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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36화 (135/556)

난 할 수 있어 136화

도진석 상무는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기획서가 나오면 바로 SSM 사업 추진하겠습니다. 도 상무, 모쪼록 심혈을 기울여 주세요.”

“…그러죠.”

마음 같아서는 심혈을 기울이기는커녕 난장을 쳐 놓고 싶었다.

하지만 기안자는 서원웅이지만 결재권자는 본인이었다.

잘된다면 서원웅이 공로를 독차지할 것이다.

못 된다면 결재권자인 도진석 상무가 독박을 쓸 여지가 있다.

김태준 사장이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도진석 상무로서는 내키지 않아도 서원웅에게 사람을 붙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도진석 상무는 대찬이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서원웅과 함께 SSM 사업을 구상하도록 지시했다.

“허운, 유채경 사원도 서 과장 서포트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4명의 인원이 SSM 사업 기획에 투입되었다.

SSM은 뜨거운 감자였다.

언론에서는 연일 SSM에 대한 보도를 쏟아 냈다.

대찬의 죽마고우인 최재한도 비판적인 논조로 보도했다.

매일 최재한의 리포트를 챙겨 보는 대찬의 마음이 불편했다.

-시장 상인 연합회는 근방의 SSM 개점 저지를 위해 삭발 투쟁까지 감행하고 나섰습니다. 대기업 자본은 상생 경영이냐, 아니면 골목 상권 파괴냐,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현명한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ONB 뉴스, 최재한입니다.

대찬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최재한의 리포트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의 말마따나 현명한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필래마트의 경쟁 업체들은 거침없이 SSM을 신규 출점했다.

언론의 비난이야 마이동풍으로 흘려들었다.

어차피 잠깐의 시련일 뿐이고, 그 시련을 견딘 열매는 달콤하다는 걸 경쟁 업체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필래마트의 경우는 달랐다.

필래마트는 빈손으로 시작해야 했다.

노하우도 없고, 이미 목 좋은 곳은 선점당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차별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경쟁 업체를 따라 마구잡이로 출점하는 건 필래마트의 차별적 장점인 윤리 경영, 상생 경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꼴이었다.

“골치 아프네.”

대찬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SSM팀은 출범 이후 며칠간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근면성실이 아니었다.

번뜩이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였다.

그러니 더 죽을 맛이었다.

반복 노동 할 거리가 잔뜩 쌓여 있으면 손에 뭐라도 쥐고 있을 테다.

그런데 팀원들이 원탁에 모여 팔짱만 끼고 침묵만 했다.

그러니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 마음만 불편했다.

대찬은 민망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어서는 시간만 축나겠네요.”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유채경이 대찬을 올려다봤다.

“동감이에요.”

“각자 흩어져서 아이디어를 얻어 오면 어떨까 합니다.”

대찬은 서원웅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떨까요, 과장님?”

입사 동기이자 대학 동기인 서원웅에게 대찬은 말을 높였다.

서원웅은 대찬의 높임말이 여태 적응되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부터 흔들리면 리더의 자격이 없다.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그럼 각자 흩어져서 생각을 정리하고, 2시간 후에 돌아오는 걸로 하겠습니다.”

팀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팀원들은 각자 흩어졌다.

대찬은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최재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기자님, 요즘 바쁩니까.”

“뭐야, 낮부터 전화하는 거 보니까 회사 편한가 보다.”

“편하기는. 완전 가시방석이야.”

“왜, 무슨 일인데.”

대찬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최재한에게 투정하듯 말했다.

“이런 마당에 너는 SSM이 어쩌고저쩌고 하고 있음 내 마음이 어떻겠어?”

“그게 내 잘못이야? 돈이라면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천방지축 들쑤시고 다니는 재벌 잘못이지.”

받아칠 말이 궁한 대찬은 입맛을 쩝 다셨다.

“기자를 하더니 말빨이 세졌네.”

“너야말로 회사 다니더니 공정성을 잃었어. 잃어도 한참 잃었어.”

