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42화
서원웅 역시 놀란 눈으로 대찬에게 물었다.
“어디야, 그게?”
그러자 대찬은 대답 대신 서원웅만 멀뚱히 바라봤다.
그렇게 바라보는 대찬의 눈빛이 어딘지 답답하고 슬퍼 보였다.
서원웅은 난감하게 웃었다.
“…왜 그래?”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의 일을 굵직굵직한 사건 위주로만 기억했다.
그런 대찬이 이렇게 확신에 차서 세부적인 내용을 줄줄 읊을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 기술을 2년 안에 상용화하는 업체가 바로 AKD테크였다.
AKD테크는 두 번째 삶의 에피니키온에서 알게 된 안두홍의 회사였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첫 번째 삶에서도 대찬은 AKD테크를 잘 알았다.
첫 번째 삶에서도 대찬은 필래유통 직원이었다.
대외협력부 입사 10년 차 대리.
그때 AKD테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이 오래가는 법이었다.
당시 AKD테크와의 업무는 괴로웠다.
그렇기에 대찬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AKD테크는 필래유통의 오랜 협력 업체였다.
이는 비즈니스적인 측면보다 개인의 감정적인 측면이 강했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다.
서청수 회장이라는 공공의 적을 둔 서청규 사장과 안두홍은 사업적으로 제휴했다.
첫 번째 삶에서 대찬은 이 간편 결제 서비스를 두고 AKD테크와 협력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말이 좋아 협력이지, 이런 쪽에 별다른 지식이 없는 대찬은 그저 접대만 했다.
당시 AKD테크는 스마트폰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간편 결제 기술을 선제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필래유통은 AKD테크와의 제휴를 통해 이 기술로 필래페이를 구현하려고 했다.
대찬은 원만한 제휴를 위해 접대로써 윤활유 역할을 해내야 했다.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던 그때의 기억.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박 과장님.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삶의 대찬은 굽실거리면서 AKD테크 대외협력실의 박 과장에게 양주를 따라 바쳤다.
“저희 회사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업입니다. 그만큼 AKD에도 적잖은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이런 신뢰의 자본이 쌓이면 훗날 더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조 대리님.”
“네?”
박 과장은 대찬이 따라 준 술을 찰랑찰랑 흔들며 말했다.
“대학 때 뭐 전공하셨다고 했죠?”
“아, 국문학이요.”
“국문과 나와서 어떻게 이 기술이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 압니까?”
“예?”
“그렇잖아요. 내가 용비어천가 모르듯이 조 대리도 이 기술이 어떤 건지 알 턱이 없죠.”
대찬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저도 이 회사 다닌 지 10년쨉니다.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건 알고 있…….”
“에이, 꼭 그렇게 따박따박 각주를 달아야 직성이 풀리세요? 술이나 먹읍시다.”
“아, 예…….”
박 과장은 완벽한 우위에 있는 이 상황을 즐기고자 했고, 대찬은 계속 그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자정 넘게 수발을 들다가 전봇대 앞에 먹은 것을 온통 게워내고 택시로 귀가하기를 여러 날이었다.
대찬은 뼈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다음이 더 가관이었지.’
그렇게 몇 날 며칠 공을 들였지만 결국 이 제휴는 불발되었다.
다른 경쟁사에서 AKD테크에 더 많은 액수를 불렀기 때문이다.
AKD테크 측은 필래유통 측에 제휴가 불발된 까닭 중 하나로 대외협력부의 무성의한 소통을 꼽았다.
그저 구색이나 맞추자고 둘러댄 말이었다.
하지만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으니, 대찬이 꼭 그 개구리 꼴이었다.
“야, 술이나 따라 주고 고분고분 굴라니까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해!”
상사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유백기는 대찬에게 화풀이를 했다.
대찬은 또다시 그 밑에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염불처럼 외며 비굴하게 굴었다.
“어우, 개새끼들.”
기억을 떠올린 두 번째 삶의 대찬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첫 번째 삶을 잠깐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체감되었다.
