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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37화 (136/556)

난 할 수 있어 137화

“여론의 반발 없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강점이 있는 기획입니다.”

“한창 SSM으로 비난 여론 따가운 이때에 우리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클 거야.”

“그럼 이 기획을 그대로 받아들이실 겁니까?”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부적인 부분만 조정해서 바로 사업부를 만들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기자들한테 보도자료 뿌려서 홍보도 확실하게 하도록 하고.”

“예, 사장님.”

김태준 사장은 회의가 끝나고도 간헐적인 웃음과 함께 기획안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 * *

필래 in 마켓.

필래마트가 선보이는 SSM 브랜드였다.

김태준 사장은 직접 기자들 앞에서 의욕적으로 이 브랜드를 밀었다.

“필래 인 마켓은 회사의 이익과 영세 상인들과의 상생을 고민한 끝에 론칭한 브랜드입니다. 우리 필래마트는 항상 사회의 공익과 약자의 고통을 생각하겠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신설된 SSM사업부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이미 위마트는 250여 개, 샬롯마그넷은 300여 개에 달하는 점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SSM 사업에 있어서는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을 여유가 필래마트에는 없었다.

김태준 사장은 즉각 30여 개의 점포를 지역 시장 상인들과 협의되는 대로 출점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연내 70여 개의 점포의 출점을 목표로 삼겠다고 했다.

서원웅이 주도하는 팀의 기획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2009년 10월.

모 프로야구 구단이 아홉 번째 우승을 거둔 즈음, 한 전통시장이 평소와는 달리 양복쟁이들로 붐볐다.

대찬도 양복쟁이의 일원이었다.

-(경) 필래 in 마켓 1호-우산월곡시장점 오픈 (축)

월곡시장 입구에 양복쟁이들이 도열했다.

필래 쪽에서는 서원웅이 섰고, 그 지역 유지들과 월곡시장의 상인 회장이 나란히 섰다.

대찬은 그 대열에는 끼지 못하고 붐비는 틈바구니에 간신히 서 있었다.

지역신문 기자들이 대부분 참석했고, 중앙일간지 기자들과 지상파 방송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서원웅은 필래마트를 대표해서 상인 회장과 유쾌하게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서로 으르렁거리기에 바쁘던 대형 마트와 시장 상인이 손을 맞잡고 웃는 장면은 그 자체로 희귀하고 유의미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서원웅은 이제 제법 능숙하게 카메라 렌즈에 시선을 맞추며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것으로써 전통시장과의 공존과 상생을 노린 필래마트의 SSM은 대외적으로 서원웅의 작품이 되었다.

대찬은 음지에서 그를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필래 in 마켓은 광주 우산월곡시장을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의 30여 개 시장에 진출했다.

필래 in 마켓은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사업이었다.

신선 식품을 판매하지 못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에 진출하지 못한다는 건 각오한 일이긴 했지만 뼈아픈 단점이었다.

그래서 필래마트는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SSM 브랜드를 출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매출의 폭증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회사 차원에서는 큰 이익을 취했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서원웅 개인의 차원에서는 막대한 이익이 따랐다.

30도 안 된 나이에 과장을 달고 대규모의 사업을 기획했다.

그 사업은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대외적으로는 상생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는 평가마저 들었다.

그건 필래그룹으로부터의 콩고물을 기대한 기자가 조금 과장한 측면이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이뤄 놓은 것이 있어야 과장된 찬사도 듣는 법이었다.

상생 경영을 도모하는 젊은 재벌 2세는 서원웅의 독보적인 자산이 되었다.

서원웅의 성공을 가장 기뻐한 건 아버지 서청수 회장이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이봐, 이목구비는 몰라도 대가리는 내 대가리를 닮은 게 분명해. 그렇지?”

“하하… 아무렴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면 우리 어엿한 서씨 집안 사람이라고 해도 누가 반대하겠어.”

“회장님 핏줄이니 그렇긴 합니다만…….”

