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38화
서원웅을 알아본 기자들도 렌즈를 그쪽으로 돌렸다.
서원웅은 뻣뻣한 얼굴로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대찬은 굳은 얼굴로 그를 따랐다.
기자 한 명이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서원웅 씨, 부친이신 서청수 회장님의 초대를 받고 오늘 오신 겁니까?”
“필래그룹의 후계구도에 서원웅 씨가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들리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찬은 나서지 않았다.
주변인이 변죽을 울릴 상황이 아니었다.
서원웅이 대처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따로 드릴 말씀 없습니다.”
“서청수 회장님의 초대를 받으신 겁니까? 이것만 말씀해 주세요!”
질문에 서원웅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서걱, 진눈깨비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는 기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무렴 초대도 없이 함부로 쳐들어가겠어요.”
서원웅은 그렇게 말하고 대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은 밖에서 그를 바라보고 뒤로 물러났다.
기자가 조심스레 대찬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서원웅 씨와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
“부하 직원입니다.”
대찬은 짧게 대꾸하고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진눈깨비는 어느새 하얀 눈발로 바뀌어 대찬의 어깨에 천천히 쌓였다.
대찬은 눈이 쌓이도록 움직이지 않은 채 서원웅을 기다렸다.
그 이후로도 필래 서씨 일원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대찬에게도 낯익은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을 비롯해서 하나씩 계열사를 꿰차고 있는 서씨 집안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대찬은 기세등등한 얼굴들 사이에서 서원웅이 제대로 버틸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건 서승학이었다.
그는 조폭 두목처럼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워낙에 전력이 화려해서 기자들은 그에게 다가가길 주저했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이복동생으로 알려진 서원웅 씨가 제사에 참석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라고요?”
서승학은 그렇지 않아도 튀어나온 광대를 유난히 도드라지게 내밀며 되물었다.
“그 자식, 아니… 서원웅 과장이 오늘 제사에 참석했습니까?”
“예. 좀 전에…….”
서승학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장 육두문자를 쏟아 내야 조금이라도 속이 풀릴 것이다.
하지만 좋지 않은 일로 매스컴에 오르내리면 그땐 정말 사달 날 줄 알라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거친 콧김을 내뿜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은 손에 염주라도 들고 나무아미타불을 외고 싶은 심정이었다.
‘회장님 심중이야 이해하지만, 너무 가혹한 시간이 될 거 같은데.’
대찬은 안쓰러운 시선으로 천천히 닫히는 대문을 바라봤다.
저 대문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서청규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서승학은 무슨 말을 할까.
백양옥 여사는 무슨 행동을 할까.
서씨 집안의 사람들은 서원웅을 어떻게 대할까.
집안사람으로 인정해 줄까?
인정하지 않더라도 알은체는 해 줄까?
알은체는 하지 않더라도, 사람 취급은 해줄까…….
대찬의 가슴이 서원웅의 마음과 연결된 듯 덩달아 먹먹해졌다.
숨을 깊이 들이쉬니 초겨울의 시린 공기가 콧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필래그룹의 중역들이 참석한 추모식은 금방 끝났다.
중역들은 한 줄로 서서 방명록에 정성껏 준비한 글귀를 적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준비한 승용차를 타고 돌아갔다.
이제 그다음은 필래그룹의 서씨 가문끼리 치르는 제사였다.
대찬은 중역들이 떠나 휑한 자리에 부동자세로 서서 서원웅을 기다렸다.
진눈깨비가 싸구려 구두에 스몄다.
체온에 녹은 차가운 물이 발가락 사이로 스몄다.
발이 시렸다.
대찬은 참았다.
진눈깨비보다 서원웅의 마음이 배로 시리고 아릴 것이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났다.
굳게 닫힌 저택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대찬은 바람에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하고 대문을 바라봤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문이 열리고 잠시 후, 서씨들이 밖으로 나왔다.