이런 기억이 있었기에, AKD테크가 지금 필래마트에게 필요한 기술을 2년 안에 상용화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AKD테크가 기술을 갖고 있어도 안 준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두 번째 삶이라고 해서 AKD테크와의 악연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미 대찬은 AKD테크의 실세 부회장인 안두홍에게 한 방 먹인 전례가 있었다.
게다가 필래유통 시절과는 달리 필래마트는 서청수 회장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와 앙숙인 안두홍이 필래마트의 손을 잡을 리 만무했다.
‘그저 그림의 떡인 건가…….’
답답해진 대찬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김산하였다.
“누나, 오늘 시간 있어?”
“시간? 어, 있어. 왜?”
“술이나 한잔할까 하고.”
“워커홀릭 조대찬이 웬일이래. 금요일도 곧잘 야근했잖아?”
“좀 답답한 일이 있어서.”
김산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그렇지. 꼭 뭔 일이 있어야 날 찾더라.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저녁이나 하지, 애먼 나를 왜 찾아?”
“가족들 오늘 나 빼고 제주도 놀러갔어. 놀아 줄 사람 없단 말야.”
“…그래? 알았어.”
“알았어. 거기서 봐. 오늘은 내가 살게.”
김산하는 전화를 끊고 잠깐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제 직장 상사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과장님.”
“어, 김산하, 왜?”
“죄송한데요, 오늘 회식 참석 못할 거 같아요.”
“엉? 왜!”
“오늘 할아버지 첫 제사라……. 깜빡하고 있었네요.”
김산하는 멋쩍게 웃으며 거짓말을 술술 읊었다.
그러고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후다닥 짐을 챙겨 떠났다.
대찬과 김산하는 둘의 회사에서 가까운 강남에서 만났다.
김산하를 발견한 대찬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어, 빨리 왔네.”
“너야말로 엄청 일찍 왔다. 어지간히 심심했나 봐.”
“응, 정말 심심했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김산하는 대찬과 나란히 섰다.
대찬이 김산하에게 물었다.
“어디 갈까? 오늘도 황소곱창?”
“질렸어. 좀 근사한 곳으로 가자. 너한테 얻어먹는 날이니까.”
“그럼 오랜만에 와인이나 한잔할까? 주변에 아는 곳 있어.”
“좋은 생각이야.”
둘은 와인을 나눠 마셨다.
신변잡기를 얘기하다가 대찬이 자신의 고민을 말했다.
“내가 간편 결제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제안했어. 2년 안에 기술을 상용화할 회사를 알고 있거든.”
“그런데?”
“그런데 그 회사가 AKD테크야.”
그 말에 와인 잔을 입에 가져가던 김산하가 흠칫 놀랐다.
“뭐? 안두홍 회사?”
“응.”
김산하는 탁, 와인 잔을 도로 내려놨다.
“왜 하필 거기랑 컨택을 하려는데?”
“그쪽이 기술 진척이 빠르니까. 그리고 단순 IT기업이라 기술을 어딘가로 팔아먹어야 할 테니까.”
김산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으이그, 밥통아, 그러게 왜 자진해서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려고 그래.”
“한 발짝 먼저 나가려면 어쩔 수 없잖아.”
김산하 역시 대학 시절 안두홍 때문에 학을 뗀 전력이 있으니 동병상련이었다.
“여우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미련 곰탱이가 따로 없다니까.”
어줍지 않은 말로 위로받기보다는 차라리 김산하처럼 톡톡 쏘는 편이 좋았다.
‘아이고, 안됐네.’ 하는 말에는 공감이 담기지 않는다.
오히려 방관과 무관심의 심리가 더 짙게 담기기 마련이었다.
김산하처럼 대찬더러 밥통, 미련 곰탱이로 부르는 말에 공감의 심리가 더 짙었다.
대찬은 와인을 맥주처럼 들이켜고 말했다.
“어떻게 말을 터야 할지 모르겠네. 차라리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면 순전히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했을 텐데.”
“지금 문제는 네가 아니라 서청수 회장님이야.”
“그렇지.”
대찬이 알고 있는 걸 김산하도 알고 있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이익이 된다고만 하면 네까짓 게 무슨 대수겠어. 그런데 안두홍이랑 서청수는 철천지웬수잖아. 안 해 줄 거 같은데.”
