 대답 대신 술을 마셨다.

박광규 과장에게 정보를 내주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대찬의 침묵에도 박광규 과장이 희망을 버리지 않자 말로써 분명하게 밝혔다.

“그것도 알려드릴 마음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박광규 과장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자기 서류가방을 열었다.

대찬은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박광규 과장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놨다.

그는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일단 이거 받으시죠.”

“뭡니까, 이게?”

“저희 성의입니다.”

두둑한 돈 봉투였다.

정직한 뇌물이었다.

5만 원권으로 꽉 들어찬 걸 보니 어림잡아도 일개 월급쟁이 입장에선 침이 넘어갈 만한 액수였다.

대찬은 두툼한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박광규 과장은 대찬을 흘끗 보며 말했다.

“받아주시죠.”

“이걸 왜 제가 받습니까?”

“아시잖습니까. 만약 조 대리님 단독으로 알고 계신 일이라면…….”

입을 다물어달라는 뜻이었다.

이 돈을 받으면 대찬도 더 이상 떳떳할 수 없었다.

확실히 함구하는 대가로 저 정도 금액이면 귀가 솔깃할 만했다.

하지만 대찬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제 목표는 확실합니다. 귀사가 저희 쪽과 계약을 체결해주시는 겁니다.”

“그건 사업성을 좀 더 따져봐야 합니다.”

“그럼 저도 어쩔 수 없죠. 손에 쥔 무기를 활용하는 수밖에.”

“왜 이러십니까, 정말.”

“박 과장님이야말로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박광규 과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조 대리님, 사람은 뭐든 분수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지금 조 대리님은 핵폭탄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핵폭탄급이겠죠, 귀사로서는.”

“일개 대리에게 수류탄이면 족합니다. 이 건은 단순히 본인의 업무를 위해 쓰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무기란 말입니다.”

그 말에 대찬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 말씀은, 꼭 죄도 없는 귀사를 제가 괴롭히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솔직히 조 대리님이 관계할 부분은 아니잖습니까.”

“저한테 이러실 게 아니라 안두홍 부회장님께 가서 간언을 드리세요. 지금이라도 그 더러운 꿍꿍이를 관두라고요.”

“대리님도 알잖습니까, 일개 과장이 할 일이 아니라는 거. 쉽게 갑시다. 그냥 이 돈 받아요. 그리고 이 건은 포기해주세요. 서로 좋은 겁니다. 이 계약 따내서 얻는 이득보다 더 큰 이득을 저희 측에서 보장하겠습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받을 생각 조금도 없으니까 관두시죠.”

“하, 정말 답답하시네.”

“저도 박 과장님이 답답합니다. 그냥 저희랑 계약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귀사로서도 필래 정도의 기업과 제휴하는 게 손해되는 일도 아니잖습니까.”

“만일 저희가 거절하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찬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

“ADH디벨롭먼트의 일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죠.”

“…필래그룹 본사까지 끌어들일 생각이십니까?”

박광규의 질문에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본사까지 끌어들일 것이냐는 물음은 서청수 회장을 끌어들일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여기서 가타부타 대답하는 건 박광규 과장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었다.

끌어들일 생각이라고 대답하면 서청수 회장이 아직 이 정보를 모르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몰라요, 그건.”

“하, 정말이지…….”

철옹성 같은 대찬에 박광규 과장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계약을 관철해주십시오. 그럼 더 걱정하실 것도 없습니다. 이 이상 드릴 말씀 없습니다.”

로봇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대찬에 박광규 과장은 항복했다.

“후, 그럼 그냥 필래랑 계약만 성사시키면 되겠습니까?”

“특약을 넣어주세요.”

“특약이라니…….”

“귀사가 계약사항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거나, 중도에 변경 혹은 해지하려고 한다면 저희가 징벌적 배상에 준하는 배상금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말에 박광규 과장이 펄쩍 뛰었다.

“그게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고요. 귀사가 저희와의 계약을 내켜하시지 않으니 저희도 이것만큼은 관철해야겠습니다.”

“이건 불공평한 계약입니다!”

“왜 불공평합니까? 저희는 귀사, 아니 안두홍 부회장님의 구린 속사정을 알고도 묵과하겠다는 특약사항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부회장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대찬은 외투를 챙겨 일어났다.

“저는 제 의사를 모두 밝혔습니다. 이제 결정은 안두홍 부회장님의 몫입니다.”

“…….”

대찬은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한 발을 밖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박광규 과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책임 역시, 온전히 안두홍 부회장님의 몫입니다.”

드르륵, 탁.

미닫이문이 닫혔다.

“하, 씨발…….”

박광규 과장은 한동안 혼자 술을 마셨다.

좋은 술을 마시고 좋은 회를 먹어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흘 뒤.

필래마트와 AKD테크는 속전속결로 계약을 체결했다.

제안을 받은 AKD테크 측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왔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필래마트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응했다.

