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143화 (142/556)

난 할 수 있어 143화

대찬은 AKD테크 측에 사업제안서를 보냈다.

AKD테크 쪽에서는 며칠간 묵묵부답이었다.

시간을 끌 대로 끈 연후에 회신을 보내왔다.

아무래도 필래 쪽의 애간장을 녹이려는 전략이었을 거다.

‘치졸하기는.’

AKD테크 측은 우선 미팅을 해보자고 했다.

대찬이 필래페이라고 명명한 간편결제서비스는 첨단기술의 영역이었다.

첫 번째 삶도 문과, 두 번째도 문과인 대찬이 다루기에는 벅찼다.

미팅이 시작되면 갖은 공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AKD테크의 공세가 빗발칠 터다.

이를 우려한 회사 측에서도 인력을 붙여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찬은 혈혈단신으로 AKD테크 사옥으로 향했다.

서원웅은 우려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어차피 탐색전이니까요. 우리 쪽에서 우르르 몰고 가면 저쪽도 필요 이상의 경계를 하지 않겠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지 연락해.”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대찬은 그렇게 서류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원웅의 시선은 불안했다.

허운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로 주춤주춤 서원웅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잘되려나요?”

“…잘되길 바라야지. 쟨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일까?”

“조대찬이 저러는 덴 다 이유가 있겠죠. 무대뽀처럼 보여도 계획은 착실하게 세우는 친구잖아요.”

허운의 말에 한 과장이 눈총을 쐈다.

“허운 씨, 조 대리한테 말 높이라고 했죠.”

“아앗, 네……. 죄송합니다.”

허운은 목을 움츠렸다.

대찬은 혈혈단신으로 AKD테크를 찾아갔다.

그쪽 직원들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들도 대찬이 혼자서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탁자 위에 준비된 다과가 거래처 직원 1명을 위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양이 많았다.

대찬을 회의실로 안내한 직원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저… 혼자 오신 건가요?”

“예. 일단 귀사의 의향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사람 대동하지 않고 저 혼자서만 왔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담당자분 오실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예, 그러죠.”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한 무리의 AKD테크 직원들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직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넸다.

“AKD테크 대외협력팀 박광규 과장입니다.”

“필래마트 전략기획실 조대찬 대리입니다.”

대찬은 지금 마주하고 있는 박광규 과장을 아주 잘 알았다.

첫 번째 삶에서 대찬을 손 위의 구슬처럼 갖고 놀았던 박 과장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박광규 과장이 거느린 얼굴들 역시 그와 비슷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에게 시달린 세월을 생각하면 아직도 뼈아팠다.

그들을 보자마자 이가 갈렸지만 사심은 꾹 억눌렀다.

박광규 과장은 커피를 홀짝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간편결제시스템 개발을 저희한테 의뢰하시겠다고요.”

“예. AKD테크에도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회사들 중에서 저희를 선택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AKD테크가 해당 기술을 2년 안에 상용화가 가능할 정도로 개발이 상당히 진척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박광규 과장의 낯빛이 굳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죠?”

기술개발 관련 사항은 극비였다.

그런데 필래에서 정확한 시점을 태연하게 짚고 있었다.

박광규의 당혹감은 당연했다.

“그렇게 되물으시는 거 보니 맞는 모양이군요.”

“…어떻게 알고 계시냐고 여쭸습니다만.”

“부정한 방법은 아니니 의심은 말아주십시오. 기술이 가장 좋은 회사와 컨택하는 게 저희로서는 옳은 선택이죠.”

박광규 과장은 낯빛을 서둘러 단속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잖습니까.”

“문제라뇨?”

“저희와 필래는 속 편히 파트너십을 맺을 만한 관계가 아니잖습니까.”

안두홍과 서청수의 오랜 반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대찬은 부러 모르는 체했다.

“뭘 말씀이십니까?”

“제 입으로 말씀 올리긴 좀 그렇지만, 저희 부회장님과 필래 회장님 사이에…….”