김산하의 지적은 적절했다.
“골 아파.”
대찬이 이마를 짚자 김산하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니까 누가 사서 고생하래?”
“그래도 왠지 할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동안 일이 너무 잘 풀렸지? 아주 그냥 오만방자해져서는.”
“오만방자한 게 아니라……!”
김산하는 대찬의 반론을 차단했다.
“됐고, 술이나 마셔. 안 되겠다. 와인 갖고는 안 취하네. 소주로 옮기자.”
“이럴 줄 알았어.”
“너도 이런 날에는 소주 마셔야 돼. 그래야 진탕 마시고 잊어버리지. 일 생각은 월요일에 하자.”
주말을 앞둔지라 둘은 회사 걱정은 뒷전으로 미뤘다.
덕분에 제법 오랜 시간 술을 마셨다.
허름한 식당으로 가서 소주로 종목을 바꿨다.
둘 다 어디 가서 주당을 꼽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술병이 쌓이고 쌓여도 정신이 혼곤해지지는 않았다.
김산하는 마른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내가 진짜 짜증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술을 병째 마셔도 잘 안 취한다는 거야.”
“뭐든 못하는 것보단 잘하는 게 좋지 않아?”
김산하는 흥, 콧방귀를 뀌면서 다시 물었다.
“내가 두 번째로 짜증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김산하는 대찬의 어깨를 검지로 콕콕 찔렀다.
“네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한다는 거야.”
대찬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게 왜 짜증나는데?”
“지금 소주 4병 마시고도 눈깔 말똥말똥하게 떠갖고는. 발음도 또박또박, 얄밉게.”
“그럼 동태 눈깔 해갖고 칠렐레 팔렐레 해야 마음에 들겠어?”
“그랬으면 그냥 확 덮쳐 버리기라도 하지.”
“이 누나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대찬은 펄쩍 뛰었다.
정작 김산하는 천하태평이었다.
“우리가 내외하는 사이도 아니고, 못할 소리는 아니지.”
“나는 내외해.”
“칫.”
김산하는 거푸 술을 마셨다.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했다.
아무리 타고난 주당이라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대찬도, 김산하도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지가 흐느적거렸다.
둘은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분위기는 분위기로 그쳤다.
그 후로도 마신 술 때문이었다.
김산하는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정신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찬은 완전히 뻗어버린 김산하를 부축해 택시를 태웠다.
그를 보내고, 떠나는 택시의 번호판을 기억해두었다.
누구는 유난이라고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다했다는 최소한의 위안이 되었다.
대찬은 간밤의 숙취를 해소하느라 주말을 통으로 소비했다.
그렇게 주말은 찰나처럼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돌아왔다.
사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다녀온 서원웅이 대찬에게 말했다.
“사장님께서 네가 말한 필래페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어. 한번 추진해보라고 하시더라.”
“아, 그렇습니까.”
“근데 네가 잘 아는 업체가 도대체 어디야?”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AKD테크요.”
“AKD테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안두홍.”
“아… 안두홍 선배님…….”
서원웅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대찬은 서원웅의 반응을 능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쪽이랑 교섭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잘될까?”
서원웅은 여전히 미온적이었다.
“잘되게 만들어야죠. 노력해볼게요.”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해? 이건 누가 와도 해결 못할 거 같은데…….”
“저도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까진 아닌데요, 그래도 이왕 제 입으로 저질러놨으니 일단 제 힘으로 해보려고요. 사람 몇 더 붙는다고 달라질 것도 많지 않을 거 같고.”
서원웅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대찬의 뜻을 따라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사람 몇 더 붙는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었다.
“그래. 일단은 너한테 맡길게.”
“고맙습니다, 부실장님.”
“그래도 일이 잘 안 될 거 같으면 바로 말해줘. 시간 너무 끌다가 포기해버리면 회사나 너나 별로 안 좋을 테니까.”
대찬은 푸근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조건 되도록 만들어볼게요.”
“그래, 지금까지 잘했으니까. 믿는다?”
“맡겨주십시오.”
대찬이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장담하자 서원웅도 웃었다.
하지만 대찬의 마음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김태준 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간 이상 이젠 무를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