김태준 사장은 오전, 오후로 바쁘게 날아오는 회신에 어리둥절했다.

김태준 사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동수 부사장에게 말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단 말이에요.”

“뭐가 이상하십니까?”

김태준 사장은 픽 웃었다.

“일사천리로 계약을 체결하자는 게 정말 아쉬워서 매달리는 느낌이 아니거든.”

“그럼……?”

“한여름에 푹 썩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 같단 말이지. 얼른 치워버리고 싶어 한단 말이야.”

“우리로서는 빨리 처리만 되면 괜찮은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알 바 아니긴 하죠, 그건.”

“재앙에 가까운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특약조항은 정말 의외입니다. 왜 스스로 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지 이해되지 않는군요.”

“나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동수 부사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새 저희 회장님하고 그쪽 안두홍 부회장하고 화해주라도 나눈 걸까요?”

“그럴 리도 없거니와 화해주가 아니라 사돈을 맺어도 이렇게는 안 해주겠네.”

“저희야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필래마트 측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AKD테크의 기행에 가까운 호의는 서청수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가 느끼는 황당함이란 김태준 사장보다 더했다.

둘의 악연은 여태 청산되지 못했다.

그래서 김태준 사장이 AKD테크와 제휴하겠다는 보고를 올려도 내심 실현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실현은 물론이요, 저쪽에서 오히려 몸이 잔뜩 달아있으니 AKD테크의 기술이란 게 사기 혹은 허영에 가까운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특약조항 때문에 그 가설마저도 부정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곧바로 일의 책임자인 부실장 서원웅과, 혼자 실무를 도맡은 대찬을 자신의 사무실로 소환했다.

서청수 회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야? 안두홍이 섹스비디오라도 입수했어?”

적나라한 질문에 서원웅은 얼굴을 붉혔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뭐냐고, 대체.”

“조대찬 대리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조 대리가 알 겁니다.”

서원웅의 말에 서청수 회장의 시선이 대찬에게로 향했다.

대찬은 겸연쩍은 웃음만 지었다.

“그저 서로의 의향이 일치했을 뿐입니다.”

“누굴 바보로 알아? 저쪽에서 오줌 질질 흘리면서 우리 하잔 대로 하는 꼬락서니가 약점 잡히지 않고서야 가당한 일이냐고.”

“일이 잘되었으니 칭찬만 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찬은 부드러운 말투로 눙쳤다.

서청수 회장은 픽 웃었다.

“영업비밀은 공개하지 않겠단 뜻이군.”

“별로 내세울 만한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조만간 말씀 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굳이 이 시점에서 서청수 회장과 그 정보를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은 오월동주였다.

파트너십이 순항하려면 말하지 않는 쪽이 좋았다.

서청수 회장의 사감이 사업을 그르치면 곤란했다.

서청수 회장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알았네. 일 잘하면 장땡이지. 수고 많았네. 필래페이는 필래마트뿐만 아니라 우리 그룹 전체에 적용시키도록 하겠네.”

“높게 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기저기서 자네 진급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둥 말이 나오지만, 이래서야 승진을 안 시킬 도리가 없잖나. 난감하군.”

“이건 저를 믿고 사업을 진행시켜주신 서원웅 부실장님과 김태준 사장님, 그리고 회장님의 공입니다.”

“어줍지 않은 겸손일랑 집어치우게. 재수 없으니까.”

대찬은 고개를 푹 숙였다.

둘은 서청수 회장 앞에서 물러났다.

서원웅은 대찬과 나란히 걸어오다가 뚝 걸음을 멈췄다.

대찬은 그를 흘끗 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진짜 어떻게 한 거야?”

“그런 게 있습니다, 부실장님.”

대찬은 싱겁게 대꾸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원웅이 황급히 대찬의 뒤를 따랐다.

“나한테도 말 못할 일이야? 불법적인 건 아니지?”

“그런 쪽으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서원웅은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너 존댓말 쓰고 나서부터 되게 사무적으로 느껴지는 거 알아? 둘이 있을 땐 제발 편하게 해줘라.”

그러자 대찬은 피식 웃었다.

“알았어. 그런데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알게 될 거야, 조만간.”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네.”

둘은 마주보며 싱겁게 웃었다.

결국 필래마트는 AKD테크와의 계약에 성공했다.

매우 훌륭한 조건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이를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이 계약은 필래마트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에 큰 이득이 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기술이 상용화에 성공할 경우, 필래마트를 필두로 한 그룹 전 계열사에 활용을 적극 장려하고 대중적인 결제시스템으로 자리매김 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가 그렇게 유난을 떠는 건 단순히 계약이 잘된 까닭만은 아니었다.

AKD테크에게 굴욕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을 따낸 걸 광고하면서, 안두홍이 서청수에게 무릎 꿇었다는 걸 광고하고 싶은 유아적인 동기도 있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이 일이 회사 내에서, 또 에피니키온 내에서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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