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41화
금강산도 식후경.
식사가 끝난 뒤의 회의에서 본격적인 공방전이 벌어졌다.
회의의 진행을 맡은 비서실장이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필래마트의 온라인 쇼핑몰 혁신 리뉴얼에 관한 건을 의논해 보겠습니다. 김태준 필래마트 사장님, 발언해 주시죠.”
김태준 사장은 헛기침을 하고 마이크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필래마트 김태준입니다. 세부 내용은 유인물에 나와 있기 때문에 구구절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E-커머스(전자상거래)의 비중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입니다. 그걸 위해 혁신적인 전면 리뉴얼을 결단한 겁니다.”
김태준이 짧게 발언을 마치자 비서실장이 사장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관련하여 의견이 있으신 사장님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곽동성 사장이 손을 들었다.
발언권을 얻은 그가 마이크를 켰다.
“필래식품 곽동성입니다. 사장님의 말씀이 일리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이기적입니다.”
예상했던 반응이기에 김태준 사장은 덤덤히 되물었다.
“이기적이라니?”
“이미 필래유통 산하에 필래몰을 운영하고 있잖습니까.”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 필래마트가 별도의 온라인 쇼핑몰을 출범하면 필래몰이 지대한 타격을 입는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필래몰은 백화점의 상품과 필래식품의 가공식품을 주로 취급합니다. 때문에 필래마트와 중복되는 제품이 적습니다. 그것 때문에 온라인 시장을 포기하란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땅히 필래몰에 필래마트가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별도의 온라인 쇼핑몰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둘의 설전에 서청수 회장도, 서청규 사장도 개입하지 않았다.
김태준과 곽동성이 그들을 대리하고 있었다.
김태준은 서청수와 서원웅의 입이었고, 곽동성은 서청규와 서승학의 입이었다.
김태준은 상반신을 살짝 앞으로 굽히며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괬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눈빛을 서청규를 향해 뿌렸다.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그러자 곽동성이 나섰다.
“김태준 사장님, 저랑 의견을 나누고 계셨잖습니까.”
“여쭤볼 게 있다고 하잖습니까. 곽 사장님은 필래식품 사장이지, 유통 사장이 아니잖아요.”
김태준은 기어코 서청규를 불러냈다.
서청규가 마이크를 켰다.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네, 말씀하시죠.”
“작년 필래몰의 실적이 어떻게 됩니까? 매출은 얼마고 영업이익은 얼마죠?”
“자세한 수치는 모릅니다만.”
“모르신다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작년 필래몰의 매출은 952억 원, 영업이익은 마이너스 72억 원입니다.”
김태준 사장은 ‘마이너스’라는 부분을 힘주어 발음했다.
초라한 수치에 서청규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겁니까?”
“경쟁 업체인 위마트의 위마트라인은 4천억 원의 매출에 영업이익 플러스 145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업하우스의 온하우스는 3천2백억에 57억 원이고요.”
“그건 위마트나 업하우스가 대형 할인점을 보유했기 때문 아닙니까! 필래마트가 제대로 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서청규는 모욕감에 평정심을 잃고 언성을 높였다.
김태준 사장은 미소를 머금었다.
“서청규 사장님은 필래마트가 몇 년 전까지 유통 산하였다는 걸 잊으신 모양입니다. 필래마트가 제대로 성장 못한 게 도대체 누구 때문입니까?”
“김 사장……!”
“필래몰의 실적은 경쟁 업체는 물론 지방의 중견 업체인 태양마트에도 밀리는 실정입니다.”
“그게 그쪽 리뉴얼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김태준 사장은 피식 웃으면서 여유롭게 받아쳤다.
“왜 상관이 없습니까? 지금 필래마트는 경쟁사를 맹추격하고 있습니다. 브랜드 가치는 오히려 추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필래마트의 브랜드가치는 필래유통과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요.”
“잘나가는 필래마트의 제품을 못 나가는 필래몰에서 판매하라는 말씀은 언어도단이다, 이겁니다.”
거듭되는 날카로운 지적에 서청규 사장은 거품을 물 기세였다.
그러자 곽동성 사장이 급히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우리 그룹의 온라인 쇼핑몰은 전통적으로 필래몰이었습니다. 그걸 뒤집겠단 뜻입니까?”
“먼저 나왔다고 형 대접 해 달라는 겁니까? 자본주의에서는 돈 많은 놈이 형님입니다. 전통까지 내세우시는 걸 보니 논리가 궁하신 모양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서청규와 곽동성을 때려잡는 김태준의 말에 속으로 박장대소했다.
회장 체면이 있어 입가만 씰룩거리는 게 참기 어려웠다.
