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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39화 (138/556)

난 할 수 있어 139화

김태준 사장은 서원웅과 독대했다.

“SSM 반응이 괜찮아.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 줬어. 우리의 강점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약점을 감추는 기획이야. 아주 인상 깊었네.”

“과찬이십니다.”

“자네를 급하게 그 자리로 올린 것도 다 그 공로 덕택이야.”

김태준 사장은 서원웅의 승진이 서청수 회장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밝히지 않았다.

서원웅의 허파에 헛바람을 넣지 않기 위함이었다.

전말을 모르는 서원웅은 겸연쩍게 웃었다.

“너무 급하게 승진해서 얼떨떨합니다.”

“전통시장에 SSM을 입점시키자. 이 아이디어는 조대찬이 생각해 낸 건가?”

서원웅은 김태준 사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적으로 조대찬 대리의 공로입니다.”

“전적으로 그 녀석 공로다?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지?”

김태준 사장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서원웅은 당황했다.

“…예?”

“팀장은 자네였잖나. 그런데 어떻게 전적으로 조 대리의 공로일 수 있냐고. 조대찬은 자네 부하야. 자네가 조대찬의 목줄을 쥐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김태준 사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토 달지 마!”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서원웅은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김태준 사장은 서원웅에게 대고 호통을 쳤다.

“사냥개가 토끼를 물어 오면 그건 사냥꾼의 몫이야! 사냥개에게는 토끼 창자라도 돌아가면 다행이란 말이다!”

“…….”

“앞으로 남에게 공을 돌리지 마. 그게 설령 남의 공이라도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는 자네,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어.”

“…알겠습니다.”

“조대찬은 자네 부하고, 자네는 조대찬의 주인이야. 항상 그걸 명심해.”

김태준 사장의 말이 서원웅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서원웅이 자리를 뜨고, 김태준 사장은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너무 호되게 야단쳤나…….”

그는 멀뚱히 천장을 바라봤다.

서원웅이 그의 기대만큼, 또 서청수 회장의 기대만큼 빨리 성장하려면 회초리를 댈 수밖에 없다고 김태준 사장은 생각했다.

정기 인사에서 김산호, 오다혜는 주임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한 명 더, 홍은주도 주임으로 승진했다.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뜻이었다.

홍은주는 그 통보를 받고 애처럼 펑펑 울었다.

“축하해요, 홍 주임.”

대찬은 부러 주임이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홍은주는 코를 훌쩍거리며 화답했다.

“감사해요. 다 조 대리님 덕분이에요…….”

“홍 주임이 잘나서 그런 건데요.”

대찬은 웃으면서 홍은주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을 받은 홍은주는 한참 눈물을 닦았다.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항상 무뚝뚝하던 그녀의 눈물이 적응이 안 됐다.

사람들은 홍은주의 진급과 정규직 전환보다 서원웅의 진급에 더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졸지에 상사를 1명 더 모시게 된 김영우 차장은 내키지 않는 인사를 건넸다.

“서 과장, 축하해…….”

하대하는 축하 인사에 송희근 과장이 찌릿 눈총을 쐈다.

그러자 제 발이 저린 김영우 차장은 정정했다.

“…축하드립니다, 부실장님.”

“감사해요, 차장님.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 주세요.”

대찬은 서원웅에게도 각별한 축하 인사를 보냈다.

“축하드립니다, 부실장님.”

“…그냥 반말해 주면 안 될까?”

“회사의 기강이 지엄한데요.”

서원웅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해했다.

“잘한 일도 없는데 너무 빨리 승진해 버렸어.”

“홍 주임도 그렇고 부실장님도 왜 자기 공을 인정 안 해요? SSM이 성공적이었던 건 순전히 부실장님 수완 덕분이에요.”

“아이디어를 낸 건 조 대리잖아.”

“부실장님이 믿고 결단을 내려 준 덕분에 아이디어가 실현된 거예요.”

대찬이 확고하게 말하니 서원웅도 더 겸손을 떨지 못했다.

그는 대찬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승진을 시키셨을까, 사장님이?”

“본격적으로 부실장님을 띄우시려는 거죠.”

“나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의 뜻이 아니라 회장님의 뜻이라고 보는 게 맞겠죠.”

“아버지의…….”