“그건 알고 있긴 합니다만, 비즈니스에 돈 말고 다른 변수가 존재할 수 있나요?”

박광규 과장은 어흠, 헛기침을 하고 좌우를 물리쳤다.

다른 직원들이 자리를 떴다.

돈 말고 다른 변수가 존재할 수 있다는 무언의 답변이었다.

“저희 팀장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안두홍 부회장님께서 상당히 언짢아하신다고요.”

“저희 제안에 말입니까?”

“예. 점잖은 자리라 말을 그대로 옮길 순 없지만, 귀사의 제안에 매우 부정적이셨습니다.”

“그럼 이 건은 더 추진할 수 없겠군요.”

대찬의 말에 박광규는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아주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네?”

“아무리 옛일이 얽혀 있다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아닙니까.”

“그렇죠.”

“이런저런 변수가 있다지만 결국 돈이 제일 중요하지요, 돈.”

“저희가 상당한 액수를 보장한다면 귀사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박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듣던 대로 두뇌회전이 빠르시군요.”

“아…….”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솔직해서 좋았다.

돈을 더 얹어주면 과거의 원한도 불식시키겠다는 정신이었다.

그 마인드를 높게 쳐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뜻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대찬이 제안하고 밀어붙인 일이었다.

서원웅의 이름을 빌리긴 했지만 일개 대리가 제안한 사업치고는 부피가 컸다.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고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성사될 일이었다.

이미 대찬은 그 사실만으로도 큰 짐을 짊어진 상태였다.

그런 마당에 웃돈을 얹어줄 수는 없다.

웃돈이 필요하다면 윗선에서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게 뻔했다.

안두홍의 요구대로 재주를 부릴 수 없다며 서청수 회장은 길길이 날뛸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대찬에게 향할 터.

그것이야말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꼴이었다.

대찬은 박광규 과장의 달콤한 속삭임을 거절했다.

“예산에 한계가 있어 사업제안서에 명시된 금액 이상을 지불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조 대리님이 그럴 수는 없지요. 사실 이 건은 조 대리님 선에서 추진할 만한 사업이 아닙니다.”

소 잡는 데 닭 잡는 칼을 들이미느냐는 소리였다.

협상 대표를 상급자로 설정하고 웃돈 얹는 일을 논의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대찬은 그럴 의향이 없었다.

대찬이 이 일에서 손을 떼면 일이 잘돼도 공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다.

대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정해진 예산대로 추진하고 싶은데요.”

“모든 일이 조 대리님 마음대로 안 되는 건 아시잖습니까.”

“그 말씀을 귀사에 똑같이 돌려드리고 싶군요.”

퍽 도발적인 말에 박광규 과장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그는 황당했다.

도대체 대찬이 이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까닭을 몰랐다.

기술은 AKD테크가 쥐고 있다.

필래가 아니어도 쉽게 사업파트너를 구할 수 있다.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읍소해도 모자랄 판에 목에 깁스를 한 듯 뻣뻣하게 군다.

황당할 따름이었다.

박광규 과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라고요?”

“박 과장님은 대외협력팀 소속이라고 하셨죠.”

“그런데요?”

“주로 무슨 일을 하시죠?”

뜬금없는 질문에 박광규 과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필래에는 대외협력팀도 없습니까? 그쪽에 물어보시죠.”

“아뇨. 귀사에서는 대외협력팀의 통상적인 업무와는 조금 결이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걸로 알고 있어서요.”

“…네?”

박광규 과장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혹시 ADH디벨롭먼트라는 회사와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걸…….”

박광규 과장은 폐부를 찔린 듯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찬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쪽과의 협력을 박 과장님이 주로 맡고 계신 걸로 아는데, 일을 하시다보면 좀 지저분한 게 손에 묻지요?”

“…그쪽에게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예. 뭐,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십시오.”

박광규 과장이 이렇게 당황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철저한 보안유지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간편결제시스템의 개발 진척과는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비밀스러운 일이었다.