침착하던 곽동성 사장도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선후만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필래몰은 오래된 만큼 대중에게 보편적이고 친숙합니다. 이건 신규 업체인 필래마트가 따라오기 힘든 가치입니다.”
김태준 사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시간이 나시면 인터넷에 필래몰 검색해 보십시오, 뭐라고 나오나. 원하시면 제가 뽑아 온 자료를 읽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필래몰은 구식 결제 시스템과 불편한 인터페이스로 혹평이 자자했다.
곽동성은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필래몰은 이미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해 놨습니다. 필래마트가 별도의 인터넷 쇼핑몰을 꾸린다면 새로운 비용이 발생할 텐데, 낭비 아닙니까?”
“그건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필래유통의 물류기지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듣자하니 텅텅 빈 창고들이 많다는데, 사적인 감정으로 회사의 이익을 해치시진 않겠죠.”
“…….”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마르군요. 더 설명이 필요합니까?”
곽동성, 서청규 두 사장의 표정이 썩었다.
필래그룹의 사장단 회의는 필래몰과 별도로 필래마트의 온라인 쇼핑몰을 전면적으로 리뉴얼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김태준 사장은 회의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찬을 발견하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대찬은 얼결에 그 손을 붙잡았다.
김태준 사장은 다른 손으로 대찬의 손등을 감싸고 툭툭 두드렸다.
대찬은 긴장 속에 김태준 사장에게 물었다.
“잘됐습니까?”
“그래, 잘됐어.”
그제야 대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긴장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보고서를 잘 만들어 놨더군.”
김태준 사장은 대찬과 나란히 걸어갔다.
“노심초사했습니다.”
“자네가 써 놓은 예상 질문을 서청규고 곽동성이고 줄줄 읊더라니까. 마치 급할 때 열어 보라고 준 제갈공명의 주머니 같았어.”
“운이 좋았습니다.”
“자네,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무명 선수도 운이 좋으면 사이클링히트를 치잖습니까.”
김태준 사장은 피식 웃었다.
“사이클링히트를 치려면 3루타가 필요하잖아. 발 느린 타자는 3루타 못 치는 거 알지?”
“외야수가 빠뜨리면요.”
“그건 3루타가 아니라 원 히트 원 에러를 주지.”
대찬은 어느덧 김태준 사장과 속 편한 농담까지 나눴다.
그건 김태준 사장이 그만큼 대찬을 인정한다는 증거였다.
“요 근처에 스시 잘하는 집이 있어. 나랑 저녁이나 같이 하지.”
“그럼 감사히 얻어먹겠습니다.”
“사 준단 말은 안 했는데.”
지금까지 회사 수뇌들과의 식사 자리를 의식적으로 피해 왔던 대찬도 이제는 순순히 자리에 응했다.
그는 김태준 사장과 늦은 저녁까지 반주를 곁들인 스시를 먹고 헤어졌다.
“잘 먹었습니다. 조심히 살펴 들어가십시오.”
“오늘 고마웠네. 앞으로도 기대하지.”
대찬은 깊이 고개를 숙여 김태준 사장을 전송했다.
대찬은 김태준 사장이 보고서의 비결을 물었을 때 운이 좋았다고 어물쩍 넘겼지만, 비결은 따로 있었다.
그는 김태준 사장과 헤어지고 만몽철학원으로 향했다.
만몽거사는 그를 보자마자 대뜸 외쳤다.
“술 사!”
“인사도 안 하고 술 얘기부터 꺼내십니까.”
“네놈 입꼬리가 꼴 보기 싫게 씰룩거리는 꼴을 보니까 일이 잘된 모양이지. 그럼 술 사야지, 안 살 거야!”
“예, 물론 사 드려야죠. 요 앞 포장마차로 가실까요?”
“포장마차는 니미, 건너편 황금루로 가자.”
“거기 영업 끝났을 시간인데요.”
만몽거사는 쯧, 혀를 찼다.
“이미 다 말해 놨어. 노 사장이 마오타이주에 코스로다가 준비해 놨다니까 얼른 가자고. 식기 전에.”
“제가 안 왔으면 어쩌시려고 그랬어요.”
“일이 잘됐으면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러 왔을 거고, 안 됐으면 이 쌍놈의 돌팔이야! 하고 지랄하러 왔겠지.”
“제가 그렇게 막돼먹은 놈은 아닌데요.”
“막돼먹은 새끼는 지 막돼먹은 줄 몰라.”
대찬과 만몽거사는 티격태격하며 노근기 사장이 기다리는 황금루로 향했다.
대찬이 김태준 사장에게 건넨 보고서와 예상 문답은 만몽거사의 데이터를 그 기반으로 했다.
서청규나 곽동성이나 전부 만몽거사의 단골이었다.