대찬은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도리어 그들의 얼굴은 날씨만큼 어두침침했다.
대찬은 본능적으로 불행을 직감했다.
서승학은 서청규 사장과 함께 나왔다.
그들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광대에 감도는 홍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찬은 알지 못했다.
분노인지, 승리의 흥분인지, 수치심인지, 아니면 단순히 날씨 때문에 오른 홍조인지.
그들은 간단한 작별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서원웅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대찬은 두 발짝 앞으로 나가며 그를 맞이했다.
“과장님.”
서원웅의 얼굴은 서승학, 서청규와 마찬가지로 붉었다.
하지만 어쩐지 같은 붉음이라도 이유는 다른 듯했다.
서원웅은 뺨도 붉고 눈가도 붉었다.
그것만으로도 대찬은 그가 안에서 무슨 봉변을 당했는지 짐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혹은 알아도 봐주지 않는 기자들이 서원웅에게로 몰려갔다.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갔습니까?”
“집안 어른들께서 서원웅 씨를 일문으로 인정했습니까?”
“이제 서자 딱지를 떼는 겁니까?”
기자들의 또박또박한 발음이 서원웅의 귓전에 화살처럼 꽂혔다.
“…….”
서원웅의 눈가가 더 벌게졌다.
대찬은 살짝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여기서 동요하면 안 된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대찬은 슬며시 서원웅의 등 뒤로 섰다.
서원웅의 어깨가 떨렸다.
그는 입술도 떼지 못하고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대찬은 서원웅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러고도 어깨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대찬은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몇 번의 진동 끝에 겨우 평온을 되찾았다.
대찬은 계속 서원웅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울지 마.’
그는 자신이 남겼던 당부를 손의 온기로 전달했다.
무언의 당부가 전해졌는지 서원웅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내리는 눈발이 그의 뺨을 스치고 녹았다.
서원웅은 기자들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는 서씨입니다. 그걸 증명하는 데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서원웅은 그렇게 말하며 기자들을 쏘아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슬러시처럼 쌓인 진눈깨비를 헤치고 걸어갔다.
대찬도 기자들을 흘끗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대포 같은 카메라 렌즈가 서원웅을 겨냥했다.
대찬은 부러 서원웅의 뒤에 바짝 섰다.
그들의 겨냥을 등으로 막았다.
대찬은 뒷좌석의 문을 열려고 했다.
서원웅은 점잖은 손짓으로 그걸 말렸다.
그리고 스스로 조수석의 문을 열고 올라탔다.
대찬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조수석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고 서청수 회장의 저택이 안 보이는 곳까지 차를 몰았다.
서원웅은 차창을 멍하니 바라본 채로 침묵했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가자, 서원웅이 대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찬아.”
“응.”
“차 좀 잠깐 세워 줄래.”
“…어, 그래.”
대찬이 차를 세우자 서원웅의 어깨가 다시 떨렸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찬을 바라봤다.
“지금은 울어도 돼……?”
그를 보고 대찬의 눈에도 물기가 어른거렸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원웅은 대찬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11월, 진눈깨비는 때 아닌 폭설이 되어 매섭게 내렸다.
급하게 내리는 눈발이 차창을 가리고, 함께 부는 돌풍이 서원웅의 울음소리를 덮었다.
대찬은 서원웅의 등을 쓸어 주었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저택의 분위기는 싸했다.
그 넓은 저택에 서청수 회장과 백양옥 여사 둘만 남았다.
서청수 회장의 표정은 참담 그 자체였다.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해?”
“나는 충분히 경고했어. 그걸 무시한 건 당신이야.”
“잘못은 걔가 아니라 나한테 있어. 지를 거면 나한테 질러. 소금을 뿌릴 거면 나한테 뿌려. 그 애가 무슨 죄야.”
“뻔뻔하게 위선 떨지 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놀란 척, 가련한 척 청승 떨지 마. 역겨우니까.”
“당신……!”
백양옥 여사의 눈은 노기를 뿜었다.
