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40화
대찬이 살았던 2019년은 2010년에 비해 온라인 쇼핑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해였다.
2010년의 대형 할인점 체인들이 앞다투어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주력은 오프라인이었다.
대찬은 2019년에는 오프라인 매장의 성장이 정체되어 회사마다 골머리를 앓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온라인 쇼핑몰의 혁신을 주창했다.
결제 간소화의 문제야 굳이 몇 년 앞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제언할 만한 일이었다.
쌀 한 가마니 사려다가 이것 깔아라, 저것 깔아라 하는 통에 마우스를 집어 던진 경험이 있었다.
온라인 쇼핑몰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와 결제의 간소화는 기획안으로 갖춰졌다.
새벽 배송의 건에 관해서도 사업분석실에서는 당장에는 이익을 실현하기 어렵지만,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 온라인 쇼핑몰의 성장에 혁혁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김태준 사장은 혁신적인 발상이라면서 크게 흡족해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회사의 사장으로서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보다도, 서씨 가문의 가신으로서 충정을 보이는 걸 더 중요시 하는 듯했다.
그는 특히 서승학이 필래의 대권을 넘겨받으면 반드시 위기가 찾아온다는 생각을 신념처럼 가졌다.
때문에 그의 대항마가 될 수 있는 서원웅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전략기획실에서 주도하는 온라인 쇼핑몰 리뉴얼과 새벽 배송에 적극적인 출자가 이뤄졌다.
사장이 의욕을 갖고 밀어주는 만큼, 대찬도 입안자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했다.
* * *
“기어코 서원웅 그 자식이 여기까지 올라오는구나.”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서청수의 동생이자 라이벌이며, 서승학의 가장 유력한 후원자였다.
서승학은 서청규 사장보다는 서청수 회장에게 잘 보여야 했다.
부자지간의 정은 차치하더라도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건 서청수지, 서청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서청규 사장을 더 따르는 건 순전히 서청규 사장의 수완 때문이었다.
서청규 사장이 서승학의 마음을 얻은 건 소위 손찌검 황태자 사건 당시였다.
서승학은 이때 서청수 회장의 신임을 일시적으로 잃고 호되게 질책을 받았다.
서청규 사장은 그때를 노렸다.
서승학은 어른 아이였다.
훗날 거름이 될 야단보다는 당장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위인이었다.
서청규 사장은 실의에 빠진 서승학을 어르고 달랬고, 술을 따라 주고 은밀히 여자까지 붙여 주었다.
그때부터 서승학은 아버지를 멀리하고 삼촌을 가까이했다.
서승학은 서청규를 찾아와 종종 독대를 나눴다.
서청규가 서원웅의 이름을 입에 담자 서승학은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했다.
“그 더러운 자식 이름은 왜 말해요? 밥맛 떨어지게.”
“너도 마냥 외면할 이름은 아니다.”
“그래봤자 창녀의 자식이죠.”
서승학은 서원웅을 그런 모욕적인 별명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서원웅이 창녀의 자식이라고 확신했다.
술집 여자인 서원웅의 모친이 술 취한 서청수에게 접근해 아이를 낳았을 것이란 믿음이었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렇게 부르고 싶으니 그렇게 믿었다.
그의 모친인 백양옥 여사도 항상 그렇게 말해 왔던 참이었다.
“놈의 행보가 석연치 않아. 성장세가 지나치게 급격해.”
“아버지가 절 긴장시키려고 그 녀석을 어떻게 키워 보려고 하시는 거 같은데, 그게 오히려 저에게는 이득입니다.”
“이득이라니?”
“삼촌, 조장이란 말 아시죠? 벼가 빨리 자라게 하려고 잡아당겨서 늘려 줬더니 오히려 일찍 죽어 버렸다는 고사 말이에요.”
서청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꼭 그 꼴이에요. 저랑 체급을 맞추려고 급히 키워 주다 보니까 알맹이가 없는 거거든요. MBA도 못 딴 쪼다가 제 맞수라니, 제가 다 창피하네요.”
“그러는 너도 제대로 된 MBA는 아니잖아? 서 회장님이 이사로 있는 시골 학교에서 땄잖아.”
서청규가 모처럼 일침을 놓자 서승학은 눈을 부라렸다.
“지금 시비 걸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긴장은 하고 있어.”
“삼촌이나 많이 하세요, 긴장.”