서릿발 같은 꾸지람에 대찬은 웃으며 눙쳤다.

“밥그릇에 충성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덕분에 정신 좀 차렸다.”

“근데 이미 리포트 다 나간 마당에 나한테 전화는 왜 했어?”

“네가 리포트 한 거기가 어딘지 궁금해서. 무슨 시장이야?”

대찬은 최재한에게 전해 들은 시장으로 곧장 향했다.

뉴스에 등장했듯 그곳은 극한의 대립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장 상인들이 내건 시뻘건 글씨의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영세 상인 등골 빠는 위마트 미니는 자폭하라!

-상도덕 없는 위마트 불매!

위마트 미니는 위마트에서 출범한 SSM 브랜드였다.

아스팔트를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은 어제 벌인 삭발 시위의 잔해였다.

대찬은 시장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시절이 시절이라 그런지 몰라도 시장은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대찬의 양복 차림은 시장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시장 상인들은 혹시 대찬이 위마트 직원이지 않을까 의심하며 눈초리를 벼렸다.

대찬은 그런 시선은 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시장을 둘러봤다.

시장이야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시장이었다.

장사를 하는 상인들 중에 아직까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SSM 결사 반대의 의지를 보이는 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대찬은 그들 상인 중 1명에게 접근했다.

생선 장수였다.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하오.”

상인은 까칠하게 대꾸했다.

그는 대찬이 위마트 직원이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SSM 때문에 그러십니까?”

“오다가 현수막 못 봤소? 하다못해 마빡 동여맨 머리띠에 글자 안 보이시오? 아니면 알면서도 속을 뒤집으려고 일부러 물어보시오?”

공격적인 태도에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불쾌했으니 그만 묻고 가시오. 고등어라도 몇 손 사 갈 거 아니면. 장사 방해되니까.”

“두 손 주세요.”

대찬이 그렇게 말하자 생선 장수는 마뜩찮은 시선을 보내면서도 고등어 대가리를 쥐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고등어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로 시간을 얻은 대찬이 생선 장수에게 물었다.

“근처에 SSM이 들어오면 장사가 잘 안 되실 거 같습니까?”

“자꾸 짜증나게 할 거요? 당연한 걸 왜 계속 물어요?”

“SSM이 상인 여러분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생선장수는 얼른 대찬의 손에 손질한 고등어를 쥐여 주며 말했다.

“1만 원이요. 돈 주고 얼른 가쇼.”

“한 손만 더 주세요.”

“뭐요?”

생선 장수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하세요? 한 손만 더 주시라니까요.”

“참 나!”

다시 소비자의 신분을 얻은 대찬이 또 질문을 던졌다.

“SSM이 들어오면 왜 장사가 안 될까요?”

“진짜 한 번만 더 짜증나게 하면 재미없을 줄 아쇼.”

생선장수는 신경질적으로 고등어의 배를 갈랐다.

고등어의 창자가 흉물스럽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대찬이 굳이 상인의 짜증을 돋우면서 던지는 질문은 실은 자신을 향해 던지는 것이었다.

피차 다 아는 내용이지만 굳이 질문을 하면서 답을 찾고자 했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대찬이 생선 장수에게 또 질문했다.

“SSM이 생선을 안 팔면 사장님은 SSM이 들어오나 마나 관계없으시겠죠?”

“위마트 신종 전략이요? 시장 상인들 다 화병 나서 뒤지게 만들고 SSM 입점시키는 게.”

“그렇잖아요. 생선 안 팔면 사장님도 머리띠 푸시고 신경 끄실 거잖습니까.”

생선 장수는 얼굴이 벌게져서 대찬에게 억지로 고등어를 안겼다.

“니미, 생선 안 팔면 그게 슈퍼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당장 꺼져요! 생선 더 달래도 안 줄 거니까!”

“감사합니다, 사장님!”

“살다 살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생선 장수의 싫은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찬은 그 앞에서 물러났다.

생선 장수는 대찬더러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고등어 사려, 고등어 사려!”

대찬은 생선 가게를 떠나서도 한참 시장을 배회했다.