이 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AKD테크 안에서도 극소수였다.

대외협력팀 내부에서도 소수만이 이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타사 직원인 대찬의 입에서 그 극비사항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찬은 박광규 과장을 직시하며 말했다.

“공공기관 대상으로 한 업무를 대개 ADH디벨롭먼트에 하청을 주시죠?”

“…….”

“계속 대답하기 싫으시면 저 혼자 얘기하겠습니다. 귀사가 그렇게 인력이 부족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굳이 그쪽에 하청을 넘긴단 말입니다?”

“…….”

“하청을 넘겨받은 ADH는 고스란히 다른 협력업체한테 하청을 주죠. 아무것도 안 하고 이문을 가져간단 말입니다.”

“…….”

“ADH에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 불필요한 톨게이트를 하나 더 세워서 생돈만 날린단 말입니다.”

“…….”

“옛일을 들먹이면서까지 아등바등 돈푼을 더 뜯어내려는 귀사가 ADH에는 왜 그렇게 아량을 베풀까요? 그것도 공공기관 발 알짜사업들을 다 넘겨줘가면서 말이죠.”

“…당신, 뭐야.”

박광규 과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상일 뿐입니다만, ADH가 꼭 누군가의 이니셜처럼 보이네요. 귀사의 부회장이신…….”

박광규 과장은 대찬이 말을 맺지 못하도록 그의 멱살을 덥석 잡았다.

“그만, 그만해요!”

“귀사의 안두홍 부회장님이요. ADH디벨롭먼트로 흘러간 돈은 아무래도 부회장님의 비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였고, 지금도 쓰이고 있고, 앞으로도 쓰이겠죠.”

대찬은 박광규 과장의 만류에도 끝까지 다 말했다.

박광규 과장의 눈빛이 떨렸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쪽에게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대찬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대찬은 AKD테크의, 정확히 말하면 안두홍의 극비를 알고 있었다.

이것들은 첫 번째 삶에서 백일하에 드러난 사실인 까닭이었다.

두 번째 삶의 지금은 2010년.

안두홍이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비자금을 챙긴 사실이 밝혀지는 건 2016년의 일이었다.

대찬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검찰조사에 의하면 8년간 그런 수작이 이뤄졌다고 했다.

셈을 해보면 2008년부터 그랬다는 뜻.

2010년이라면 제법 과감히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을 때였다.

대찬이 누구나 우려했던 AKD테크와의 제휴에 자신감을 표했던 것도 이런 정보를 쥐고 있는 탓이었다.

혹여나 두 번째 삶으로 넘어오면서 일이 뒤틀렸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박광규 과장의 반응을 보니 그렇진 않은 듯했다.

이제 대찬이 완벽히 안두홍의 상투를 쥐었다.

대찬은 한껏 우위에 서서 윽박지르듯 말했다.

“저는 박 과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불거지면 안두홍 부회장뿐만 아니라 박 과장님도 크게 다친다는 걸 아실 테죠.”

“…….”

“저희는 귀사와 좋은 파트너십을 맺고 싶습니다.”

대찬의 제안 아닌 제안에 박광규 과장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극진한 전관예우를 받는 AKD테크의 법무팀에서 무마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필래는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이었다.

AKD테크 이상의 영향력을 갖춘 법무팀을 보유하고 있었다.

박광규 과장 역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떨어뜨렸다.

“부회장님께 잘 보고하겠습니다.”

“일주일 안에 계약체결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겠죠, 아마?”

대찬은 박광규 과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은 어렵지만 아마도.”

대찬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고 자리를 떴다.

사흘 뒤, 대찬은 AKD테크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박광규 과장의 전화였다.

“조 대리님, AKD 박광귭니다. 따로 좀 뵀으면 하는데요.”

“지금은 퇴근길인데요. 오피스 아워에 따로 연락을 주시죠.”

“회사에 알리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뵙고 싶습니다.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찬은 손목시계를 흘끗 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