“서원웅 그 애, 그년하고 아주 똑 닮았던데. 걜 보고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그게 될 거 같아?”
벌판처럼 넓은 거실 바닥에는 입자 굵은 소금이 뿌려져 있었다.
그건 서광구 회장의 제사상에도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호화스러운 제수가 소금 범벅이 돼 먹기 어렵게 되었다.
창업주 서광구 회장의 영정도 무참하게 소금을 뒤집어썼다.
서청수 회장은 노기 띤 얼굴로 백양옥 여사를 노려봤다.
“이럴수록 당신한테만, 승학이한테만 안 좋아.”
“허, 욕할 거면 나만 욕해. 승학이까지 싸잡아 말하는 저의가 뭐야? 당신 그 시커먼 속내를 도저히 못 감추겠다, 이거지?”
서청수 회장은 백양옥 여사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금이 뿌려진 바닥을 밟고 걸어가 아예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현관이 거칠게 닫혔다.
백양옥 여사는 서청수 회장의 구두가 없어진 현관을 바라봤다.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거실에 놓인 도자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굉음과 함께 도자기가 산산조각 나서 파편이 소금과 얽혀 흩뿌려졌다.
자정.
김태준 사장은 보통 10시에 취침해 4시에 기상했다.
그리고 6시에 출근했다.
그렇기에 자정은 김태준 사장이 가장 깊은 잠에 빠진 시각이었다.
그때 김태준 사장의 전화가 울렸다.
“어떤 개새끼야.”
잠이 깬 김태준 사장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그는 부스스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번 훔치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액정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 김태준 사장은 얼른 상반신을 일으켰다.
“회, 회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야, 태준아.”
“…약주하셨습니까?”
“정 없는 새끼. 꼭 그거부터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지?”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김태준 사장은 그렇게 물었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는 서씨가 아니라 제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추모식에는 참석했다.
서원웅을 향한 냉랭한 분위기를 피부로 느꼈다.
서청수 회장은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태준아.”
“네, 회장님.”
“원웅이, 이사 대우로 올리자.”
김태준 사장의 동공이 커졌다.
잠이 싹 달아났다.
“회장님, 너무 급합니다. 서 과장 아직 20대예요. 과장 단 지도 얼마 안 됐고요.”
“승학이도 서른 되자마자 상무로 입사했어. 다를 거 없어.”
“서 과장이랑 서승학 전무를 어떻게 같게 취급합니까.”
김태준 사장의 말에 서청수 회장의 목소리가 튀었다.
“이 새끼야, 같게 취급 못할 건 또 뭐냐. 너도 지금 원웅이가 서자라고 깔보는 거냐?”
“회장님, 그게 아니라…….”
“SSM도 잘됐다며. 명분도 갖춰졌는데 이것 하나 내 맘대로 못하나?”
“…아닙니다.”
“내년 정기 인사에 반영하도록.”
뚝.
서청수 회장의 전화가 끊겼다.
김태준 사장은 단순한 주정이겠거니 했지만 진심이었다.
* * *
2010년 1월, 정기 인사에서 서원웅은 전략기획실 부실장으로 승진했다.
전략기획실 내 부실장 자리는 없었다.
실장인 도진석 상무에 이어 부서 내 2인자인 김영우 차장이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전략기획실 부실장이라는 보직은 순전히 서원웅을 위해 만든 자리였다.
부실장 자리는 김태준 사장이 고민 끝에 내놓은 방안이었다.
필래마트 내에는 서원웅에게 적합한 보직이 많지 않았다.
박만섭 부사장이 꿰찼던 상생경영본부장 자리가 있기는 했지만, 아직 1개의 부서를 이끌기에는 경륜이 부족했다.
게다가 직급만 놓고 알맹이는 없는 한직으로 보내는 건 현상 유지만도 못한 승진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김태준 사장은 한참을 고민했고, 그 결과가 전략기획실 부실장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