“창업주 회장님의 기일은 부실장님한테도 치욕이지만, 회장님께도 치욕이었을 거예요.”

서원웅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그땐 내 감정만으로도 벅차서.”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그러니 부실장님 곁에 사람들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걸 대신 생각하라고.”

“사람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부서의 모든 직원들이 부실장님 사람들이에요.”

“내 사람들…….”

“그러니까 이제 홀몸이 아니에요. 흔들리지 말고 굳건하게 나가세요. 우릴 먹여 살릴 책임이 부실장님한테 있는 거예요.”

김태준 사장에 이어 대찬의 말까지 서원웅의 가슴에 무겁게 놓였다.

황경원 대리는 서원웅 일당의 승승장구가 아니꼬웠다.

서원웅이야 핏줄이 다르니 그렇다 치더라도,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고 여겼던 대찬까지 의기양양한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흥, MBA도 못 딴 주제에 친구 잘 만나서는!’

그는 뚱한 얼굴로 대찬을 노려봤다.

신경질적으로 커피를 타는 그에게 김산호가 다가갔다.

“황소개구리가 아니라 연어였네요.”

“뭐?”

뚱딴지같은 말에 황 대리가 김산호에게 눈을 흘겼다.

“대리님이 그러셨잖아요. 조 대리님이 생태계 파괴하는 황소개구리라고.”

“…봐. 내 말대로 됐잖아.”

“에이, 그게 아닌 거 같은데요?”

황경원 대리는 살살 약 올리듯 웃는 김산호의 코를 주먹으로 짓뭉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뭐야?”

“연못에서 골목대장 노릇 하는 황소개구리가 아니라, 좁은 개울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는 연어였던 거 같은데요.”

김산호의 말에 배알이 꼴린 황경원 대리는 김산호의 말을 비꽜다.

“그럼 조 대리는 다시 별 볼 일 없어지겠네?”

“네?”

“알 낳으러 개울로 거슬러 올라오니까.”

“에이, 뭐 그런 쓸데없는 거까지 따지세요. 그냥 비유잖아요, 비유.”

김산호의 도전적인 말본새에 황경원 대리는 부아가 났다.

이제는 이런 송사리 같은 놈도 바득바득 기어오른다.

“비유를 할 거면 제대로 해. 비유를 엿같이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거칠게 받아친 말에 이번에는 김산호의 비위가 거슬렸다.

김산호는 잠깐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기어이 사족을 달았다.

“연어 중에 대서양연어는 개울에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나간대요.”

“아, 안 닥쳐?”

황경원 대리는 탁자를 탕 치고 자리를 떴다.

“에, 앤댁채?”

김산호는 황경원 대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필래 인 마켓은 여기저기서 환영받았다.

불과 한 달 전 SSM에 대해 신랄한 리포트를 내보냈던 최재한도 한결 밝은 목소리로 필래 인 마켓을 소개했다.

-SSM에 대한 여론의 뭇매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상생과 혁신을 도모한 이 대형 할인점 체인의 전략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ONB 뉴스, 최재한입니다.

대찬과의 사적인 친분을 의식한 사탕발림이 아니었다.

담백한 사실 그대로였다.

현장의 반응도 뜨거웠다.

전국 각지의 시장 상인 연합회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새로 설치된 SSM사업부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상인들로서도 필래마트의 시도는 더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필래 인 마켓을 시장 내에 유치하면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받지 않으면서도 젊은 층을 시장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물론 시장 내에도 공산품을 취급하는 점포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극한 소수였다.

상인 연합회에서는 그들의 신세를 걱정하지 않았다.

세상사, 으레 그렇게 돌아갔다.

필래마트는 공산품을 취급하던 상점들을 웃돈을 얹어 사들여 점포 부지로 삼았다.

상인 연합회의 적극적인 구애에 필래 인 마켓은 빠르게 확장했다.

게다가 건물을 신축할 필요도 없었다.

개점까지의 기간을 대폭 단축하고 비용 자체도 크게 절감해 냈다.

이런 사실이 빠르게 퍼지자 정부는 필래마트를 상생 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상을 들고 방긋 웃는 김태준 사장의 얼굴이 언론을 탔다.

필래 인 마켓은 오롯이 서원웅의 실적이 되었다.