만몽은 그들의 생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다.
사장단 회의가 열리기 전에 서청규와 곽동성이 만몽을 찾았다.
만몽은 김태준 사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필래마트의 온라인 쇼핑몰을 추진할 것이라는 걸 귀띔했다.
대찬이 만몽에게 흘리라고 준 정보였다.
만몽은 서청규와 곽동성에게 그 정보를 흘리면서 슬쩍 물었다.
“만약 김태준 사장이 그렇게 치고 나오면 사장님들은 항변할 논리가 있어요?”
김태준 사장의 주장에 받아칠 논리가 없지 않냐는, 은근히 비꼬는 투였다.
그러자 그들은 즉각 반응했다.
“왜 없습니까? 그놈이 정말 그렇게 주장한다면 받아칠 이유가 십계명 만들고도 남습니다!”
“응? 정말이에요? 제가 듣기로는 자네들 인터넷 쇼핑몰이 영 후줄근하다던데…….”
그렇게 긁어 주니 서청규와 곽동성은 불쾌한 티를 내며 툭툭 던지듯 근거들을 나열했다.
만몽은 그 근거들을 주웠다.
거기에 지금까지 봐 온 서청규와 곽동성의 면모를 종합해 대찬에게 귀띔해 주었다.
다시 대찬은 자신이 가진 정보에 만몽의 귀띔을 더했다.
토씨 하나도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는 완벽한 예상 문답이 완성되었다.
김태준 사장이 건네받은 제갈공명의 주머니란 대찬과 만몽의 합작품이었다.
“거사님은 왜 이렇게 나만 예뻐해요?”
“네놈을 예뻐하는 게 아니라 그 싸가지 없는 것들이 큰코다치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대찬은 능글맞게 웃으며 만몽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필래마트는 새로운 온라인 쇼핑몰을 출범했다.
이름은 필래#(필래샵).
필래샵은 쾌진격했다.
필래 인 마켓의 공격적인 출점과 새벽 배송이라는 파격적인 서비스 방식이 쾌진격의 선봉장이었다.
전략기획실은 자체적인 보고서를 내놨다.
공격적인 방식으로 첫해 120억의 적자가 예상되지만, 점점 적자폭이 개선되어 2018년에는 흑자로 전환된다는 게 그 내용이었다.
당장 거액의 적자가 예상된다는 보고서는 주변의 공격으로부터 훌륭한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필래유통 측에서 적자를 물고 늘어지면, 이미 보고서에 다 나와 있는데 새삼스럽게 구냐는 면박이 가능하다.
“하지만 당장의 적자 폭을 줄이면 금상첨화겠죠.”
부실장이 된 서원웅은 이제 욕심도 부릴 줄 알았다.
회의에서 그가 그렇게 말하자 한태윤 과장이 말을 받았다.
“아직 결제 시스템 간소화 건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위마트라인이나 온하우스가 복잡한 결제 방식으로 애를 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말을 이번에는 허운이 받았다.
“우리가 선제적으로 치고 나가면 단기간에 적자 폭을 줄이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시장을 선도할 수도 있겠군요.”
유채경도 모처럼 의견을 냈다.
“필래카드랑 제휴를 맺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 같아요.”
한태윤 과장도 유채경의 말에 동의했다.
“당장은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죠.”
그러자 김산호도 한마디 보탰다.
“하지만 그런 건 다른 업체도 하고 있어요.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에요. 휴대폰 인증을 통한 결제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홍은주가 김산호의 말에 동의했다.
“그거 역시 위마트라인에서는 이미 사용하고 있어요. 우리도 얼른 그 부분을 지원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어요.”
결제 시스템 간소화를 맨 처음 주창했던 대찬이 제안했다.
“우리 자체적인 간편 결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합니다.”
“음?”
서원웅을 비롯, 팀원들의 시선이 대찬 쪽으로 향했다.
“개인의 계좌를 등록하면 자동으로 연동되어 간편하게 결제할 수 있는, 일종의 필래만의 전자화폐입니다. 가칭 필래페이죠.”
그러자 한태윤 과장은 우려를 표했다.
“그런데 그건 제도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금융 관련해서는 여간 규제가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요.”
“우리가 착실히 준비를 해 놓으면 3, 4년 안에는 규제가 해결될 겁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금지하는 포지티브 규제가 아니라, 이것만 하지 말아라 하는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될 겁니다.”
김산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찬에게 물었다.
“형님… 아니, 조 대리님은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규제를 풀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시장이 커질 테니까.”
그러자 한태윤 과장이 우려되는 지점을 한 가지 더 짚었다.
“제도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기술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네… 그 기술이라면 2년 안에 상용화가 가능하도록 개발 중인 업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팀원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