비서실장은 확언하지는 못했다.

서원웅이 서청수 회장의 아들이란 건 부정할 수 없는 대외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서자였다.

그를 진정한 서씨 집안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건 엄밀히 말하면 서청수 회장 하나뿐이었다.

서원웅의 이복형이자 잠재적 경쟁자인 서승학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의 친모인 서청수 회장의 부인 역시 서원웅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서청규 사장과 가까운 집안사람들도 모두 서원웅을 적시했고, 서청수 회장과 가깝다고 해서 서원웅에게 호의를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서청수 회장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이번 아버지 제사에 원웅이도 불러야겠어.”

“예? 하, 하지만…….”

“집안일이야. 자네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은 불편한 속내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이야 서청수 회장 역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쇠도 뜨거울 때 두들겨야 한다.

서원웅이 아버지의 도움 없이 자연스레 대내외의 관심을 받고 있다.

흔치 않은 기회였다.

이런 차에 서청수 회장의 아버지이자 필래의 창업주인 서광구 전 회장의 제사에 참석하게 된다면, 서원웅은 확실히 세간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서청수 회장에게 물었다.

“그럼 회장님께서는 서원웅 과장을 후계로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음, 아직 그걸 논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그렇긴 합니다만…….”

“누가 후계자가 되든 원웅이를 키우지 않을 이유가 없어.”

“하지만 서승학 전무가…….”

서청수 회장은 픽 웃었다.

“승학이 그 성격, 그 능력으로 후계 자리를 맡아 놓겠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이대로라면 내가 고종, 그놈이 순종 판이야.”

그의 말대로 서청수 회장은 서승학에게 덜컥 후계를 약속하고 싶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구설수에 오르는 성질머리에, 경영 능력마저 의심받고 있다.

흰 머리, 주름만 느는 판이었다.

그렇다고 내칠 수는 없었다.

서승학은 적장자에 아픈 손가락이었다.

고민만 깊어졌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11월.

서광구 회장의 기일이 가까워졌다.

필래는 전통적으로 가족경영을 강조했다.

그런 까닭으로 서광구 회장은 죽어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 역시 매년 아버지의 기일이 되면 일가친척을 모두 불러 모아 성대하게 제사상을 차렸다.

그건 필래그룹의 회장이기에 앞서 서씨 가문의 우두머리로서의 권위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서청수 회장은 그 자리에 서원웅을 초대했다.

더 이상 내놓은 자식이 아닌, 당당한 서씨 가문의 일원이 되라는 의중이었다.

서원웅은 두려웠다.

말이 좋아 같은 집안이지, 실상은 남보다 못했다.

따가운 눈총을 받을 건 불 보듯 뻔했다.

서청수 회장의 비호가 있다고 한들 그 눈총과 등쌀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대찬아, 나랑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서원웅은 대찬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대찬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야.”

“알아. 그래도 같이 가 줘. 문 앞까지만이라도…….”

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서원웅의 눈빛이 절실했다.

대찬은 그걸 떨칠 수 없었다.

“같이 가 줘, 대찬아…….”

서원웅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대찬의 손을 붙잡았다.

미세한 진동이 대찬의 말초신경을 타고 전해졌다.

대찬은 그 진동 앞에 고개를 가로저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웅은 그제야 진눈깨비처럼 웃음도 울음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즈음 서청수 회장의 자택에서는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서청수 회장의 부인, 백양옥 여사였다.

“당신 미쳤어요?”

“미치기는.”

“아니, 그럼 그놈을 아버님 제사에 왜 부르는 건데요?”

“어쨌거나 서씨잖아요.”

서청수 회장의 외투를 받아 들던 백양옥은 화를 참지 못하고 침대에 집어 던졌다.

“서씨면 다예요? 당신이 바깥으로 돌아서 낳은 자식이잖아요. 기어코 그 상판을 내 앞에 들이밀어야 속이 편하겠어요?”

“어허, 상판이라니. 말을 좀 가려 하세요.”