버르장머리는 진즉에 찜 쪄 먹은 서승학의 말버릇에 서청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런 버릇없는 말버릇은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 왔지만 도통 적응이 안 됐다.
그러나 서승학과의 우호 관계는 그에게 절실했다.
그러니 조카의 막돼먹은 말버릇도 꾹 참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서청규는 두통이 지끈지끈 올라와 이마를 짚었다.
“서원웅이가 감각이 있는 건지, 제대로 짚었어.”
“제대로 짚다뇨?”
대화 주제로 서원웅이 자꾸 올라오는 게 서승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히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온라인 쇼핑몰을 혁명적으로 리뉴얼하겠다는 거 말이야. 시의적절한 발상이라고. 거기다 나를 제대로 겨냥했어.”
“하긴, 그러고 보니 필래몰은 삼촌이 갖고 있죠.”
필래몰은 필래유통이 보유한 온라인 쇼핑몰이었다.
필래유통 산하의 필래백화점과 서청규 계열의 필래식품이 생산하는 가공식품을 주로 판매하고 있었다.
필래마트가 필래유통의 사업부였던 시절에는 존재감이 워낙 미미한지라, 온라인 쇼핑몰 내에서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차였다.
필래몰은 비싼 백화점 상품과 필래식품의 몇몇 가공식품만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수의 업체들과 경쟁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필래몰은 기지개를 켜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필래마트에서 온라인 쇼핑몰을 혁신적으로 리뉴얼하겠다는 카드를 꺼냈다.
서청규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김태준 사장이 대찬을 사장실로 불러들였다.
대찬은 김태준 사장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꺾었다.
사장실은 여러 번 와도 특유의 중압감이 느껴졌다.
“사장님, 찾으셨습니까.”
“어, 앉아. 차나 한잔하려고.”
차나 한잔하려고 부른 게 아님을 대찬은 알고 있었다.
김태준 사장이 즐긴다는 고급 보이차가 대찬의 앞에 놓였다.
향긋한 냄새에 다소 긴장이 풀렸다.
“회장님께서 다음 주에 비정기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어.”
“꽤 오랜만이군요……. 특별한 이슈가 있습니까?”
대찬의 질문에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장단 회의는 내가 직접 회장님께 부탁드렸네. 다름 아닌 온라인 쇼핑몰 혁신 관련해서야.”
“아…….”
“서원웅이 제출하긴 했지만 자네 아이디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네.”
대찬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예, 맞습니다.”
“그게 제법 당돌한 제안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
“…예?”
“필래유통이 운영하고 있는 필래몰이 있는데, 필래마트의 것을 새로 만들겠다는 뜻이니 말이야.”
“아……!”
김태준 사장이 지적하고 나서야 대찬은 깨달았다.
필래마트 자체적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리뉴얼하겠다는 결정은, 비실비실한 필래유통을 향해 포문을 열어젖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명시적인 제안자가 서원웅이었다.
대담한 선제공격이나 다름없었다.
대찬이 놀라자 김태준 사장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마치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군. 여우 같긴!”
“정말 몰랐습니다.”
“어쨌든, 이번 사장단 회의에서 확실히 필래유통을 눌러야 해.”
김태준 필래마트 사장은 서청수 회장의 충복이었다.
자연스레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과는 오래된 앙숙이었다.
그런 까닭에 대찬의 도발적인 제안이 더욱 김태준 사장의 마음에 들었다.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네가 나랑 같이 사장단 회의에 가 줘야겠어.”
“서원웅 부실장이 동행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대찬의 말에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서원웅을 대동하면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돼. 그러면 서승학과 서원웅의 대결 구도가 수면 위로 드러나. 그 단계는 시기상조야.”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세력 싸움이 아니라 논리 싸움이야. 그룹 차원에서 이익이 된다는 점을 회장님 이하 사장단이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도록 정교한 보고서를 준비해.”
“네, 사장님.”
“유관 부서에는 언질해 놓을 테니 얼마든지 자문을 구하도록.”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어. 그럼에도 제대로 안 된다면 책임 소재는 자네한테 있는 거니까.”
사장단 회의는 필래그룹의 본사 사옥에서 이뤄졌다.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 서승학 필래기획 사장, 김태준 필래마트 사장을 비롯하여 필래케미칼, 필래식품, 필래호텔, 필래경영연구소, 필래컬처인더스트리 등 계열사 사장 전원이 참석했다.