이제는 단순히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은 회사원이 아니었다.

후계 구도에 변동을 일으킬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

눈치 빠른 이들은 벌써부터 서원웅의 가치를 셈하기 시작했다.

능력은 없되, 눈치 하나로 기업의 중추를 차지한 자들이 쑥덕공론을 벌였다.

“서원웅이가 올해 몇 살이지?”

“스물여덟.”

“스물여덟에 이사 대우라.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원래는 MBA 따러 갈 나이지.”

“근데 회장님은 서원웅이를 MBA 따게 할 거 같지가 않은데? 주요 부서에 배치해 버렸잖나.”

“나는 그 부분이 걸리거든. 정말 서승학이를 제치고 후계자로 삼을 거면 MBA부터 따게 했겠지.”

“나는 오히려 반대야. 그저 그런 자리만 주려면 MBA 따게 하겠지. 그런데 무리해서 상무까지 올려놓은 걸 보면, 서승학이하고의 격차를 급하게 좁히려는 것 같단 말이야.”

“에이, 그래도 설마하니 서자를 후계자로 세우려고…….”

“서승학이가 똑바로 된 인간이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취급도 안 하던 서자가 일약 서승학의 경쟁자로 뛰어올랐다.

대찬은 이런 기류를 피부로 체감했다.

서원웅은 퇴근 후에 자주 회사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회사 사람들이란 필래마트 내부의 직원이기도 했고, 필래그룹 계열사의 직원이기도 했다.

그냥 직원들이 아니라 최소 부장급이었다.

부사장 직함을 단 이들이 미사여구를 동원해 알랑방귀를 뀌었다.

사장급 중에서도 서승학에게 미운털이 박힌 치들까지 접근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대찬은 그런 윗물들의 사정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관여할 수도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일개 대리 신분이었다.

그런 높으신 분들에게 얼굴도장을 찍는 것보다, 확실한 실적으로 자신만의 자본을 다져나가는 게 더 급했다.

대찬은 직분에 충실했다.

그는 서원웅에게 말했다.

“지금도 온라인 고객들이 많지만, 차후에는 그 비중이 압도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오프라인 고객을 추월할 수도 있어요.”

미래를 현재로 살아 본 덕택으로 대찬은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의 추세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인터넷 쇼핑몰을 확충할 필요가 있겠네.”

“네. 자질구레한 결제 시스템을 간소화해야 합니다. 물건 하나 주문하는데 이것 깔아라, 저것 깔아라 하면 저 같아도 안 사거든요.”

서원웅은 대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또 타사에 비해 월등히 편리한 배송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부족한 인프라를 극복해야 합니다.”

“월등히 편리한 배송 시스템이라면……?”

“새벽 배송입니다.”

“새벽 배송…….”

서원웅은 대찬의 말을 곱씹었다.

“1인 가구와 맞벌이 부부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낮 시간에는 대개 집 밖에 있죠. 그런데 신선 식품의 경우 낮에 배송되어 오래 방치되면 부패의 염려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에 배송해서 아침에 받으면 냉장고에 보관할 수 있으니, 거기에 강점이 있다는 거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개 한 번 주문할 때 신선 식품뿐만 아니라 필요한 모든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구매자들의 일관된 소비 패턴입니다.”

“신선 식품 배송에서 우위를 점하면 전체 매출을 신장시킬 수 있다?”

“맞습니다. 소비자들은 구매 패턴을 잘 바꾸지 않습니다. 우리가 새벽 배송 시장을 선점한다면 위마트와 업하우스를 온라인 쇼핑몰 시장에서 따돌릴 수 있습니다.”

“음…….”

서원웅은 대찬의 논리를 납득했다.

“인력 관리에 품이 많이 들고 물류센터를 신축해야 하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진득하게 추진해야 합니다.”

서원웅은 대찬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을 내비쳤다.

“너 없으면 어떡할 뻔했어.”

“저도 부실장님 없으면 어떡할 뻔했습니까.”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실없이 웃었다.

그 둘을 건너다보던 한태윤 과장도 피식 웃었다.

“재밌는 짝꿍이야.”

온라인 쇼핑몰과 새벽 배송은 대찬이 두 번째로 필래에 입사한 이후부터 품어 오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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