“지금 말상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아세요.”

“어허, 그래도!”

백양옥 여사는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부릅떴다.

“권위로 찍어 누르면서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말아요?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얘기해 봐요.”

“물론 당신 마음이 어떨지는 잘 알아요. 조강지처 놔두고 내가 몹쓸 짓 해서 낳은 자식이니까.”

“그걸 아는 양반이 지금 이래요?”

“…그래도 이미 낳은 내 새끼야. 어떡해요?”

“당신 새끼지, 내 새끼는 아니에요.”

따지고 들자면 백양옥 여사의 말이 옳았다.

서청수 회장은 팍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 순전히 내 죄예요. 그래도 원웅이는 내 피가 흐르고, 우리 아버지 피가 흐르는 아이잖아요. 할아버지 제사에는 참여할 자격이 있어요.”

“까짓것 술이나 올리고 제사상에 절이나 올리는 걸로 뭐라고 할 생각 없어요.”

“그럼 더 말 안 해도 되겠군.”

백양옥 여사는 서청수 회장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게 우리 승학이에게 문제가 될 테니 나는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갑자기 승학이가 왜 나와?”

“발뺌할 생각 말아요. 지금 승학이가 아니라 그 자식한테 회사 넘겨줄 꿍꿍이 갖고 있잖아요.”

“넘겨짚지 마요.”

“귀신은 속여도 난 못 속여요. 정신 차린 줄 알았더니 아직 그년 향수 냄새에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모양이죠?”

“당신!”

서청수 회장의 고함에 백양옥 여사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왜요! 귀 안 먹었어요!”

“…오늘은 나가서 자고 들어올게.”

그렇게 자리를 뜨는 서청수 회장의 뒤통수에 대고 백양옥 여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발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자식이 문지방 넘으면 당장 상판에 소금 뿌릴 테니 그럴 줄 알아요!”

서청수 회장은 탁,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서광구 회장의 기일.

그날은 필래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쉬었다.

대찬은 서원웅과 함께 서청수 회장의 저택으로 향했다.

대학 시절 서청수 회장의 초대를 받아 방문했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때는 그저 친구 아버지의 초대일 뿐이었다.

지금은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가는 듯했다.

대찬은 국산 세단을 빌려 서원웅을 태워 주었다.

서청수 회장 저택이 있는 부촌의 골목 어귀로 들어오자 인파들이 붐볐다.

필래그룹 계열사들의 중역들이 남극 한파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펭귄들처럼 서 있었다.

그들에게는 집안사람들끼리의 제사가 진행되기 전, 간단히 치러지는 추모식의 방명록에 제 이름 석 자 써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재벌가의 요인들이 모이는 자리인지라 부지런한 몇몇 기자들이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온 차량이 이미 골목을 점령했다.

대찬은 그 꽁무니에 차를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겠는데.”

“응…….”

“같이 가 줄게. 나가자.”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때 대찬이 서원웅의 손을 턱 잡았다.

“야.”

“응?”

대찬은 서원웅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절대 울면 안 된다.”

“뭐? 내가 울긴 왜 울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울면 안 돼. 알았어?”

서원웅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대찬은 서원웅의 손을 놔주었다.

“나오지 말아 봐.”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차 문을 열고 나섰다.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서원웅 쪽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대찬이 웃으면서 그를 밖으로 안내했다.

“나오시죠, 과장님.”

친구의 장난스러운 허례허식에 서원웅은 긴장이 풀려 미소를 머금었다.

대찬은 서원웅을 서청수 회장의 저택 앞까지 에스코트했다.

대문까지는 완만한 경사 길이었다.

진눈깨비 때문에 미끄러웠다.

대찬은 서원웅이 넘어질라,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서원웅이 대문으로 향하자 필래그룹의 중역들이 그쪽을 바라봤다.

‘뭐야, 무슨 깡으로 여길 찾아온 거야?’

‘설마 회장님이 부른 건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대찬의 귀에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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