안 팔리는 물건을 팔려고 호객하는 상인들의 소리가 그의 귀에 웅웅 울렸다.

“애기 엄마, 오늘 목살 싸게 나왔어. 하나 들고 가.”

“제철 맞은 꿀복숭아 있습니다, 꿀복숭아 1박스 2만 원! 싸다, 싸.”

1명이라도 끌어오려고 목청을 높이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대찬의 귀에 웅웅거렸다.

고등어.

목살.

꿀복숭아.

그것들이 답을 주었다.

“됐다.”

대찬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웃었다.

그를 계속 주시하던 생선 장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친놈의 새끼.”

쾅.

생선 장수는 수도 없는 생선 대가리를 잘랐을 칼로 고등어 대가리를 내리쳤다.

잘린 대가리가 생선 대가리들을 모아놓은 고무대야에 맥없이 떨어졌다.

대찬은 곧바로 사무실에 복귀했다.

회의실에 모인 팀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안에서 찾지 못한 답을 밖에 돌아다닌다고 바로 떠오를 리 만무했다.

팀장인 서원웅은 팀원들의 얼굴을 보고 멋쩍게 웃었다.

“어째 소득들 좀 있으셨어요?”

그 말에 모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 침묵하는 와중에 대찬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

“오! 조대찬! 뭐 떠올린 것 좀 있어?”

허운이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유채경이 그를 가볍게 질책했다.

“허운 씨, 대리님 이름 함부로 부르면 안 됩니다.”

“아아, 죄송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저도 궁금하긴 해요. 무슨 좋은 생각 있으세요, 조 대리님?”

모두의 시선이 대찬에게로 쏠렸다.

대찬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어설픈 웃음을 걸쳤다.

“너무 기대하진 마시고요.”

서원웅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어서 말해 봐.”

“전통시장에 우리 SSM을 입주시키는 게 어떨까요.”

그 말에 팀원들은 일제히 기운이 빠졌다.

아무리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 정도로 터무니없을 줄이야.

허운이 한숨을 쉬며 대찬의 주장을 반박했다.

“당장 시장 반경 100미터 안에만 들어오려고 해도 삭발하고 난리를 피우는데, 시장 안에다 들이겠다고 하면 자해까지 할걸요.”

“이건 허운 씨 주장이 맞는 거 같아요.”

유채경 역시 허운의 생각과 같았다.

그러나 대찬은 생각을 꺾지 않았다.

“방법은 이거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신선 식품을 제외한 공산품만 판매하는 겁니다.”

“음?”

그 말에 팀원들은 대찬이 말하는 맥락을 짚었다.

“시장에서 팔리는 대부분의 상품은 신선 식품입니다. 육류, 청과, 수산. 우리가 신선 식품에 손을 떼고 그들이 취급하지 않는 공산품만 판매한다면, 마찰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시장 방문객들도 늘어나니까 오히려 환영할 수도 있겠어.”

서원웅의 말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구가 밀집된 도심에는 이미 위마트와 업하우스의 SSM이 상권을 꽉 쥐고 있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듭니다.”

“그럼 우리는 역으로 시장이 주요 상권인 구도심이나 교외 지역을 공략한다?”

홍은주도 맞장구를 쳤다.

“그런 곳은 위마트와 업하우스가 얼씬도 못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선점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갑자기 팀 분위기에 활력이 돌았다.

대찬의 주장은 필래마트가 주창하는 상생 경영과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시장을 선점당한 후발 주자의 애로사항도 돌파할 수 있는 방책이었다.

신선 식품을 배제함으로써 품질 관리와 재고에 대한 걱정도 사라졌다.

그의 주장은 곧바로 채택되어 팀의 기획서로 만들어졌다.

두 달을 기한으로 만들어진 TF는 3주 만에 기획을 완성하여 상부에 보고했다.

곧바로 김태준 사장이 주재하는 임원 회의에서 기획이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재밌네. 재밌는 기획이야.”

김태준 사장의 감상평에 이동수 부사장도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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