모르는 상태에서 봤으면 홀쭉이 혹은 배불뚝이 양복 아저씨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거대한 자본을 움켜쥔 사장들이란 걸 알고 보니 후광마저 느껴졌다.
대찬이 뒤에서 김태준을 따라가는데, 사장단 중 누군가가 알은체를 했다.
“어, 김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곽 사장님, 승진 축하합니다.”
대찬도 아는 얼굴이었다.
곽동성 전무였다.
대찬은 얼른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만몽철학원에서의 만남 때문에 곽동성 전무와 대찬은 구면이었다.
만몽거사와 친분이 두터운 대찬이 김태준 사장을 보좌한다는 걸 곽동성 전무에게 알려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곽동성 전무는 대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서청규 사장의 최측근이자 서승학의 멘토였다.
최근 필래식품의 사장으로 승진한 몸이기도 했다.
필래식품은 본래 서청규 사장의 계열이었다.
그럼에도 필래마트의 쿠킹 박스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것 때문에 사장의 모가지가 날아갔다.
서청규 사장은 보란 듯 필래기획의 곽동성 전무를 필래식품 사장에 임명했다.
서원웅을 견제하겠다는 노골적인 의도였다.
곽동성은 서청규의 일개 측근이면서 필래그룹 내에서 중량감 있는 인사였다.
“온라인 쇼핑몰을 추진한다고 들었습니다. 회장님께서도 기대가 큰 모양이죠? 그것 때문에 사장단 회의까지 주재하시고.”
“뭐, 이거 하나 때문에만 소집하셨겠습니까. 사장단의 지혜를 모아야 할 안건들이 산적해 있으니 그러신 거겠지.”
곽동성과 김태준은 서로 발톱을 숨기고 웃음으로 마주했다.
“그럼 이따 회의실에서 뵙겠습니다.”
“음, 그러죠.”
곽동성은 김태준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걸음을 옮겼다.
서청규와 서승학을 비롯해 그쪽 파벌의 사장들이 있는 곳이었다.
서청규는 흘끗 뒤를 돌아봤다.
아주 짧은 순간, 대찬과 눈이 맞았다.
그의 눈빛은 건조했지만 어딘지 모를 살벌함이 느껴졌다.
대찬은 애써 그 눈빛을 외면하며 김태준 사장의 뒤를 따랐다.
그는 김태준 사장과 회의실 앞까지 동행하면서 일주일간 축적한 정보와 논리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모쪼록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자네가 좋은 보고서를 쥐여 줬다면 결과가 좋겠지.”
그 말인즉슨, 결과가 나쁘면 모조리 네놈 책임이란 뜻이었다.
회의실 안에는 사장단만 출입이 가능했다.
대찬은 문밖에 서서 공손한 인사로 김태준 사장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살짝 열리는 문 사이로 가장 상석을 꿰찬 서청수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서청수 회장은 총수답지 않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찬에게 잠깐 손을 흔들었다.
대찬은 숙인 허리를 더 깊이 숙였다.
문이 닫히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각자 자기가 모시는 사장들을 안으로 들여보낸 직원들은 긴장이 풀려서 숙덕거렸다.
“마트도 적당히 해야지. 무슨 사장단 회의까지 소집시키면서 요란법석을 떤담.”
“회장님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야. 대놓고 서원웅인지 뭔지 하는 놈팡이를 푸쉬해 주고 있다니까.”
대찬의 귀에 거슬리는 말들이었다.
그들은 대찬과 눈을 마주치고 쉬쉬하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자리를 뜨면서 하는 말소리가 대찬의 귀에도 들렸다.
“저 사람이 서원웅 동아줄 잡고 입사 1년도 안 돼서 대리 된 친구야. 조심해.”
“상사 여럿 골로 보냈다며? 쯧쯧, 피비린내가 여기까지 진동하네. 모함으로 흥한 놈들은 꼭 모함으로 망하는 거야.”
그런 주변머리 없는 쑥덕공론을 대찬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장단은 라운지에 마련된 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즐겼다.
수행하는 직원들은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삼삼오오 모이는 와중에 대찬은 혼자 밥술을 떴다.
먹는 와중에도 흘끗흘끗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밥이나 처먹지, 남 얼굴은 왜 뜯어보고 난리야.’
대찬은 신경질적으로 밥에 숟가락을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